그럴 리가 없잖아
초등학생 시절, 학급에서 시험 답안지가 유출되는 일이 있었다. 그 일은 두세 명이 교탁 아래에 놓여 있던 서류봉투를 발견한 것으로 시작되었는데, 봉투 안에 든 것이 답안지라는 사실이 온 교실에 알려지자, 학급의 절반 가까이 되는 아이들이 앞다투어 나와 답안지를 살폈다. 물론 그 소동을 애써 무시하며 친구들과 떠드는 데 집중한 나 같은 아이도 있었다.
그 소동이 한창일 때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왔다. 교탁 쪽으로 나가 있던 아이들은 후다닥 제자리로 돌아가 시치미를 뚝 떼고 앉았지만, 답안지를 함께 본 의리란 아주 얄팍한 것이어서 서로가 서로를 고발하며 범인들은 곧 색출됐다. 문제는 거짓 고발이었다. 엉뚱하게도 누군가 나를 공범으로 지목했다. 나는 선생님에게 억울함을 읍소했고 줄곧 함께 수다를 떨었던 옆자리 아이가 증언까지 해주었지만 선생님은 무엇이 진실인지 가려내기를 포기했다.
억울함은 끝내 풀리지 않았지만 그래도 끔찍하게 괴롭지는 않았다. 그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같은 반 — 그러나 그 소동 당시 내 모습을 보지 못했던 — 친구에게 들었던 말 때문이었다. “너 안 그런 거 알아. 네가 그럴 리가 없잖아.”
사람과의 관계에서 곤란에 처할 때마다 몇 번이고 떠올리며 위안으로 삼던 그 따뜻한 말이 개운치 않게 들릴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연구 기관 내 어느 교수가 연구를 수행하지도 않고 여러 편의 논문을 날조했다는 소문이 대학의 조사를 통해 사실로 드러났을 때였다. 소식을 접한 이들 대부분은 ‘어쩌자고 그런 짓을 했대?’ 식의 놀란 반응을 보였지만 아주 일부는 대학의 조사 결과를 의심하는 투로 말했다.
“그 사람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그랬을 리 없는데.”
“이미 정년도 보장된 사람이 그랬을 리 없는데.”
그 말들을 처음 들었을 때 왠지 모를 위화감이 들었지만, 그 정체를 확신할 수 없었다. 내가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말들은 내가 친구에게 들었던 것과 같은 믿음과 위로의 말이 아니라는 것뿐이었다. 이제는 그 말들이 어떤 말들인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성급하고 피상적인 판단에 따른 오류. 원치 않는 진실에 대한 저항.
뛰어난 사람에게는 부정할 동기가 없는가
사람들은 자신이 상식과 규칙을 지키는 만큼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할 것으로 기대한다. 상대가 어떤 규칙을 알고 있다면 그 규칙을 지킬 것이라고 말이다. 그 기대가 있다면 상대가 규칙을 등한시하고 있다는 의심이 들어도 일단 믿어보려는 게 우리의 습성인지도 모른다. 의심은 사람을 지치게 만드니까. 실망하고 싶지 않고 당장의 갈등을 피하고 싶으니까.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은 차라리 믿고 싶지 않은 일들에 저항하는 게 낫다고 판단하는지도 모른다.
딱 이 정도의 심정에서 나온 ‘그럴 리가 없잖아’였다면 그리 찝찝한 마음이 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몇몇이 그 날조범이 결백한 이유라고 찾아낸 것이 ‘그가 뛰어난 사람이라서’, ‘일정 지위에 오른 사람이라서’라는 데 있다. 그런 ‘잘난’ 사람들은 부정을 할 만한 동기가 없나.
그와 비슷한 말을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다 싶었는데, 바로 서울 소재의 한 명문대에서였다. 그 대학에 다니던 학부생 하나는 부끄러운 티 하나 없이 이렇게 주장했다. “좋은 대학 다니는 사람들이 도덕적인 것 같아.” 그는 좋은 교육을 받는 사람들이 능력 면에서 열등감을 느낄 필요가 없으니 모두에게 친절한 것 같다고 말했다. 얼굴에 침을 뱉어주고 싶은 것을 겨우 참고, 울렁이는 속을 붙들고 화장실에 가 헛구역질을 했다.
뛰어난 사람, 일정 지위에 오른 사람이 부정한 일을 하지 않을 거라는 말은, 그 명문대 학부생의 극단적인 — 심지어 자신이 똑똑하다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혐오까지 담긴 — 말에 비하면 미적지근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결국 논리는 같다. 더 넓게 보자면 이런 믿음들과도 비슷하다. 부족함 없이 자라면 구김살이 없다거나.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착하다거나. 머리가 좋으면 사회성이 없다거나. 얼굴이 예쁘면 성격도 좋다거나. 뚱뚱하면 게으를 거라거나. 마치 비뚤어진 상식 속에서 대상의 이미지를 고정한 뒤 그것 이외에는 보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 여기에 쓰인 말들이 가진 오류에 대해서는 굳이 하나하나 반례를 들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 말들이 참일 만큼 비좁고 단조로운 세상이 아니다. 진실은 더 다양하다. 그 학부생도 몸소 증명하지 않았는가, 명문대생의 부도덕함을.
날조를 저지른 그 교수 역시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들은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 정교수인 그에게 더 이상 원하는 것이 있었을 리 없다고 말하지만, 그 말은 그들이 믿어 마지않는 그가 저지른 진실에 의해 반박되었다. 그가 대학의 조사에 참석하지도 않고 연락도 두절한 채 숨어있었기 때문에 날조의 전말을 그의 입을 통해 들을 기회는 없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가 그 일을 무자각 속에서 저지른 것처럼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기에는 너무 철저했다. 그는 연구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모든 자료, 즉 실험 대상에 대한 기록부터 결과까지 만들어 두었다. 마치 연구가 실제로 이루어졌던 것처럼. 논문들은 모두 단독 저자로 발표되었고, 실행되지도 않은 실험의 진행 과정과 연구 윤리 승인을 받았다는 거짓말이 기재됐다. 그리고 그런 일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진실에 저항하지 않기
그가 여러 차례 논문을 날조하게 된 동기에 대해서는 확언할 수 없지만, 스튜어트 리치 (Stuart Ritchie)가 『사이언스 픽션』
(참고 문헌 1)에서 정리한 내용이 참고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첫 번째는 연구 지원금이 부족해서, 두 번째는 자기기만, 즉 스스로 옳다고 믿는 이론이나 가설을 정말 ‘옳은’ 것으로 만들고 싶은 욕구 때문이다. 그가 더 이상 단독 논문 실적이 그리 필요치 않은 정교수였고, 심지어 퇴임까지 얼마 남지 않았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날조의 이유가 더 나은 취업을 위해 실적을 쌓는 데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든 논문을 출판해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자금 부족이 그를 초조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자기기만이라는 이유도 납득할 만하다. 그가 어떤 성정의 연구자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독하게 자기만의 ‘진실’을 고집하는 연구자는 있으니까. 예를 들면 독일의 고체 물리학자 얀 헨드릭 숀 (Jan Hendrik Schön). 『사이언스 픽션』에 언급된 바에 따르면, 숀은 <Nature>와 <Science>에 출판한 논문 수 편을 포함해 총 32편이 날조임이 밝혀져 철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이 보고한 과학적 효과는 진짜이고, 흥미롭고, 연구할 가치가 있다는 것을 진정으로 믿고 있다”라고 호소했다.’ 매우 극단적인 경우이기는 하지만, 부정은 돈과 실적 — 대개 나쁜 일의 동기로 여겨지는 것들 — 때문이 아니더라도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점에서 생각해 볼 만하다.
어쩌면 이 두 가지 이유도 아니고, 일반의 상식으로는 짐작할 수 없는 아주 내밀한 이유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이유를 찾아내는 일은 과학이라는 시스템을 위해 필요하지만 당장,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이불을 덮고 누워 똑똑한 과학자들의 부정에 대해 생각하고, 주변의 생각을 조심스레 그러모으고, 그러는 동안 쌓이고 막힌 생각을 노트 위에 정돈해 나가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류투성이인 직관에서 벗어나 진실을 보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명문대생도 비도덕적일 수 있으며, 뛰어난 사람도 부정을 저지를 수 있다는 진실을. 모든 일이 명료하게 드러난 마당에 ‘그럴 리 없다’는 믿음으로 진실에 저항하지는 말자는 것이다.
평화로운 단면과 괴로운 이면
이렇게 냉정할 수 있는 건 내가 날조한 교수와 어떤 관계도 없는 사람이어서 진실을 진실로 받아들이기 쉽기 때문일 것이다. 그와 평소 친하게 지냈던 다른 교수는 진실을 마주한 이후 ‘정말 똑똑한 사람이었는데’라며 한숨을 푹 쉬다가 ‘어쩌다가…’라며 말을 다 잇지 못했다고 한다. 상상 속에서 그 교수를 진심으로 신뢰하는 사람이 되어 본다. ‘당신이 그랬을 리 없잖아요’라고 믿음과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은 마음과, 그가 벌인 일이 진실임을 알게 되면서 느끼는 혼란과 실망의 마음. 그 두 마음의 괴리는 무척 고통스러울 것 같다. 진실을 덮어두고 모르는 것으로 하고 싶을 정도로.
관계는 정의만큼이나 소중하다. 결국 누군가가 그 괴로움 끝에 진실을 보지 않는 선택을 한대도 그를 탓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나는, 그 괴로움은 진실을 놓쳤을 때의 괴로움에 비하면 작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다. 진실을 놓치면 사기꾼이 늘어간다. 그들은 다른 이들의 신뢰를 먹이 삼아 몸집을 키우고 낯을 더 두껍게 쌓아 올린다. 어쩌면 그들은 그들 스스로가 기대했던 것 이상의 것까지 얻는다. 그들은 점점 치우기 어려운 존재가 된다. 그 부작용은 사기꾼의 몫이 아니라 속아 넘어간 개인과 사회의 몫이 된다. 싸워야 할 대상도 많아진다. 사기꾼을 감싸는 이들은 있기 마련이다. 사기꾼을 치우더라도 그들까지 몰아내는 건 쉽지 않다. 그들은 대개 무고하며 계속 속아 넘어가고 있을 뿐이니까. 사기꾼과 그를 편드는 이들이 더 이상 활개를 못 치는 상황이 되어도 사기의 흔적은 피해가 되어 나타난다. 사기꾼이 벌인 일은 쉽게 잊히고 그들의 말과 글은 계속 인용된다. 그것은 지적인 손실이 되고 뒤늦게 진실을 알게 된 누군가의 마음을 또 쓰라리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서로를 의심하게 만든다. ‘네가 그럴 리 없잖아’라는 사려 깊은 말이 순진하고 치기 어린 말처럼 들리게 만든다.
참고 문헌
1. 스튜어트 리치,『사이언스 픽션』, 김종명 역. 더난출판사, 2022. [Stuart Ritchie, Science Fictions: How Fraud, Bias, Negligence, and Hype Undermine the Search for Truth, Metropolitan Books,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