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연구실을 거쳐 갔다. 짧게 머물다 떠난 사람도 있고, 몇 년을 함께하다 타의에 의해 떠나야만 했던 사람도 있으며, 굵직한 성과를 남기고 당당히 다음 단계로 나아간 사람도 있다. 많은 성과를 남기고 다음 단계로 나아간 사람들을 가만히 떠올려 보면, 그들의 연구 역량은 분명 뛰어났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은 기다리지 않았다. 필요한 장비가 있으면 직접 알아보고 연결했다. 새로운 기술이 필요하면 다른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협업이 가능해 보이면 먼저 제안했다. 기회가 보이면 망설이지 않았다. 그들은 “주어지면 한다”가 아니라 “필요하면 만든다”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나의 대학원 시절은 지나치게 수동적이었다. 주어진 프로젝트를 성실하게 수행하는 데 집중했고, 지도교수가 설정한 방향 안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애썼다. 나는 그것이 조직 안에서 가장 안전하고 현명한 태도라고 믿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대학원 초반의 나는 의욕이 있었고, 나름의 아이디어도 있었다. 그러나 몇 차례의 경험 속에서 점점 조용해졌다. 의견을 제시했다가 설득되지 못했던 기억, 더 큰 목소리에 묻혔던 순간들이 쌓이면서 나는 스스로를 낮추는 법을 배웠다. 결국 목표는 단순해졌다. “문제없이 졸업하자.” 하지만 이곳에서 만난 대학원생들과 포닥들은 전혀 달랐다. 그들은 질문을 주저하지 않았고, 자신의 연구에 대한 주도권을 자연스럽게 행사했다. 서로의 실험을 도와주고, 노하우를 공유하고, 함께 논문을 구상했다. 누군가 어려움에 처하면 그것을 개인의 실패로 보지 않고 팀의 문제로 받아들였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깨달았다. 연구는 개인의 능력만으로 완성되는 일이 아니다. 연구는 팀 과학이다. 서로 다른 배경과 기술,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연결될 때 연구는 더 깊어지고, 더 넓어진다. “함께 가면 멀리 간다”는 말을 이곳에서 몸소 경험하고 있다.
조금 더 일찍 그 사실을 알았다면 어땠을까. 더 적극적으로 배우고, 더 넓게 사람을 만나고, 더 과감하게 질문했다면 지금의 나는 또 다른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아쉬움이 나의 첫 번째 후회다.
둘째, 포닥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시작한 것에 대한 후회
대학원에서의 수동적인 태도를 끝내고 싶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포닥을 시작하면서도 비슷한 사고방식을 유지했다. 포닥은 연구실의 숙련된 인력이며, PI가 제시한 방향을 효율적으로 실행하는 사람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나의 의견이나 연구 철학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여겼다. 그래서 연구 주제를 선택할 때도 “내가 정말 궁금한 질문”보다는 “성과로 연결되기 쉬운 주제”를 택했다. 내가 오랫동안 파고들고 싶은 분야인지 보다는, 이력서에 어떻게 보일지를 먼저 계산했다. 하지만 3년 차가 되어 보니 분명해졌다. 포닥은 단순히 박사과정의 연장이 아니다. 독립 연구자로 전환하기 전, 자신의 질문을 정의하고 연구 정체성을 구축하는 결정적 시기다. 이 시기에 스스로 묻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무엇을 연구하고 싶은가.
나는 어떤 문제를 평생 붙들고 씨름해도 후회하지 않을 것인가.
나는 어떤 연구자로 기억되고 싶은가.
나는 이 질문을 너무 늦게 시작했다. 만약 1년 차에 이 질문을 던졌더라면, 프로젝트 선택도, 시간 배분도, 네트워킹 전략도 달라졌을 것이다. 포닥은 단순히 논문을 더 쌓는 시간이 아니라, 방향을 설계하는 시간이다. 그 사실을 뒤늦게 이해한 것이 두 번째 후회다.
셋째, 성과에만 집착했던 연구 태도에 대한 후회
대학원에 입학한 이후 논문 수와 임팩트 팩터는 나를 설명하는 지표가 되었다. 졸업 가능성, 다음 자리, 평가와 추천서까지 모든 것이 숫자와 연결되어 있었다. 자연스럽게 나는 단기간에 결과를 낼 수 있는 프로젝트에 집중했고,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질문에는 소극적이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스스로를 과소평가했다. “나는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부족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가치 있는 연구자가 아니라고 착각했다. 그러나 연구를 다시 생각해 보니, 어쩌면 우리는 창조자가 아니라 발견자에 더 가깝다. Research는 ‘다시 찾는 일’이다. 이미 존재하는 현상과 데이터, 축적된 지식 속에서 의미를 재해석하고, 흩어진 조각을 연결하며, 익숙한 결과를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과정이다. 완전히 새로운 것을 무에서 만들어내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신 기존의 틀을 조금 비틀고, 다른 분야의 언어를 연결하고, 질문의 방향을 바꾸는 사람이 연구를 진전시킨다. 나는 그 본질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속도에만 집착했다. 연구는 “얼마나 빨리”의 문제가 아니라 “어디로 가는가”의 문제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깊이 있는 질문은 결국 연구자의 정체성을 만든다. 나는 오랫동안 속도를 경쟁했고, 방향을 점검하지 않았다. 그 점이 세 번째 후회다.
후회는 늦었는가
3년 차에 접어들어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 너무 늦었단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동시에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연구자로서의 커리어는 아직 진행 중이고, 방향을 수정할 수 있는 시간도 남아 있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해외에서 연구하는 삶이 화려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실제의 해외 포닥 생활은 불확실성과 외로움, 그리고 끊임없는 자기 증명의 시간이다. 그 안에서 나는 흔들렸고, 때로는 자신을 의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이곳에서의 경험 덕분에 연구에 대한 나의 가치관이 다시 세워졌기 때문이다. 연구의 본질은 성과가 아니라 질문이라는 것, 혼자가 아니라 함께 가는 길이라는 것, 그리고 연구자는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방향을 설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배웠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속도만을 쫓지 않으려 한다. 내가 의미 있다고 믿는 질문을 정의하고, 그 질문에 책임을 지는 연구를 하고 싶다는 목표를 새로 세웠다.
연구는 다시 찾는 일이다.
나는 지금, 내 연구의 본질을 다시 찾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 자신 또한 다시 찾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