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떠난 해외 포닥, 한국인은 나뿐이라고?] (14) 고별
학회에서 돌아오니 멀게만 느껴졌던 출국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일단, 연구실에 있는 내 샘플도 정리해야 했고, 개인적으로는 살고 있는 자취방에서 짐을 빼야 했다. 풀옵션 원룸이라 딱히 내가 구매한 가구나 가전도 없었기에 이삿짐을 부를 정도는 아니라 생각하고 짐 정리는 뒤로 미뤘다. 하지만 10년을 산 자취방에서 물건을 정리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미국에 가면서 가지고 가지 않을 것 같은 물건은 거의 다 버렸다. 특히 옷 같은 경우 과감하게 처분했다. 헌 옷 수거함에 넣으면 되는 멀쩡한 옷들이 대부분이었지만, 헌 옷 수거함이 너무 멀었고 또 그렇게 처분할 힘도 시간도 없었기에, 아깝지만 종량제 봉투에다 넣어서 처분했다. 이불, 베개, 안 입는 옷, 안 신는 신발, 그리고 오늘의 집에서 구매한 자그마한 러그까지 이것저것 욱여넣다 보니 50L 종량제 봉투를 10개 가까이 쓴 것 같다.
중간중간 가족을 불러 짐을 실어 내려보냈는데, 다 정리한 후 부모님이, 이 정도면 그냥 용달차를 불러 가지고 왔어도 됐었겠다고 하셨다. 별거 없다고 생각했는데 10년간 야금야금 늘어난 살림살이가 꽤 많았다. 커다란 이삿짐 상자와 미국에 가져가기 위해 알리, 쿠팡에서 주문한 물건들이 한데 뒤섞였다. 이미 출가한 지 오래되었기에 내 방도 없어진 지 오래였고, 짐을 정리할 공간이 마땅치 않았다. 그렇게 출국하기 직전까지, 아니 출국하는 그 당일까지 나는 제대로 짐 정리를 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중요한 서류를 까먹어버리는 일까지 생겼다.
공식적으로 연구실 출근은 12월 첫 번째 주 금요일까지였다. 그리고 나는 그날까지도 밤을 새우고, 연구실에서 쪽잠을 자며 실험했다. 힘들었지만 괴롭진 않았다. Next step으로 나아갈 길이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고 기쁜 마음으로 주어진 일을 했다. 마지막 날까지 실험을 해야 했기에 샘플정리는 뒤로 미뤘다. 샘플정리는 미뤘지만 마지막 날 나는 편지를 썼다. 함께 실험하며 고마웠던 박사님들께. 하지만 당시에도 연구실을 떠난다는 것이 실감 나지 않았다. 깜짝 Farewell party를 당하기 전 까진… 브라이덜 샤워, 베이비 샤워에 쓰이는 Shower라는 단어의 뜻이 깜짝 파티라고 하던데, 이렇게 되면 Farewell Shower인 걸까?
지난 수년간 선배가, 후배가 그리고 박사 동료가 연구실을 떠나는 것을 보며 함께 축하해 주고 깜짝 파티를 해주곤 했었는데, 내가 그 서프라이즈 파티의 대상자가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선배 그리고 후배들이 모여 나에게 깜짝 상장을 수여했다.
야근과 이야기의 마에스트로상 민망함과 기쁨이 공존했다. 장기근속 직원이 공로상을 받으면 이런 기분일까?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핑 돈다. (What a 갬동쓰..) 연구실에서 Farewell party를 하며 기념으로 수많은 폴라로이드 사진을 남겼다. 그리고 교수님과도 함께 사진을 찍었다.
나보다 1년 앞서 떠난 동료는 떠나기 직전 교수님과 사진을 한 장 찍었고, 그 사진은 교수님 office의 잘 보이는 곳에 걸려있었다. 그리고 그 사진을 볼 때마다 나는 부러우면서도 복잡한 여러 감정을 느꼈다. 힘든 상황에서도 결국 해외로 떠난 동료의 용기가 부러웠고, 용기를 내지 못했던 과거의 나에 대한 후회와 한심함을 느꼈다. 졸업 후 허비한 그 몇 년의 시간이 아쉬웠다.
남들은 다들 마음만 먹으면 간다는 해외 포닥을 나는 왜 이렇게 힘들게 준비해야 하는지. 그 사진을 볼 때마다 미국에 나가 있는 동료가 더욱더 멀게 느껴졌다. 같이 공부했던 동료였기에 더 많은 감정을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때문에 당시엔 눈물도 많이 흘렸다.
딱히 의식하지 않았음에도, 교수님과 찍힌 사진 속의 나는 행복한 감정이 표정으로 드러난다. 그렇게 교수님과 동료들과 그리고 10년간 사용했던 나의 소중한 파이펫, 아껴두었던 여러 샘플들, 이 모든 것을 두고 나는 정든 연구실을 떠났다. 그렇게 교수님과 사진을 찍고 연구실 식구들과 파티를 하고 나서야 내가 이곳을 떠난다는 것이 그리고 그토록 가고 싶었던 미국으로 가게 된다는 것이 실감 났다.
애니튼, 파티는 파티고 정리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일단 샘플정리를 하며 냉동고도 비워줘야 했고, 혹시 몰라 몇 년간 가지고 있던 샘플들도 과감히 처분해야 했다. 그동안 작성했던 비루한 랩 노트를 열어 혹시 나에게 필요할지도 모르는 부분은 사진으로 남겨야 했다. 거의 살다시피 했던 곳이라 그런지 연구실에도 개인 짐이 어마어마했다. 대부분 연구실에 기증하거나 버렸고, 값비싼 것들은 본가로 부쳤다. 실험 조건을 메모해 둔 포스트잇 한 장도 일일이 중요한 것인지 확인하고 버려야 했으니 연구실 짐 정리하는데도 며칠 걸렸던 것 같다. 외부 기기에 들어있는 데이터들은 개인용 외장하드에 옮겨서 정리했다.
이제 자취방 정리가 남았다. 혼자서 아등바등 짐을 쌌다. 좁아터진 집에 무슨 짐이 그렇게 많은지. 옷만 버리면 될 거로 생각했는데, 상상 이상으로 짐이 많았다. 쓰던 샴푸 바디워시까지 버리기엔 아까운 것이 너무 많아서 다 챙기다 보니 이삿짐 박스 한두 개로는 부족했다. 버리긴 아깝고 가져가도 안 쓸 것 같은 물품은 그냥 집에 두고 나왔는데 주인아저씨가 딱히 뭐라고 하시진 않았다.
집 정리를 마치고 남은 샘플 정리를 하러 연구실에 갔을 때, 교수님과 마주쳤다. 교수님께서 오늘이 진짜 마지막이냐고 물으며 Hug를 해주셨다. 박사 공부하겠다고 결정했을 때 해주셨던 Hug 이후로 처음이었다. 잘할 수 있을 거라며 잘하고 오라는 덕담도 해주셨다.
모든 정리를 마치고 서울을 떠나는 마지막 날, 자주 가던 미용실에 들러 머리도 잘랐고, 좋아하던 근처 식당에 들러서 마지막 식사를 했다. 부모님이 자취방 사장님께 전화하여 이러이러한 이유로 집을 빨리 빼게 되었으니 보증금을 돌려주십사 연락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빠른 보증금 환급을 위해) 아이가 미국에 유학을 가게 되었다고 샤라웃을 해버리시는 바람에, 평소 교류도 없던 주인아저씨가 뜬금없이 훌륭한 연구 하고 돌아오라고 축하를 해주셨다. 그렇게 나는 축하를 받고 서울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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