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nsplash의 Tamara Gak 연구자 A의 페르소나 1) 중 하나는 과제책임자다. 과제책임자는 연구과제에 참여하는 연구원의 인건비를 포함한 전체 연구비 집행에 대한 전권을 가진다. 그는 베테랑 연구자답게 여러 과제를 수주함으로써 다수의 과제연구원을 거느리는데, 그 카리스마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다. 과제연구원 대부분 그에게 복종적인 태도를 보이며 맡은 바 역할을 다하지만, 가끔 사고가 나기도 한다. 이번이 벌써 세 번째다. 과제연구원이 퇴사로 마무리되는 경우, 퇴사 후 소송을 거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번에는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던 과제연구원 A가 갑작스럽게 퇴사하며 투서하는 바람에 관련 컨소시엄 프로젝트 전체에 차질이 생긴다. 그는 연구자 A가 약속을 어겼고, 부당한 업무 지시를 했으며, 인격 모독 발언을 자주 하였다고 하소연한다. 프로젝트 총괄 과제책임자와 세부 과제책임자인 연구자 A 간의 책임 공방이 확대되다가 급기야 격한 분쟁으로 치닫는다. 총괄 과제책임자는 연구자 A의 잘못이 크다며 당사자와 소속기관에 해명을 요구하고, 반대로 연구자 A는 본인의 억울함을 강조하며 기관 차원에서 방어해 줄 것을 호소한다. 당초 그들은 자발적으로 의기투합하여 컨소시엄 협력체계를 구축한 당사자들이 아니던가. 치열한 경쟁을 뚫고 큰 규모의 연구 프로젝트를 수주한 것에 함께 기뻐하지 않았던가. 견고해 보이던 그들의 우호적인 관계는 1년도 되지 않아 파탄 지경에 이르고야 만다.
연구행정가는 그 가운데서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모든 관련자의 말을 경청하며, 중재 역할에 최선을 다한다. 프로젝트는 모름지기 순조롭게 진행되어야, 모두에게 이롭다. 사단이 생기면, 연구자는 연구에 투자해야 할 시간을 날리고, 연구행정가도 추가적인 행정업무 부담으로 인해 곤욕을 치른다. 인건비가 제대로 집행되었는지 증빙서류를 제출하라, 전산시스템 기록의 오류를 소명하라, 연구노트가 제대로 되어있는지 확인이 필요하다, 말로만 하지 말고 주장을 입증할 수 있는 공문이나 문서를 제시하라 등등 평상시라면 겪지 않아도 될 업무 부담으로 인해 연구행정가는 절로 한숨이 나온다. 그래도 폭풍이 지나가고 마무리가 되면 그나마 다행이다. 누군가는 가면을 벗지 못하고 끝내 오기를 부린다.
‘’페르소나‘와의 동일시가 심해지면 자아는 그의 내적인 정신세계와의 관계를 상실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을 돌보지 못하게 되고 그 존재조차도 잊어버린다.’2)
연구행정가 A가 소중히 여기는 페르소나는 팀장, 이라는 보직이다. 그의 소통 방향은 거의 위로만 향하고, 좀처럼 수평으로나, 아래로는 향하지 않는다. 담당자 시절부터 어떤 상관을 만나든 부하 노릇에 엄청난 공을 들인 덕에, 그는 동기들보다 일찍 승진하고 보직을 꿰찬다. 그는 이것에 대한 자부심이 남다른데, 이는 평소 그의 말과 행동에서도 드러난다. 다소 경직되고 부자연스러운 제스처, 팀원에게는 과도한 업무 지시, 동료에게는 불필요한 훈화 조의 말이 다반사다. 대화할 때 분위기 파악을 잘하지 못해 어색한 상황을 연출하기 일쑤다. 결국 수하 직원 한 명이 불만을 품고 퇴사한다. 손아래 젊은 연구자를 하대하다가 정식 항의를 받기에 이른다. 기관장은 주의를 주고 그를 타 부서로 전보시킨다. 하지만 제 버릇은 남 못 준다. 이번 사안을 어떻게 처리하는지를 보면, 팀장으로서 역량이 되는지, 그렇지 않은 줄을 알 수 있겠네요, 업무 떠넘기기 목적은 슬쩍 감추고, 자신이 선배 팀장이랍시고 연배가 높은 동료 신임 팀장에게 훈계를 늘어놓는다. 그는 가면을 자신의 진짜 얼굴이라 착각하는 듯하다.
’‘페르소나’는 가상이다. 그러나 그것은 없애야 할 것이라기보다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자아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라는 것에 대한 자각은, 페르소나를 사회생활에 필요한 수단이라고 보고 거기에 절대적인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3)
신임 기관장의 조직 내 리더십 강화 정책의 일환으로 보직자가 부서원을 평가하는 근무 성적 평가 외에 그간 폐지되었던 부서원이 보직자를 평가하는 다면평가제도가 부활한다. 후자는 전자와 달리 보수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으나, 그래도 그 결과에 무관심할 수는 없다. 시험 점수란 항상 민감한 법이다. 낙관하고 있던 나는, 다면평가 점수를 확인하고 충격을 받는다. 60점. 대상자의 평균 점수인 80점을 훨씬 밑도는 점수다. 평소 권위주의적인 성향의 보직자들을 흉보고, 나는 그들과 다르다, 며 열린 마음의 자세로 직원들을 대한다고 자부하던 나였기에, 낙담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제야 가끔 직원의 업무 수행 결과에 대해 부족한 점을 공개적으로 질책했던 일, 독촉하고 강압적인 말로 다그치듯 업무 지시를 했던 일, 선배나 보직자의 권위를 내세워, 즉 다시 말해, 그 페르소나를 이용해 직원을 대했던 일이 하나둘 떠오른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나, 나에게도 있는 모습이구나, 깨닫는다. 누구에게나 있는 모습이건만, 아니 오히려 때에 따라서는 자신의 페르소나 역할에 충실할 필요도 있건만, 나는 그런 것이 싫다고 애써 부정하고, 수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를 수용하지 못하면 남도 수용하기 어렵다. 가면을 쓴 내 모습을 떠올리며 일어나는 감정의 파도에, 잠시 머물러본다.
’자기실현을 하는 사람은 자신과 세상을 존재 그 자체로 이해하고 수용하며, 과거나 미래가 아닌 바로 지금 여기서 가장 통합된 상태로 존재한다.‘4)
어느 한쪽 역할만을 하겠다고, 한쪽은 맞고 한쪽은 틀린다고 고집하는 것은 불균형만을 초래할 뿐이다. 세계가 내게 요구하는 역할과, 내가 본질적 존재로서 추구하는 역할 사이에서 치열하게 고민하며 통합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대지는 세계를 떠나 대지로서 드러날 수 없고, 세계는 대지로부터 떠나 자신의 역사적 운명을 결단 속에서 펼쳐나갈 수 없다.‘5)
일찍이 이러한 고민을 했던 철학자가 이를 투쟁이라 표현하며, 그러는 가운데서 작품이 탄생하는 것이라고, 작품은 진리를 드러낸다고, 그 진리는 아름다움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름다움이란 존재의 빛이 작품 속에서 빛남이다..... 아름다움이야말로 진리가 일어나는 한 방식이다. 이렇게 아름다움과 진리는 일치하게 된다.‘6)
작품에는 예술 작품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연구자와 연구행정가도 진정한 자신과 맡은 바 페르소나 역할의 투쟁을 통해, 그리고 마침내는 그 통합으로 나아가는 길에서, 탁월한 연구 작품이나 멋진 행정 해법 작품을 탄생시킨다. 그때가 이들 간의 아름답고 참된 소통의 길이 열리는 때다.
※ 참고
1) (구글 AI 검색결과) ‘페르소나(Persona)’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말로, 원래는 그리스 연극에서 배우가 쓰던 가면을 의미하며, 심리학에서는 타인에게 보여지는 자신의 외적 모습, 즉 사회적 가면을 가리킵니다.
2) <분석심리학-C.G. 융의 인간심성론> 이부영 지음, 2011, 일조각
3) 같은 책
4) <존재의 심리학> 아브라함 매슬로 지음, 정태연 외 옮김, 2012, 문예출판사
5) <하이데거 극장2_존재의 비밀과 진리의 심연> 고명섭 지음, 2022, ㈜도서출판 한길사, p150
6) 같은 책, p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