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nsplash의 Allen Y 초중고 그리고 대학에 이르는 십여 년의 학창 시절, 해마다 새로운 친구를 누적해서 사귀고, 그들과 함께 상호작용을 하며 보낸 시간은, 지금의 나를 형성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도, 친구는 나와 동급 상대라고 생각해서인지, 나도 모르게 주고-받기의 비율을 철저히 동등하게 유지하며 관계를 맺는 것 같다.
‘동등한 사람들 사이의 건강한 관계에서, 각 개인이 주는 것과 받는 것은 시간에 걸쳐 어느 정도 비슷해야 한다.’ 1)
초등학생의 시간, 수평적으로는 친구와 수직적으로는 선생님과의 상호작용으로 채워진다. 친구와는 달리 웃어른이신 선생님과의 관계에서는, 선생님께서 주로 학생을 일방적으로 먹여(feed, 가르침을) 주시지만, 가끔 학생이 되돌려드릴(피드백, feedback) 때도 있다. 선생님 심부름하기. 권력자에 대한 본능적 아부 근성인지, 스승의 은혜를 갚는다, 는 생각이 조금은 있었는지 모르지만, 나와 친구들은 서로 심부름을 하고 싶어, 선생님 앞에서 눈치를 본다. 그러다가 내가 아닌 다른 친구가 심부름꾼의 영예를 차지할 때의 그 실망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수업 시간, 선생님은 내게 대표로 일어나서 책을 읽으라고 지시하신다. 아마도 선생님 나름의 기준에 의거, 학생 한 명씩 돌아가며 책 읽기를 하던 중, 내 순서가 왔을 뿐이었을 것이다. 원래 기회는 그렇게 무심코 찾아온다. 오십여 명의 학생이 앉아 있는 교실에서, 내가 홀로 선택받았다는 것에 의미를 부여한 나는, 눈앞에 펼쳐진 무대에서 주인공으로 서 있는 나를 상상한다. 무슨 근거 없는 자신감인지 모르겠으나, 순간 왠지 멋진 사람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책에 씌어있는 글씨 하나하나를 노려보며 힘주어 또박또박 읽어 내려간다. 선생님과 친구들의 반응이 어땠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선생님의 마음에 들었음은 분명하다.
나는 다음 수업 시간에, 그다음 수업 시간에도, 그간 지켜오던 순번의 원칙을 깨고, 선생님의 임의 지시로, 자주 호명돼 일어나 책을 읽게 된다. 나는 그때마다 더욱 신이 나서, 목소리를 가다듬고, 선생님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불태우며, 책을 열심히 읽었음은 물론이다. 지금은, 내가 평균적인 사람보다 목소리 볼륨이 크고, 굵은 톤을 가지고 있음을, 잘 인지하고 있다. 아마 어렸을 때도 비슷했을 것이고, 마이크 없이 교실 구석구석까지 들릴 정도로 책을 낭독하기에는 그러한 특징을 가진 사람이 적임자였으리라. 여하튼 지금의 내 무대 기질은, 그때 싹을 틔웠음이 분명하다. 선생님이 가라 하면 가고, 일어서라 하면 일어서고, 읽으라 하면 읽던 시절, 요청받고, 응답하는 재미를 들인다.
모처럼 일주일간 휴가를 다녀오니, 회사는 물론이고, 이메일함이 어수선하다. 연구소와 인접한 건물 신축 공사로 인해 갑자기 실내 공기 질이 나빠졌고, 연구자들은 불만을 표출하며, 시설 관련 부서에 신속히 조처해 달라고 요청한다. 일부 연구자는 간이 측정기를 구매해 직접 공기 질을 측정하고 정상범위를 훨씬 벗어난 수치를 제시하며, 사태의 심각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간이 검사 수치는 신뢰할 수 없다, 신뢰할 수 있는 검사를 시행해야 한다, 뭐든 조속히 조처해 달라, 등 숫자와 말만 오갈 뿐 해결은 요원한 상태다. 나는 요청을 받자마자 곧바로 현장에 가 본다. 멀리서는 잘 안 보여, 공사장 울타리 안으로까지 들어가 본다. 장비 하나에서 검은색 연기가 하늘로 치솟고 있다. 관계자와 대화를 나눈다. 저 연기가 문제군요. 아, 네, 땅을 파는 기계인데 노후가 돼서.... 자동차도 오래되면 매연이 심하듯 그와 유사한 현상입니다. 그렇다면 성능 양호한 장비로 신속히 교체해 주십시오. 옆 건물로 매연이 유입되어 피해가 심각합니다. 네, 그러잖아도 현재 교체를 검토 중이고, 최대한 신속히 조치할 예정입니다. 윗선 보고 후 압력이 더 들어가고 나서, 해결 완료. 응답의 목적을 가진 자, 현장에 답이 있다는 믿음뿐만 아니라, 용기가 필요하다.
‘그들이 노력을 위한 목적을 계속 가지고 있을 때, 그리고 이 목적을 달성하는 일이 그들 앞에 버티고 서 있는 장애물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할 때 그들은 계속해서 용기를 가질 수 있다.’ 2)
피드백은 일종의 반응이다. 반응의 생명은 속도다. 속도는 적시성을 추구한다. 때를 놓쳐서는 누구도 만족시키기 어렵다. 가능한 한 요청을 받는 순간에, 무리하게, 가 아니라, 적절하게 해결을 시도하는 것이 건강한 방식이다. 수많은 요청을 동시에 받는 경우, 우선 쉽고 빠르게 해결할 수 있는 일부터 하는 것이 좋다. 그래야 진도 나가는 느낌이 들어 가속도가 붙고, 자잘한 일들을 해치우면서 숨통이 트여, 묵직한 일들도 처리할 여유가 생긴다. 어느 날 연구자 A가 전화를 걸어, 문의할 것이 있다며 담당자를 찾는다. 담당자 부재로 인해 내가 대신 전화를 받는다. 그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요청 사항을 밝힌다. 내용을 들은 나는, 아, 네, 그건 별로 문제 될 것이 없겠네요. 제가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아 아, 아니요, 바로는 하지 마시고요, 상세한 내용이 알고 싶었을 뿐입니다. 제가 나중에 필요하면 다시 요청할게요. 그때 조치해 주시면 됩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나는 언제부턴가 ‘피드백이 빠르다.’, 는 평판을 얻는다.
피드백은 끝까지 하는 것도 중요하다. 연구자 B를 포함한 몇몇 연구자들의 공통 요청 사항인 안건 A는 미해결 난제다. 전임자가 내게 업무를 인수인계하며 남긴 말이다. 나름 노력했고, 그 내용은 그간의 문서를 보면 알 거란다. 나는 서류를 검토하다가 공백이 있는 부분을 발견한다. 연구자 B와 소통하면서, 한 번 더 시도해 볼만하다고 판단한다. 원래 정부 부처를 상대하는 일, 특히나 예산과 관련된 일, 정치적인 이해가 조금이라도 개입되는 일은, 어렵고 오래 걸린다. 필요한 문서 작업을 하면서, 공무원을 설득하는 데 최선을 다한다. 봄에 시작한 작업은 여름, 가을, 겨울까지 진행된다. 결과는 이듬해 봄 발표. 분기별로 진행 상황을 체크하고 수시로 관계자와 연락하며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최종 원하는 결과는 얻지 못한다. 거의 2년여에 걸친 노력이 열매를 맺지 못했음을 관련 연구자들에게 알린다. 그래도 그간 고생 많았고 애써주어 고맙다, 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그간의 노력이 그리 헛되지만은 않았다, 는 것을 직감한다.
'인생에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다…. 우리의 과제는 그런 순간들을 받아들이고, 심지어 포용하는 것이다. 고통스럽기 때문이 아니라 교훈을 얻고 우리를 단련할 기회이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삶 자체를 긍정하고 삶의 모든 가능성을 받아들일 수 있다.' 3)
다람쥐에게 먹이를 주는(feed) 사람이 바라는 피드백(feedback)은 무엇일까. 어서 속히 와서 먹어주기를, 귀여운 모습을 보여주기를, 끝까지 잘 먹어주기를 바랄 뿐 아닐까. 연구자와 연구행정가는 각자 충실한 직무 수행을 통해 서로에게 먹이(도움)를 준다. 그저 도움을 받아주는 것, 멋진 모습을 보여주는 것, 끝까지 잘 살아주는 것. 그것이 최고의 피드백이 아닐까.
※ 참고
1) <심리도식치료>, 제프리 영 외 2인 지음, 권석만 외 5인 옮김, 2005, 학지사, p316
2) <아들러심리학> 부제: 오늘을 살아갈 용기, 알프레드 아들러 지음, 유진상 옮김, 스마트북, 2015, p62
3) <인간 본성의 법칙> 로버트 그린 지음, 이지연 옮김, ㈜위즈덤하우스, 2019, p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