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nsplash의 Hanin Abouzeid 누가 만들어 준 걸까. 휴일 아침, 모처럼 만의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날씨이다. 기꺼이 집을 나서, 친한 친구 만나러 가듯 동네 뒷산에 오른다. 입구부터 팔 벌려 환영하듯 빽빽이 서 있는 나무들에 눈인사를 보내며, 부지런히 산의 중턱 부근에 이르니, 높다란 나무 위에서 까마귀 한 마리가 연신 울어댄다. 우는 소리에 제법 성깔이 묻어나는 것이, 마치 이곳은 자신이 관할하는 영역이니, 여길 빨리 떠나라고 나에게 성화하는 듯하다. 미안하지만 나도 여기까지 오느라 힘들고 지쳐서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다. 벤치에 앉아 숨을 고른 뒤, 나도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까마귀는 지지 않으려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옮겨 다니며 더욱 목청을 높인다. 인간과 새의 소리 배틀. 얼마나 지났을까. 까마귀가 질렸는지, 어느새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다. 푸른 숲 속 새와 사람이 어울리는 아름다운 모습을 연출하려 했는데, 본의 아니게, 폐를 끼쳤나 보다. 그래도 조잘조잘 지저귀는 다른 새들이 남아 있어 다행이다. 이들이 들려주는 경쾌한 노랫소리와 초록의 옷을 입은 나무와 풀들이 뿜어내는 향긋한 여름 내음은, 나를 늘 환대한다.
연구자*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특히, 인간의 고통과 질병 문제 극복 방법을 탐구함으로써, 결국 타인을 환대하는 길을 모색하는 연구자는, 자기 자신을 먼저 사랑하고 환대해야 한다. 지속 가능한 연구 활동의 가장 중요한 밑천은 바로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꾸준한 근력 운동과 등산은 내가 내 몸을 챙기는 방법이다. 수년 전 직장동료들과 함께 벼르고 별렀던 네팔 히말라야 등반을 성공적으로 다녀왔는데, 그때가 내가 육체적으로 가장 건강했을 때였을 것이다. 수십 년 연구 활동의 원동력은, 단연코 몸 건강이다. 운동으로 건강한 몸을 만드는 것은, 감정과 마음의 영역에까지 좋은 영향을 미친다. 물론 독서까지 곁들인다면 금상첨화다. 건강한 이가 약한 사람을 돌본다, 는 것은, 평범하면서도 근사한 일이다. 환대란 바로 그런 일이다.
‘근사한 것을 근사하게 만드는 것은 그것의 평범함이며, 평범한 것을 평범하게 만드는 것이 그것의 근사함이다.’**
연구자는 한 가지 일만 하고 싶은 사람이다. 조직에 들어오면 다양한 업무와 크고 작은 권한을 지닌 보직의 유혹을 받기 때문에, 웬만하면 연구자도 연구 이외 일을 하나쯤 맡아,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연구 활동 시간을 어느 정도 희생하고, 연구와 행정을 병행하게 된다. 연구 외에도 두루 재능을 갖춘 전천후 연구자는 이를 통해 의미 있는 성과를 냄으로써 뭇사람의 부러움을 사기도 한다. 나의 경우는, 그간 조직 생활 중에 딱 한 번 보직을 맡은 적이 있는데, 삼 개월도 채 되지 않아,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을 후회하며, 사양하고, 다시 연구자의 자리로 돌아온다. 나는 연구 이외 일에는 좀처럼 관심이 가지 않고, 연구자 이외 어떤 정체성도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한 분야로는 아무리 깊이 들어가도 질리지 않는데, 옆 분야로는 조금만 넘어가도 어색하고 생각이 겉돈다. 하나만 파고들어 제일 잘 하는 연구자가 되고 싶다, 는 욕심이 있어서, 혹 이 분야에서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국내외를 마다하지 않고 찾아가 기꺼이 그와 교류한다. 환대로 주변을 다져나가는 것, 한 가지 일을 파고들기 위함이다.
연구자는 관찰하는 사람이다. 원활한 조직 생활을 위해, 연구자는 수시로 연구행정가와 접촉한다. 정해진 양식에 맞게 연구계획서 작성하기, 평가 일정에 따라 발표하기, 전산시스템을 통해 연구비 배정받기, 연구비 집행 협의하기, 학회나 휴가 신청하기 등 연구행정가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많다. 나와 관련된 연구행정은 크게 보면 연구비, 연구원 및 연구사업 관리, 세 가지다. 업무별 연구행정가의 특징이 있다. 이러저러한 용도의 연구비 집행 가능 여부, 연구비 관련 세금 문제 등은 연구행정가 A를 통해야 한다. 아무래도 돈 관련 문제다 보니, 그는 다소 경직되어 있고, 응대하는 말 또한 딱딱하다. “울며 겨자 먹기”로 그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복무와 인사를 담당하는 연구행정가 B는 사람을 상대하는 업무에 있어 베테랑이다. 얼굴은 기본적으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상대가 격하게 나오더라도 쉽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며, 유연하게 대처한다. 환대도 아니고 적대도 아닌 노련한 중립 전략이라고나 할까. 그러면서 적절한 타이밍을 노려 공략함으로써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룬다. 연구사업을 관리하는 연구행정가 Z는 경험 많은 베테랑 직원이자 만능 키맨이다. 업무 종류에 상관없이 골치 아픈 문제가 생기면, 나는 일단 그에게 연락한다. 그를 통하면 어느 정도 교통정리가 되고 유용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그는 기본적으로 환대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다. 얼마 전 연구사업에 대한 적대적인 뉘앙스의 외부 감사가 시작되었는데, 그의 노련한 대처는 이마저도 누그러뜨리고 순하게 지나가게 하리라 기대한다. 세월에 장사 없다더니, 그도 좋던 풍채 다 어디 가고, 머리는 희끗, 얼굴에는 주름이 제법 파였다. 그런 그가 왠지 측은하다. 내가 한동안 떠올릴 모습 같다.
연구자는 환대받거나 환대하는 사람이다. 그 정도에 따라 연구자의 연구 성과까지 달라질 수 있다고 하면 너무 지나친 비약일까. 나는 운이 좋아, 한 직장에서 오랫동안 한 분야만을 연구하는 연구자로서 행복하게 지낼 수 있었는데, 많은 동료로부터 환대받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마치 자기 일처럼 진정성을 가지고 협력해 주었던 그들이 없었다면, 지금껏 내가 이룬 성취도 없었을 것이다. 나도 최선을 다해 그들을 환대하려 했지만 많이 부족했음을 인정한다. 이제라도 부지런히 만회하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시간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인생의 말년에 이르러 나는 나를 적대하는 것을 만난다. 아니, 나는 나를 적대하는 것을 만나 인생의 말년에 이른다. 얼마 전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말기 암이다. 내가 연구자로서 평생을 탐구해 온 녀석인데, 어이없게도 그놈에게 내가 당한다. 바람과 현실의 괴리가 커서 그런지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놀라거나 화나거나 우울한 생각은 다 지나갔다. 연구자로서 아쉬움은 없다. 나는 투병 직전까지 연구 활동을 원 없이 했고, 내가 속한 분야에서 남부럽지 않은 업적도 이루었다. 정리해야 할 때가 자연스럽게 이른 것이다. 수술은 어렵지만 항암치료를 열심히 받고 있다. 할 수 있는 데까지 한다. 언제나 변함없이 곁에서 나를 진심으로 환대해 주는, 사랑하는 아내가 있기 때문이다. 아내는 벚꽃을 닮았다. 사람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하얀 미소는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다. 나도 벚꽃을 닮고 싶다. 아내 앞에 꽃비 되어 내려, 꽃길이 되어주고 싶다. 언젠가 함께 거닐었던 여의도 벚꽃처럼.
벚꽃 나무 아래서
–작자 미상-
너를 만나러 가는 길에
내 마음은 벌써
꽃잎이 되어 날리고 있었지
저 멀리 환하게 웃는
너의 그 눈부신 웃음 속에
내 지난날의 아픈 시간들은
다 녹아내리고
우리들의 아름다운 이 봄날은
눈부시게 하얀 벚꽃으로
영원히 피어나리라
※ 참고
* 동료 연구자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각색함
** <검은 책> 2권,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민음사, 2007년, p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