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 논문을 수정했다고 올린 포스팅이 벌써 한 달도 더 전이라니. 그 사이에 정말 큰 일을 하나 해치우고 돌아왔다.
벨기에는 다른 나라에 비해 박사 과정이 많이 다르다. 아예 수업이 없고, 소위 큐이(qualification exam)라는 개념도 없다. 그뿐 아니라 첫 2년 동안 학내 세미나나 학회를 합쳐 60시간만 참석하면 졸업 요건이 모두 채워진다는 게 아주 웃긴 포인트. 게다가 박사 과정에서 해야 할 일만 다른 게 아니라, 졸업 과정 자체도 다른 국가들에 비해 꽤 유별나다는 것을 직접 겪고 나서야 확실히 알게 됐다.
일단 벨기에는 졸업 심사를 두 번 치른다는 게 타 국가의 박사과정과 가장 큰 차이점이 아닐까 싶다. 프랑스어로 soutenance privée라 불리는 1차 심사와 soutenance publique이라 불리는 2차 심사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이 두 번의 심사를 모두 통과해야만 박사를 받는다는 것과 이 두 번의 심사가 아예 요구하는 것이 다르다는 게 특징이다. 1차 심사는 내부 심사라고도 하는데, 나와 심사위원만 참석할 수 있다. 일단 심사를 시작하면 졸업 청구 대상자가 20분간 학술 발표를 하고, 그 뒤에 심사위원들은 시간제한 없이 질의응답을 진행한다. 이 1차 심사에서 통과를 받으면 2차 심사 날짜를 받게 되지만, 그게 아니라면 페널티가 주어진다. 만약 1차 심사에서 탈락을 받게 되면 6개월 간의 페널티를 받게 되는데, 그 기간 동안 졸업 논문을 다시 준비해서 졸업 청구 신청부터 다시 해야 한다고. 그러나 이 1차 심사를 통과하면, 아예 다른 심사가 기다리고 있다. 2차 심사는 45분 동안 과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도 이해할 수 있도록 내 연구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실제로 내가 초청한 친구들이나 가족을 포함한 청중들에게서도 질문을 받는 형태라고.
그리고 하나 다른 점이라면 심사위원의 구성에 있다. 우리 학교의 경우 지도교수를 포함해 심사 위원이 총 7명인데, 공정성을 위한 장치가 여러 개가 있다. 일단 최근 5년 간 같이 논문을 출판했거나, 졸업 청구를 신청한 시점에 공저자로서 리비전을 하고 있으면 심사 위원에 위촉될 수 없다고. 그뿐 아니라 같은 연구실에서 몇 년 이상 근무한 경우에도 심사위원으로 지정할 수 없다고 학내 규정에 나와 있었다. 또한 7명의 심사위원 중 두 명은 반드시 본교 소속이 아닌 두 사람이어야 하는데, 지도교수와 청구 대상자가 상의하여 두 명을 초청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 외에 나머지 심사 위원은 단과대학 행정실에서 졸업 논문을 바탕으로 지정을 해 주는데, 이 경우에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지도교수가 청구 대상자가 관여를 할 수 없다. 그리고 학생의 지도교수는 졸업 심사위원단에서 비서 역할을 맡게 되는데, 심사 일정을 조율하고 장소를 섭외하는 것 외에는 심사에 일절 관여할 수 없다는 게 꽤 웃긴 포인트이다.
나의 경우에는 심사위원단은 2월 초에 꾸려졌으나, 심사위원 간에 일정이 도저히 맞지가 않아 1차 심사가 3월 넷째 주까지 밀렸다. 어떻게 보면 준비 기간이 길어서 좋은 건가 했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이런 일은 빨리 해치우는 게 낫다는 생각. 준비할 시간이 많네 하면서 3월 첫 주까지 별생각 없이 다른 급한 일을 쳐내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같은 오피스를 쓰는 D군이 ‘야 너 2주도 안 남았는데 뭔 배짱이냐’라고 묻는 거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심사는 약 2주 앞. 그래서 부랴부랴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해 놓고, 셋째 주부터는 연구실 사람들을 포함해 학계에서 가깝게 알고 지내던 사람들까지 붙잡고 발표 연습과 발표 자료에 대한 피드백을 받았었다. 정말 셋째 주는 일주일 내내 열 번 정도 발표 연습을 하고 프레젠테이션 파일을 고쳤던 것 같은데, 몇 페이지에 무슨 그림이 있었고 무슨 내용이 있는지 줄줄 나올 정도가 되어서야 최종 발표 자료를 마무리 지었다. 1차를 통과한 입장에서 생각을 해 보니, 사실상 고등학교 입시나 재수를 했던 때 보다도 공부를 더 열심히 하지 않았나 싶다.
심사 이틀 전부터는 두 가지 생각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기 시작했다. 한쪽에선 ‘내가 여기서 더 한다고 뭐 나아지는 게 있긴 할까’였고, 다른 한 쪽은 ‘내가 이만큼 했는데 도대체 뭘 더 해야 하는 거냐’라는. 다른 것 보다 외부에서 오시는 심사위원은 고사하고 내부 위원들도 잘 모르는 판국이었던 터라, 질의응답에서 뭐가 나올지 모르는 상황이라는 게 체감이 정말 잘 됐다. 심사가 끝나고 나서, 동료들은 ‘얘가 왜 긴장을 안 하지’라고 생각을 했다며 나름대로 감상평을 내놓았는데, 나는 그냥 체념을 한 것이었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했다.
심사 당일. 별 생각이 없었다. 그냥 평소대로 하던 대로만 하자는 생각으로 들어가서 20분 간의 발표를 마쳤고, 질의응답은 한두 시간 반 정도 이어졌다. 다행이라면 매번 발표 연습 할 때 꼭 말을 저는 부분이 있었는데, 그 부분을 잘 넘어갔다는 것. 그리고 외부에서 오신 심사위원 두 분께서 정말 논문을 쓰면서 생각도 못 해본 질문들을 많이 해 주셨다는 것에 좀 감사한 부분이 있었다. 이 부분까지 생각해서 데이터 분석을 하고 해석을 해 보려고 했더라면 논문이 좀 더 좋은 데 가지 않았을까 싶은 그런 기분이 들 정도로 좋은 질문이 많았었다. 물론 외부 연자 분 중 한 분은 내가 분석에 사용한 툴을 만든 연구실을 지도하는 교수님이셨고, 질문 중 하나가 ‘사용자로서 우리 연구실에서 나온 툴의 가장 큰 문제가 뭐라고 생각하냐’였는데 역으로 생각해 보면 내가 해당 분석 패키지를 제대로 이해하고 사용하고 있는 지를 묻는 게 아니었을까 싶었다.
뭐 여기까지 했으면 훈훈하게 끝났을 수도 있는데, 내부 심사위원들이 정말 숨겨진 폭탄들이었다. 내부 심사위원들과 질의응답을 하면서 든 생각은 ‘이 사람들 심사비 받고 이렇게 하는 거면 나는 준비를 왜 공들여서 이렇게 했지’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였다. 나 자신이 외부 심사위원 분들께 미안해질 수준으로 내부 심사위원들은 정말 처참하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비뇨기과 의사인 교수님은 심사장에 아예 안 오셨는데, 좌장을 통해 남긴 피드백이 ‘이 논문 어렵네. 박사과정생이 했다기엔 정말 어렵네. 질문 없어’라는데, 나중에 지도교수님을 통해 들어보니 의사인 교수님들이 심사 대상자의 졸업 논문을 이해하지 못했을 때 통상적으로 하는 말이라고 했다.
다른 사람은 소장에서 줄기 세포를 연구하는 사람이었고, 나는 실험을 하지 않는다는 걸 아는 교수였다. 그런데 웬걸. 질문들이 죄다 정말 실험 프로토콜을 정말 자세하게 뜯어봐야 아는 질문들을 하기 시작한 것. 예를 들어 쥐의 유선을 이용해서 오가노이드를 만들 때 어느 유선을 사용해야 샘플 간 편차가 제일 적냐느니, 왜 굳이 이 쥐 모델에서 이 방식을 사용했냐느니 등등의 질문이 나왔다. 사실 질문을 두어 개 정도 한 뒤, 좌장이 학생의 연구 주제와 졸업 논문과 관련되지 않은 질문을 하지 말아 달라고 경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왜 굳이 특정 마커를 사용해서 유세포 분석기를 돌렸냐 등의 질문을 하던 이 심사위원. 결국 좌장이 그런 질문만 준비를 해 왔다면 질의응답 순서를 다른 교수에게 넘기겠다고 하니 질문이 없다고 하더니 다급하게 본인의 차례를 정리했다.
질의응답이 다 끝나면 졸업 청구 대상자는 나가 있으라고 한다. 뭐 통상 교수들끼리 이야기를 하고 피드백을 나누는 시간인데, 약 10분 정도 걸렸다. 나는 이 날 심사장이 내 오피스와 같은 복도에 있어서, 오피스에 돌아와서 에너지바를 하나 씹어 먹으며 무슨 질문이 나왔는지에 대해 복기를 해 주었다. 동료들은, 특히나 곧 졸업 논문을 시작할 친구들이 ‘그런 질문을 할 거면 준비를 왜 하냐’는 소리를 하는데, 거기서 차마 나도 마찬가지였다는 소리를 하지 못했다. 입에는 한가득 먹을 게 들어있고, 한 손에는 반쯤 먹은 에너지바를 들고 있는데 교수님께서 심사가 끝났으니 돌아오라는 메시지를 보내셨다. 그래서 이걸 뱉어야 하나 하면서 가는데, 좌장 분께서 그냥 먹으면서 결과를 들으라고 하셨다.
사실상 두 명의 외부 연자와 나의 지도교수를 제외하고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던 심사위원의 억지 싸움을 잘 이겨내고 1차 심사는 통과를 받았다. 그리고 교수님을 통해 피드백을 들었는데, 외부 심사위원 분들께서는 정말 좋은 피드백을 남겨 주셨다. 2차 심사를 할 때는 이런 부분을 고려해서 좀 더 쉽게 설명을 해 보라거나, 본인의 연구팀이 개발한 툴을 제대로 이해하고 실제로 연구에 적용해서 유의미한 결과를 내주어서 고맙다 등의 감사한 메시지들이 정말 많았다. 하지만 질의응답을 거치면서 예상은 했지만, 정말 웃음도 안 나오는 억지 논리들이 가득한 피드백은 참 어쩔 수가 없구나 싶었다. 정말 도움이 안 되려면 안 되겠구나 싶은 느낌이 들 정도였는데, 저 프로토콜만 물고 늘어지던 교수님은 하다 하다 피드백이랍시고 남긴 건 ‘데이터 분석을 한다는 핑계로 실험에는 관심이 없어 보이니 가능하면 참여를 좀 하거나 동료들의 고생을 이해하도록 노력해라’라는 것. 이 피드백들도 1차를 통과한 기념으로 맥주 한 잔 하며 동료들과 이야기를 했는데, 다들 하는 말이 ‘다들 졸업 논문 이해 못 해서 이상한 소리 한 것 아니냐’와 ‘그 사람들은 내 심사에 안 들어왔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박사 과정 중에 제일 큰 산을 잘 넘겼다. 2차를 코앞에 두고 있다는 게 정말 실감은 안 나는데, 이번에는 미리미리 발표 자료도 준비를 하고 연습도 더 많이 해보려고 한다. 어쨌든 3년 간의 가짜 포닥 신세를 청산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도, 곧 진짜 박사가 된다는 것도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