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정신이 없는 하반기를 보내고 있다. 정말 정신을 차려보면 한 달이 쓱 그냥 가버렸을 정도로 바빴다. 2025년은 정말 일복이 넘치는 해인가 싶을 정도로 일이 많은데, 상반기에는 논문 때문에 일이 많았다면 하반기에는 논문 덕분에 여기저기 불려 다니는 데서 정신이 없다는 거다. 그래서 덕분에 초반에만 해도 ‘한 달에 하나는 꼭 쓰자’ 던 연재도, 이렇게 의도하지 않게 자꾸 늘어지게 된다.
다른 도시로 출근을 하는 날이 이전에 비해 매우 많이 늘었는데, 의도하지 않게 기차에서 보내는 시간이 꽤 늘었다. 뭐 연구실을 비우는 날이 많으면 교수님 입장에서 좋지 않을 수도 있지 않냐고 묻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우리 교수님의 모토는 ‘우리 연구실 사람을 좋은 의미로 가져다 쓰겠다면 매우 환영’이라는 거다. 연구실 사람들의 능력을 알아보고 전문가로 불러준다면, 그깟 며칠 연구실을 비우는 게 대수냐는 그런 입장이시다. 단순히 연구실의 성과를 이야기할 수도 있는 자리가 있을 수도 있으니 가라고 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교수님께서는 그런 자리에서 하는 네트워킹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 분이셔서 더 그렇게 활발하게 여기저기 다니라고 하는 것도 있지 않을까 싶다.
어쩌다 보니 9월 말에는 벨기에에서 열린 Interuniversity Biohackathon Belgium 2025라는 행사에 다녀오게 됐다. 함정이라면 참가자 신분이 아니라 심사위원 자격으로. 어쩌다가 심사위원이 된 연유는 생각보다 단순했다. 나의 공동지도교수가 지도하는 박사생 두 명이 올해 이 바이오해커톤 행사의 운영위원장과 운영위원을 맡게 되었단다. 메일로 연락이 와서 읽어 보니, 행사 기획을 하면서 피치를 듣고 심사를 해 줄 사람을 찾고 있다고 했다. 행사 한 달 전까지도 데이터를 분석해서 생물학적으로 유의미한 결과를 찾아내는 트랙의 심사위원을 구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고 했다. 이유라면 행사가 열리는 기간이 막 개강을 했을 때고, 학회들이 여름휴가 기간을 마치고 다시 활발하게 열리는 시점이었기 때문이라고. 한참 고전을 하던 와중에 공동 지도교수가 내 이야기를 했는데, 이 트랙에서 쓰여야 하는 데이터 처리와 분석 과정 모두를 내가 잘 알고 있다며 추천을 했단다.
그래서 나는 답장으로 ‘행사 기간 모두 가능하고, 불러줘서 고맙다.’고 답장을 했다. 다만 우리 연구실에서는 출장 처리를 위해서는 교수님과 일정이 사전에 협의가 되어야 하니, 교수님과 나에게 official invitation 메일을 한 통 써 줄 수 있냐고 물었다. 만약 교수님과 이야기가 되지 않으면 나는 내가 심사위원을 하겠다고 이틀 내내 연차를 쓰고 기차와 버스로 왕복 4시간을 해야 하는, 소위 뻘짓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차피 참가자들이 저기서 해커톤 과제를 해결하는 동안, 나는 일을 해야 할 게 안 봐도 뻔히 보이는 결말이었기 때문이다. 교수님은 운영위원장의 메일을 받고, ‘오브가 코스지 말해서 뭐 하냐’는 답장을 보냈고, 나는 이틀 짜리 출장을 얻어내게 됐다.
해커톤의 심사위원 자리를 맡겠다고 한 뒤, 내가 심사를 하게 될 트랙의 과제에 대한 안내문을 받을 수 있었다. 왜 그런 과제를 디자인했는지, 어느 데이터를 사용하게 되는지는 물론, 어떤 분석법을 이용하여 어떤 결과를 도출해야 한다는 것까지 모두 나와있었다. 사실 이 안내문을 읽으며 살짝 고민을 한 게, 생각보다 요구하는 수준이 높았기 때문이다. 이 수준을 커버할 수 있는 참가자들을 과연 내가 제대로 평가를 할 수 있을까에 대한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는데, 어쩌겠는가. 이미 등록 마감은 됐고, 행사 심사에 대한 안내도 다 나갔으니 더 이상 물러 설 곳은 없었다. 그리고 제목대로 ‘우리 연구실 사람을 갖다 쓰겠다면 대환영’ 모드인 우리 교수님, 그리고 나를 너무 당연하게 추천한 공동 지도교수님의 얼굴에 먹칠을 할 수는 없으니 열심히 리뷰를 하는 것 말고는 답이 없었다.
해커톤 첫날. 등록을 오후 세 시에 오픈한다고 해서, 나는 사전에 공동 지도교수에게 양해를 구해 행사 전까지는 오피스 한 구석에서 일을 하기로 했다. 말이 좋아 일이지, 심사위원 자리에서 제대로 해야 한다는 생각에 계속 데이터와 관련된 논문을 읽고 또 읽었다. 애초부터 분석법을 제대로 적용하려면 데이터를 제대로 이해해야 할 것 같아서다. 분석법이야 어느 패키지와 어느 알고리즘을 적용하느냐의 문제였던 터라, 각 분석 파이프라인 간 차이와 장단점 정도를 파악하는 것으로 업무를 마무리하기로 했다. 하지만 등록 데스크에 가서 보니 다시 긴장을 하게 됐는데, 이유라면 참가자가 정말 많았다는 것. 그리고 학생이 많을 줄 알았으나 생각보다 박사과정이나 박사 후 과정이 많았기 때문이다. 벨기에에서 학회나 행사를 다녀보면 나보다 아는 것이 많은 연구원들을 꽤 많이 만나게 되다 보니, 안 쫄았다고 하면 거짓말은 아니다. 그렇게 반쯤 혼이 나가 행사 오프닝과 리셉션에 참여했는데, 사실 이 날 저녁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행사 이틀 차이자 마지막 날. 행사장은 오전 8시부터 열려 있었고, 나는 오전 9시 반 즈음 해서 도착을 했다. 운영위원회 사람들과 인사를 하니, 일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따로 준비를 했단다. 그럴 만한 게, 이 날 오후 4시 45분까지 결과물을 제출해야 하고, 프레젠테이션도 해야 하기 때문에 심사위원이 참가자들과 같은 공간에 있는 것 자체가 공정성에서 말이 나올 것 같아서란다. 생각해 보니 그러네 싶어서, 행사 측에서 준비한 오피스에서 일을 하기로 했다. 중간에 지도교수님과 잠시 연락을 해야 할 일이 있었는데, 이래저래 미팅을 하고 나니 교수님께서 상황을 물어보시는 거였다. 그래서 ‘너무 긴장된다’라고 대답을 하니, 그냥 평소 하는 것처럼 하라고 하시더니 믿는다는 말을 남기고 콜을 종료하셨다.
그렇게 얼레벌레 일과를 마치고, 피치를 들을 시간이 됐다. 심사장에서 나와 같이 심사를 할 두 분의 심사위원 분들을 만나 인사를 했는데, 한 분은 이미 타 대학에서 학과장을 했던 교수님이고 다른 한 분은 다른 국가에서 이미 자기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분이었던 거다. 그렇게 다시 한번 ‘이 자리에?’라는 생각이 든 순간, 회사를 운영하는 분이 ‘너네 교수님한테 이야기 들었다. 안 그래도 교수님이 이렇게 본인 연구실 사람들이 행사에 참여하고 사람들 알아가는 거 좋아하시는 거 같더라’고 하시는 것. 그래서 일단은 웃으면서 그렇다 했지만, 이미 소문이 다 났구나 싶었다.
한 시간 반 동안 다양한 참가자들의 피치를 들었다. 10분이라는 짧은 시간에 본인들이 한 분석과 결과 해석을 이야기해야 했는데, 그게 당연히 쉬울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열과 성의를 다했구나라는 느낌이 드는 참가자들이 정말 많아서, 심사를 하면서도 노트를 정말 많이 적어내려 갔다. 피치를 다 듣고, 다른 심사위원 분들과 우승자를 결정하기 위해 한 30분을 토론을 했는데 두 팀이 정말 박빙이었기 때문이다. 본인들의 분석이 어느 관점에서 필요한지를 매우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은 물론, 사용한 알고리즘이나 나온 결과의 해석 등이 하루 반 만에 나왔다고 믿기 어려웠을 정도로 높은 퀄리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동 우승을 줄 수 없다는 올해 해커톤 규정 상, 두 팀 중 어느 팀을 우승 팀으로 정해야 하는가는 심사위원 입장에서 정말 어려운 문제였다.
항상 하는 생각이지만, 남을 평가하는 위치가 정말 힘들다는 건 변하지 않는 것 같다. 특히나 이번 해커톤 심사에서 그 생각을 많이 했는데, 만약 아무것도 검토해 보지 않고 들어갔으면 아찔할 뻔했다는 생각을 했다. 단순히 데이터에 대해 파악이 안 되었고의 문제가 아니라, 나를 추천해 준 공동지도교수와 기꺼이 이 일정을 허락해 준 지도교수님께 속된 말로 빅엿을 드리는 그림이 나올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이 두 시간의 평가를 위해 논문을 읽어보고, 데이터도 다운로드해서 좀 이것저것 해 본 게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누군가를 심사하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노력과 품을 들여야 한다는 것도 다시 한번 느꼈다.
하여간 연구실 밖을 벗어나 좋은 경험을 한다. 이전에는 그냥 ‘와 내가 능력이 있나 봐’라고 생각했다면, 지금은 ‘나를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계시니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특히 이번 해커톤에서는 참가자로 행사에 오는 게 나에게 더 좋았으려나 싶다가도, 이렇게 심사를 준비하고 행사에 참여하는 것 덕에 크게 배운 게 있다고 생각하니 또 나쁘지는 않다고 본다. 내년에도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한번 행사에 참여해 보고 싶다 했는데, 공동 지도교수와 내 지도교수가 이 이야기를 듣고는 또 추천해 주어야 하냐는 걸 보고 정말 열심히 공부하고 도를 닦아야겠다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