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박통합을 시작한 지 3년 차. 첫 논문을 내고 나면 나의 남은 박사과정은 순조롭게, 물 흐르듯 흘러갈 줄만 알았다. 물론 신입 박사과정생 때의 나에 비해서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 이제 지도 교수님께서는 나를 믿고 프로젝트를 맡겨 주셨고, 선배분들의 도움을 받아해오던 실험과 연구들을 이제는 내가 주도해서 계획하고 수행할 할 수 있을 만큼의 내공도 쌓였다. 예전보다 많은 것을 배웠다는 느낌은 이제는 스스로 더 많은 것들을 이룰 수 있다는 기대와, 무엇이든 척척 해낼 수 있는 척척박사가 되어간다는 착각을 하게 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살면서 했던 가장 큰 오해들 중에 하나였다. 성취감이라는 매력적인 감정은 나에게 불꽃놀이처럼 아주 잠시 동안 세상을 아름다워 보이도록 만들어 주고는 사라졌다.

돌이켜보니 대학교를 졸업한 뒤 이렇다 할 성취감을 느껴본 기억이 없었다. 취업 대신 대학원을 택한 나에게 당시 졸업은 마침표가 아닌 쉼표였기 때문에, 학부 졸업식에서 느꼈던 성취감은 그리 길게 지속되지 못했다. 졸업 이후 논문을 내고 오랜만에 느껴본 성취감이 지나간 자리에는 이상하게도 공허함이 찾아왔다. 성취감의 끝이 공허함이라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고, 한동안 방황하는 사춘기처럼 하루하루를 보냈다. 꾸역꾸역 하루 일과를 보내고 퇴근시간과 주말을 기다렸다. 이런 밀도 낮은 시간이 쌓일수록 길을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과 공허함에 더불어 불안감까지 쌓였다. 이제 겨우 논문 한 편을 만들었을 뿐이고, 졸업을 생각한다면 앞으로 해내야 할 일들이 더 많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번아웃과 슬럼프가 찾아온 것이다. 지금에서야 덤덤히 회상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안개가 자욱한 터널 안을 걷는 기분이었다. 연구생활을 시작하던 당시에는 희망과 밝음으로 가득 차 있던 얼굴에 그림자가 지는 날이 늘어갔다. 장기간 학위과정을 밟고 있는 동기나 선후배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이러한 어두운 시기를 겪지 않은 경우를 보기 어려웠다. 이렇게 흔한 어려움이라면 미리 예방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방법은 아직 찾지 못했다. 하지만 예방할 새 없이 닥친 어두운 시기를 힘겹게 겪어내고 있다고 하더라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있을 것이다. 개인마다 처한 상황이나 배경이 다르기 때문에 벗어날 수 있는 방법도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나에게는 어두운 시기를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준 두 가지가 있었다. 종이, 그리고 운동화가 바로 그것이다.
슬럼프와 번아웃이 왔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나서, 극복하고 싶었던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종이를 가지고 책상에 앉는 일이었다. 조용한 시간에 차분한 마음으로 내 앞에 놓인 종이에 세 가지 질문에 대한 생각들을 써 내려갔다.
첫째, 지금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일/생각/감정 등)은 무엇인가.
둘째, 나를 힘들게 하는 일들로부터 멀어지기 위해서 해볼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셋째, 내가 학위과정을 시작한 이유는 무엇인가.
첫 번째 질문과 두 번째 질문에 답을 하면서 나는 운동화를 꺼내어 신었다.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정체되어 있다는 느낌이었고, 이러한 감정에서 멀어지기 위해서는 비교적 쉽게 얻을 수 있는 성취감을 채우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출근 전에 러닝을 하기 시작했다. 러닝을 하며 하루 일과를 그려보기도 하고, 연구에서 풀리지 않는 부분들에 대해서 오롯이 집중해서 고민해 보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해답을 찾기도 하고 고민이나 걱정들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하루를 목표 달성의 성취감으로 시작할 수 있게 되며 일상과 연구에도 활력이 생겼다. 무엇보다도 특히 도움이 되었던 질문은 세 번째 질문이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일만 처리해 나가기에 급급해 잊고 있었던, 학위를 시작한 이유와 목표를 되새겨보았다. 초심으로 돌아가서 내가 학위를 시작한 이유와 목표를 향해 다시 방향키를 맞추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길에서 중요한 것들에 집중하며 불필요한 고민들을 덜어낼 수 있었다.
이렇게 세 가지에 질문에 대해 스스로 질문하는 과정에서 근시안적으로 지금 처한 나의 상황에 매몰되어 있던 나는 고개를 들고 시선을 조금 더 멀리 두게 되었다. 이렇게 나는 종이와 운동화로 일상에 다시 추진력을 얻었고, 슬럼프와 번아웃으로부터 벗어나 일상의 궤도로 돌아왔다. 당시에는 너무도 힘든 시기로 느껴졌지만 지금 생각하면 학위과정에서 이러한 시기를 겪고 극복해 낸 것이 정말 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 만약 졸업을 한 이후에 슬럼프와 번아웃을 처음 마주했다면 나는 더욱 크게 다치고 넘어졌을 것이다. 혹시 지금 힘든 시기를 겪어내고 있는 독자분들이 계신다면 잠시 시간을 내어 종이를 꺼내 펜을 들고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보자. 많은 경우에 슬럼프와 번아웃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우리 스스로가 답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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