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틀.신.반: 영화라는 틀과 신경과학이라는 반죽
연재
[영틀신반] Episode #65 - ANON...완벽한 기억의 시대
Episode #65
“Anon” - 완벽한 기억의 시대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다면, 우리는 더 나은 인간이 될까?”
출처:https://www.imdb.com/title/tt5397194/
― 〈Anon〉으로 탐험하는 기억 기록 사회와 망각의 신경과학
사람들은 종종 ‘기억력이 더 좋았으면’ 하고 바란다. 시험공부를 할 때나, 중요한 약속을 깜빡했을 때, 나이가 들면서 예전 같지 않은 기억력을 느낄 때도 이런 생각들이 불쑥 떠오른다. ‘모든 걸 다 기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넷플릭스 영화 Anon은 이 바람을 극단까지 밀어붙인다.
영화 속 미래 사회에서는 사람이 보고 듣고 경험한 모든 순간이 자동으로 기록된다. 눈앞의 현실뿐 아니라 과거에 직접 겪었던 장면도 언제든 다시 꺼내 볼 수 있다. 경찰은 더 이상 목격자의 진술에 의존하지 않는다. 범죄 현장을 직접 보지 않았어도, 용의자나 피해자의 눈에 비친 실제 시각 정보를 바로 확인할 수 있다.
이제 거짓말도 사라지고, 기억의 왜곡도 없다. 적어도, 시스템은 그렇게 약속한다. 하지만 영화는 곧, 이 믿음이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주인공 형사 살 프릴랜드는 어느 날 기이한 사건을 맡는다. 모든 기억이 기록되는 이 사회에서, 누군가 자신의 흔적을 완벽하게 지워버린 것이다. 감시 시스템 어디에도 흔적이 남지 않은 한 여성, ‘아논’을 쫓으며 그는 점점 더 근본적인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만약 기억이 완벽하게 기록된다면, 진실도 역시 완벽하게 보존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단순히 공상과학의 상상에 머무르지 않는다. 최근 인공지능과 신경과학의 발달로 인간의 뇌 활동을 토대로 이지미나 언어 정보를 어느 정도 복원하는 일까지 진전되고 있다 (출처 1-3). 아직 영화 같은 수준엔 이르지 못했지만, ‘기억을 읽고 기록한다’는 발상 자체는 더는 허무맹랑하지 않다 (그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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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The overall reconstruction framework, which consists of three distinct stages (출처 1).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실제 우리의 뇌가 영화 속 시스템과는 전혀 다른 게 움직인다는 사실이다. 우리 뇌는 모든 것을 저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대부분의 정보를 일부러 지워버린다. 바로 그 능력 덕분에 우리는 정상적으로 사고하고, 배우고, 살아갈 수 있다. Anon이 던지는 가장 흥미로운 질문은 오히려 ‘기억’이 아니라 ‘망각’에 있다 (출처 4, 5).
― 인간 기억은 CCTV가 아니다.
Anon의 세계에서 기억은 마치 디지털 영상 파일처럼 저장된다. 필요할 때마다 언제든 다시 불러볼 수 있고, 원하는 장면은 멈추거나 확대해서 확인할 수도 있다. 범죄 수사에서는 기억이 더 이상 불완전한 증언이 아니라 객관적인 증거가 된다.
하지만, 실제로 인간의 기억은 이렇게 단순하게 작동하지 않는다.
신경과학자들은 오래전부터 기억을 ‘기록’이 아닌 ‘재구성’의 과정으로 설명해 왔다. 우리는 과거를 있는 그대로 저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경험의 핵심 요소들을 여러 뇌 부위에 나눠 저장한 뒤,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다시 조합한다.
이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하는 곳이 해마(Hippocampus)다. 해마는 기억 전체를 저장하는 장치라기보다는, 여러 기억의 단편을 연결해 주는 일종의 색인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1986년에 제안된 ‘해마 메모리 색인 이론’도 바로 이 점을 강조한다. 이 이론에서는 해마가 경험에 따라 활성화된 신피질의 여러 영역을 색인처럼 엮고, 그 연결을 유지한다고 설명한다 (출처 6, 7). 예를 들어, 친구와 카페에서 나눴던 대화를 떠올려 보자. 친구의 얼굴은 시각피질에, 목소리는 청각피질에, 그때 느꼈던 감정은 편도체에 따로 저장되어 있다. 해마는 이렇게 흩어져 있는 정보을 빠르게 하나의 경험으로 이어준다. 최근 들어서도 해마는 신피질에 저장된 정보를 효과적으로 집어내는 좌표계나 색인 역할을 하며, 기억을 불러오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우리가 기억을 되살릴 때, 과거는 그저 재생되는 것이 아니라 매번 새롭게 만들어진다. 심리학과 신경과학 연구에 따르면, 우리의 기억은 생각보다 훨씬 쉽게 변형될 수 있다. 어떤 때는 실제로 겪지 않은 일까지도 마치 경험했던 것처럼 믿게 되고, 똑같은 일을 반복해서 떠오를수록 세부 내용이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 (출처 8, 9).
흥미롭게도 이런 불완전함은 뇌의 결함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기억이 유연하기 때문에 우리는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고, 과거 경험과 연결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 만약 모든 기억이 완벽하게 고정되어 있었다면,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영화 Anon은 흥미로운 대비를 보여준다. 영화 속 사회는 완벽한 기억을 꿈꾼다. 반대로 실제 인간의 뇌는 완벽함보다는 유용한 기억을 선별해 남기는 쪽으로 발전해 왔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또 하나의 물음이 생긴다. 만약 기억의 불완전성이 인간의 본질적인 특성이라면, 우리는 왜 여전히 더 많은 기억을 저장하려 애쓰는 걸까?
― 완벽한 기억 속에서 시작된 균열
영화가 시작되면 형사 살 프릴랜드는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살인 사건을 맡게 된다. 이 사회에서는 모든 기억이 기록되기 때문에 범죄 수사가 그리 어렵지 않다. 피해자와 용의자가 본 장면을 확인하면 사건의 대부분을 쉽게 재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굳이 증언을 따로 받을 필요도 없고, 기억 자체가 곧 증거가 된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뭔가 달랐다. 살인은 분명히 일어났지만, 범인의 흔적이 전혀 남지 않았다. 마땅히 기록되어야 할 장면이 텅 비어 있었고, 남아 있어야 할 기억도 흔적도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수사를 이어가던 살은 그 과정에서 '아논(Anon)'이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자와 마주친다. 그녀는 정부 시스템 어디에도 이름이 없고, 어떤 기록도 없으며, 심지어 추적조차 불가능한 완벽한 유령과 같은 인물이다.
게다가, 그녀는 다른 사람의 기억을 조작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누군가 실제로 본 장면을 완전히 다른 이미지로 바꿔 놓고, 있던 기억을 아예 지워 버리기도 하며, 자신이 있었던 흔적마저 완벽히 삭제해 버릴 수 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뒤로, 살은 점점 혼란 속에 빠져든다. 지금까지 그는 기억을 진실이라 믿어 왔다. 그러나 사건을 깊이 파고들수록, 더 이상 기억이 곧 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영화의 긴장감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누군가가 대놓고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닌데, 오히려 모두가 같은 ‘진실’을 보고 있는데도 그 진실 자체가 조작되고 있다는 사실이 훨씬 더 소름 끼치게 다가온다. 완벽하게 기록된다는 기억이 오히려 이 사회를 가장 불신하게 만드는 역설이 벌어지는 순간이다.
이제 영화는 단순한 범죄 스릴러를 넘어서기 시작한다. 진짜 문제는 범인을 찾는 게 아니라, ‘기억을 믿지 못하는 세상에서 과연 진실은 어디에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옮겨간다.
― 망각은 실패가 아니라 기능이다
신경과학자들은 오랫동안 기억에 대해 연구해 왔지만, 최근에는 오히려 '망각'이 뇌의 중요한 기능이라는 점에 더 주목하고 있다.
우리는 흔히 무언가를 잊는 일을 실패로 여긴다. 시험 내용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약속을 잊거나, 누군가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 기억력이 예전 같지 않다고 느낀다.
그런데 만약 모든 경험을 빠짐없이 저장해야 한다면 어떨까?
아침에 마신 커피의 향부터, 수년 전 지나쳤던 자동차 번호판, 그리고 평생 동안 들었던 수많은 대화와 소음까지 모두 남아 있다면 오히려 정말 중요한 정보들이 묻혀 버릴 것이다.
실제로 기억은 정보를 단순히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고 추리는 과정에 더 가깝다.
뇌는 자신이 겪은 모든 정보를 모조리 간직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재 생존이나 미래 행동에 도움이 될 법한 정보에 우선순위를 둔다. 그 외의 정보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흐려지거나 사라진다.
최근의 연구들은 이런 과정이 단순히 자연스럽게 흐려지는 것이 아니라, 뇌가 의도적으로 정보를 걸러내고 망각을 조절한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있다. 특정한 시냅스는 일부러 약화되기도 하고, 서로 경쟁하는 기억들은 접근성을 떨어뜨리기도 한다. 또 새로운 것을 배울 때는 오래된 정보의 일부가 자연스럽게 밀려나기도 한다 (그림 2, 3).
그림 2. Schematic representation of major mechanisms of active forgetting in drosophila and rodents. DA, dopamine; DAMB, dopamine receptor in mushroom body (MB) neuron; D1/5, dopamine receptor subtype in mammals; DG, dentate gyrus; HP, hippocampus; PLC, phospholipase C. represents inhibition; → represents facilitation; arrows at the right part of neurons represent behavioral outcome (출처 10).
그림 3. Network level regulation of forgetting. Forgetting involves multiple network level mechanisms that regulate engram cell (EC) synapses. An existing memory engram is stored across engram cells and their synaptic connections (blue). These EC are modulated by external circuits (red) that respond to sensory experience or internal states and regulate EC synaptic strength and thus regulate forgetting. Additionally, neurogenesis drives the creation of new engram cells (purple) that compete for synaptic inputs and outputs with existing engram cells storing pre-existing memories. Here,“+” indicates the recent addition of a synapse between new EC and existing EC. Finally, weaker engram synapses are targeted for phagocytosis and elimination by microglia (green) (출처 11).
즉, 망각은 기억에 생긴 결함이 아니라 뇌가 정보를 최적화하기 위해 택한 전략에 가깝다. 이렇게 바라보면, 기억의 목적에 대한 우리의 생각 역시 바뀌기 시작한다.
우리는 기억이 과거를 그대로 보존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진화의 관점에서 보면 기억의 진짜 목적은 과거를 저장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앞서 예측하는 데 있다.
뇌는 과거의 경험을 모두 떠안기보다는, 앞으로 닥칠 수 있는 상황에 대비해 필요한 정보만을 추려내고 재구성한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 완벽하게 모든 것을 보관하는 창고가 아니라, 끊임없이 내용을 편집하며 미래에 대비하는 시스템을 갖고 살아가게 된 것이다.
이 지점에서 〈Anon〉이라는 영화는 우리에게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만약 인간이 더 이상 아무것도 잊지 않게 된다면, 그것은 과연 기억이 완성되는 순간일지, 아니면 오히려 기억 시스템 전체가 무너지는 시작일지.
출처:
1. Meng, L., & Yang, C. (2023). Dual-guided brain diffusion model: Natural image reconstruction from human visual stimulus fMRI. Bioengineering, 10(10), 1117.
2. Tang, J., LeBel, A., Jain, S., & Huth, A. G. (2023). Semantic reconstruction of continuous language from non-invasive brain recordings. Nature Neuroscience, 26(5), 858-866.
3. Giraud, A. L., & Su, Y. (2023). Reconstructing language from brain signals and deconstructing adversarial thought-reading. Cell Reports Medicine, 4(7).
4. Arulchelvan, E., & Vanneste, S. (2026). Targeting active forgetting with non-invasive stimulation: toward novel treatments for intrusive memories in PTSD. International Review of Psychiatry, 1-23.
5. Davis, R. L., & Zhong, Y. (2017). The biology of forgetting—a perspective. Neuron, 95(3), 490-503.
6. Teyler, T. J., & DiScenna, P. (1986). The hippocampal memory indexing theory. Behavioral neuroscience, 100(2), 147.
7. Teyler, T. J., & Rudy, J. W. (2007). The hippocampal indexing theory and episodic memory: updating the index. Hippocampus, 17(12), 1158-1169.
8. https://www.sciencedaily.com/releases/2014/06/140623142021.htm
9. Estes, W. K. (1997). Processes of memory loss, recovery, and distortion. Psychological review, 104(1), 148.
10. Medina, J. H. (2018). Neural, cellular and molecular mechanisms of active forgetting. Frontiers in systems neuroscience, 12, 3.
11. Berry, J. A., Guhle, D. C., & Davis, R. L. (2024). Active forgetting and neuropsychiatric diseases. Molecular psychiatry, 29(9), 2810-2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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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영틀신반]을 연재 중인 박성모입니다. 저는 현재 캐나다 토론토 Sickkids hospital 소속 연구센터의 Neuroscience Mental Health Program 소속인 Dr. Sheena Josselyn lab의 Research Associate 3년 차입니다. 제 연구의 주된 관심사는 learning & memory입니다. 연구를 하면서 재미있는 논문들을 자주 접하게 됩니다. 또한 관련 기술이나 개념을 영화의 소재로 사용한 부분들이 자주 눈에 띄어서 이렇게 연재를 통해 알기 쉽게, 유익하게 풀어가고자 합니다. 제가 앞으로 다룰 영화는 이미 많이 알려진 영화들과 Netflix에서 실험적으로 만들어진 영화들이 대상입니다. 다소 중국집 이름 느낌이 나는 저의 연재를 재미있게 함께 읽어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