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내기 연구원 여러분, 다시 만나서 반갑습니다.
지난 장에서 알려드린 방법을 연구실에서 잘 적용하고 계셨나요? 첫인상 카드를 잘 써먹고, 호감포인트도 야금야금 적립하고 계셨다면 이제 여러분은 연구실이라는 낯선 세계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셨을 겁니다. 축하합니다. 튜토리얼의 두 번째 관문에 도착하셨군요. 이번 장에서는 새내기 연구원이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하기 전 연구실에서 실제로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연구원은 어떤 일을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실험하고 논문 쓰기가 연구원의 가장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연구활동이 매끄럽게 굴러가려면 뒤에서 챙겨야 할 자잘한 일들이 정말 많거든요. 이 일들은 연구실 구성원 모두가 적절히 나눠서 맡게 됩니다. 보통 교수님과 고참 선배들은 연구비 확보나 머리 아픈 행정 업무를 담당하시죠. 반면 새내기 연구원 여러분들은 복잡한 일보다는 몸으로 때우면 되는 간단한 일들을 주로 맡게 됩니다.
폐기물 버리기, 소모품 채우기, 실험물품 재고 점검하기, 솔루션 만들어두기, 선배 실험 도와주기…
소위 말하는 '막내잡' 이라는 것들 말입니다. 연구실에서 "이거 누가 하는 거지?" 싶은 일이 있다면 대부분 여러분이 하게 될겁니다. 이런 일들은 너무 사소해 보여서 부당하게 느껴질 수도 있고 내가 이러려고 대학원 왔나 싶을 수 있지만 이 막내잡들은 사실 연구실 전반을 파악하고 적응하는 데 엄청난 도움을 줍니다. 물건이 어디 있는지, 시약은 어떻게 만드는지, 안전은 어떻게 챙기는지… 몸으로 익히는 만큼 빠르게 배우는 것도 없죠. 그럼 이 막내잡들을 하나하나 뜯어보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떤 배움을 얻을 수 있을지 이야기해보겠습니다.
Gemini 생성 AI 이미지 1. 폐기물 버리기
활발하게 돌아가는 wet lab이라면 일주일에도 몇 박스씩 실험 폐기물이 쏟아져 나옵니다. 쓰레기통이 넘치기 전에 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하죠. "설마 저게 넘칠 때까지 아무도 안 버리겠어?" 싶겠지만 놀랍게도 그 '아무도'가 바로 여러분입니다.
연구실에서 나오는 폐기물은 크게 일반의료 폐기물, 병리계 폐기물, 손상성 폐기물, 폐시약 등이 있고, 종류에 따라 처리 방법이 다릅니다. 아무 데나 섞어 버리면 안 된다는 뜻이죠.
- 일반의료 폐기물 – 실험 후 나오는 대부분의 플라스틱웨어(팁, 튜브, 배양 접시 등)가 여기에 속합니다. 연구실 안전을 위해 폐기물 박스의 뚜껑은 항상 닫혀 있어야 하고, 설치 후 2주 이내에 사용하는 것이 권장됩니다. 테이프로 박스를 잘 밀봉하여 폐기합니다.
- 병리계 폐기물 – 세포 배양액처럼 인체·생물 유래 조직이나 배양물이 닿은 액체·물질이 해당됩니다. 감염 위험이 있을 수 있으니 지정된 전용 용기에 따로 모아 처리합니다. (연구실 최악의 냄새 top5에 든다고 자부합니다..)
- 손상성 폐기물 – 말 그대로 뾰족하고 날카로운 것들입니다. 주삿바늘, 깨진 유리, 칼날처럼 일반의료폐기물용 종이박스에 넣었다간 뚫고 나와 누군가를 다치게 할 수 있는 것들이죠. 그래서 손상성 폐기물은 반드시 단단한 플라스틱 통에 버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 폐시약 – 하수구에 그냥 부어버릴 수 없는 모든 연구용 액체류를 말합니다. 메탄올 같은 유기용매, 산·염기성 폐액, 폭발·발화 위험이 있는 시약 등이 여기 해당되죠. 이런 것들은 성질별로 분리해서 지정된 폐액통에 모으고, 절대 서로 섞이면 안 되는 조합이 있으니 라벨을 꼭 확인하고 버려야 합니다.
이렇게 폐기물을 종류별로 제대로 버리다 보면 연구실 안전에 대한 감각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게 됩니다. 귀찮은 막내잡이 사실은 가장 좋은 안전 교육인 셈이죠.
Tip ! 어떤 폐기물인지 헷갈릴 땐 그냥 버리지 말고 선배에게 물어보세요. 잘못 버린 폐기물 하나가 여러분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습니다. ! 폐액통이 거의 다 찼다면, 넘치기 전에 미리 선배에게 알려 교체 시점을 챙기세요. |
2. 소모품 채우기
연구실을 한번 쭉 둘러보세요. 여러분 시야에 들어오는 거의 모든 것이 소모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피펫 팁, 장갑, 튜브, 킴와이프, 알코올, 시약… 연구실에서 물처럼 쓰이는 것들이죠.
소모품 채우기의 핵심은 '내가 마지막으로 쓴 사람이 되지 않기', 그리고 '다음 사람이 빈손으로 마주하지 않게 하기'입니다. 팁 박스가 비면 새 걸로 채워두고, 장갑 상자가 바닥을 보이면 새 상자를 뜯어 두는 겁니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바쁘게 실험하다가 팁이 똑 떨어졌을 때의 그 막막함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채워두는 사람의 소중함을 압니다. 특히 버퍼나 솔루션 등의 시약을 만들다 보면 자연스럽게 용액 농도를 계산하는 방법을 익힐 수 있죠. 10X가 뭔지 1mM은 어떻게 만드는 건지 연습해 볼 수 있습니다.
Tip ! 마지막 하나를 꺼내 쓸 때가 가장 중요한 순간입니다. 절대로 마지막으로 쓴 사람이 되지 맙시다. |
3. 실험물품 재고 점검 & 주문하기막내잡 중에서도 은근히 일머리와 책임감이 필요한 일이 바로 재고 관리입니다. 소모품이 갑자기 0이 되는 순간 연구실이 통째로 멈춰버릴 수 있죠. 실험 잘하다가 시약이 없어서 며칠을 날리는 것만큼 억울한 일도 없습니다.
재고 관리의 기본은 수시로 살펴보는 습관입니다. 연구실마다 재고를 관리하는 방식이 있을 겁니다. 엑셀 시트에 적어두는 곳도 있고, 화이트보드에 '부족 목록'을 적는 곳도 있고, 그냥 눈대중으로 하는 곳도 있죠. 어떤 방식이든 여러분이 맡았다면 여유분이 있을 때 미리 주문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주문하는 법도 처음엔 낯설지만 알고 보면 어렵지 않습니다.
품목명, 카탈로그 번호(cat. no.), 규격, 수량을 정확히 확인하세요. 특히 카탈로그 번호는 같은 제품이라도 규격에 따라 번호가 다르니 기존 물품과 반드시 대조해야 합니다.
연구실마다 거래하는 업체나 대리점, 구매 담당 선배가 정해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임의로 아무 데서나 사면 안 됩니다.
대부분의 연구실은 학교나 기관의 구매 시스템을 통해 정산합니다. 견적을 받고, 담당 선배나 행정 담당자에게 확인을 거친 뒤 발주하는 흐름이죠. 절대 여러분 사비로 먼저 지르지 마세요.
Tip ! 주문할 때는 반드시 카탈로그 번호를 기준으로 확인하세요. "그 하얀 통에 든 거요"는 주문서에 쓸 수 없습니다. ! 리드타임(주문 후 도착까지 걸리는 시간)이 긴 품목이 있습니다. 특히 해외 배송 시약이나 특수 물품은 몇 주씩 걸리기도 하니 다 떨어지기 전에 미리 주문해 두는 감각을 길러야 합니다. ! 연구실에서 사용되는 물품들은 보통 그 제품을 사용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비슷한 제품이라고 아무거나 주문했다간 큰 곤경에 처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기존 물품과 동일한 제품을 구매하세요. |
4. 청소 & 설거지
마지막은 아무리 해도 티도 안 나는 청소와 설거지입니다. 집에서도 안 하는 설거지를 연구실에서까지 해야 하다니 너무 귀찮죠. 하지만 실험실의 청결은 의외로 보기 좋음의 문제뿐만 아니라 실험 결과와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 실험 기구 설거지 – 초자류(비커, 플라스크 등)는 세제로만 끝나는 게 아닙니다. 연구실마다 정해진 세척 절차(세제 세척 → 수돗물 헹굼 → 증류수(DW) 헹굼 → 건조)가 있으니 꼭 확인하고 따르세요. 대충 씻은 기구에 남은 잔여물이 다음 실험을 망칠 수 있습니다.
- 공용 공간 정리 – 흄후드, 클린벤치, 원심분리기, 공용 장비 주변은 쓴 사람이 원상 복구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 내 자리 관리 –내 실험대부터 깔끔하게 유지하는 습관을 들이세요. 자리가 곧 그 사람의 실험 태도를 보여줍니다.
이 지점에서 지난 장의 이야기가 다시 떠오르시나요? 그렇습니다. 깔끔하게 정리된 자리와 성실하게 채워진 소모품 선반은 여러분이 애써 적립한 호감포인트를 조용히, 확실하게 불려줍니다.
Tip ! 공용 장비를 썼다면 사용 후 바로 정리하세요. "이따 치워야지"의 '이따'는 대체로 오지 않습니다. |
이번 장도 여기까지 따라오셨다면 여러분은 이제 단순히 자리만 지키는 새내기가 아니라 연구실이 돌아가게 만드는 톱니바퀴의 한 축이 된 겁니다. 막내잡은 하찮은 잡일이 아니라, 연구실이라는 시스템을 몸으로 이해하는 가장 빠른 지름길입니다. 폐기물을 버리며 안전을 배우고, 소모품과 재고를 챙기며 실험의 흐름을 익히고, 청소를 하며 신뢰를 쌓는 거죠.
지금 성실하게 채워둔 팁 박스와 깨끗이 씻어둔 초자는 언젠가 여러분의 후배가 이어받아 여러분의 연구를 서포트하게 될 겁니다.
다음 장에서는 드디어 본격적인 연구의 세계, 실험 프로토콜을 익히고 실험을 설계하는 법에 대해 다뤄보겠습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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