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연구의 이상과 현실 (5) - 인정은 늦게 할수록 어려워진다
지난 글에서는 공동 연구에서 저자 순서가 왜 단순한 이름의 배열이 아니라 감정의 문제가 되는지 이야기했습니다. 논문에는 figure와 저자 목록이 남지만, 그 뒤에 있는 수많은 실패와 반복, 일정 조율과 원고 수정의 시간은 충분히 기록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자신의 노동이 어떻게 인정받는지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저자 순서 문제는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요.
모든 사람이 완벽하게 만족하는 저자 순서를 만드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공동연구에서는 각자의 기여가 서로 다른 형태를 갖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실험을 많이 하고, 누군가는 분석을 맡고, 누군가는 원고를 쓰고, 누군가는 연구의 방향을 잡습니다. 이 모든 기여를 하나의 순서로 정리하는 일은 언제나 어렵습니다. 실제로 저희 연구실에서는 항상 저자 순서로 인해 학생들 사이의 갈등이 있었습니다. 양측의 말을 들어보면 둘 다 기여도가 크고 누구를 앞으로 보낼지 애매했습니다.
하지만 갈등을 줄이는 것은 가능합니다.
중요한 것은 저자 순서 그 자체만이 아니라, 그 순서가 정해지는 과정입니다.
저자 순서 갈등은 완전히 없앨 수는 없지만, 줄일 수는 있습니다.
기여도의 차이는 생길 수 있지만, 그 차이를 설명할 수는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원하는 위치를 얻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왜 그런 결정이 내려졌는지는 공유할 수 있습니다.
결국 공동 연구에서 필요한 것은 완벽한 공정성이라기보다, 납득 가능한 과정입니다.
저자 순서는 언제 논의해야 하는가
제가 여러 공동연구를 경험하면서 느낀 것은 저자 순서 문제는 가능한 한 일찍 이야기할수록 좋다는 점입니다. 물론 연구 시작과 동시에 최종 순서를 확정하자는 뜻은 아닙니다. 연구는 변수가 많고, 실제 기여도는 진행 과정에서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최소한의 원칙은 초기에 정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기준으로 1 저자를 정할 것인지.
공동 1 저자가 가능하다면 어떤 경우에 인정할 것인지.
각 연구실의 담당 figure는 어떻게 기록할 것인지.
원고 작성과 revision 대응은 기여도에 어떻게 반영할 것인지.
중간에 역할이 달라지면 저자 순서를 다시 논의할 수 있는지.
이런 이야기를 처음부터 꺼내는 것은 어색할 수 있습니다. 특히 한국 연구 환경에서는 저자 순서를 초기에 이야기하는 것이 지나치게 계산적이거나 예민한 태도로 보일까 봐 조심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 어색함을 피하다가 나중에 더 큰 갈등이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자 순서는 감정의 문제이기 전에 구조의 문제입니다.
구조가 없으면 감정이 커집니다.
처음에 기준이 없으면, 나중에는 각자가 자기 기억을 기준으로 기여도를 판단하게 됩니다. 나는 이만큼 했다고 느끼고, 상대는 다르게 기억합니다. 나는 내가 연구를 끌고 왔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사람은 자신의 실험이 핵심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각자의 기억이 충돌할 때, 저자 순서는 단순한 행정 절차가 아니라 감정싸움이 됩니다.
건강하게 조율되었던 경험
물론 모든 공동연구가 불편한 방식으로만 흘러가는 것은 아닙니다. 저에게도 비교적 건강하게 저자 순서와 기여도를 조율했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방문 연구원으로 지내던 시기에 참여했던 한 연구에서는 여러 사람이 각기 다른 파트를 맡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나노입자 제작, 물성 분석, 세포 실험을 맡았고, 또 다른 사람은 동물 실험과 면역 분석을 맡았습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이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중요한 순간마다 “누가 무엇을 했는지”를 다시 확인하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점은 저자 순서를 논문이 거의 완성된 뒤에 갑자기 꺼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데이터가 모이고 논문의 방향이 잡히기 시작했을 때, PI와 주요 참여자들이 각자의 기여를 비교적 솔직하게 정리했습니다. 누가 어떤 figure를 책임졌는지, 누가 실험 설계에 깊게 관여했는지, 누가 원고 작성과 수정에 참여할 것인지가 논의되었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도 완전히 감정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저자 순서 문제에서 감정이 완전히 사라지기는 어렵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기여가 제대로 인정받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 논의가 뒤늦게, 비공식적으로, 누군가의 일방적인 결정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각자가 납득할 수 있는 기준을 만들려고 했고, 그 기준을 바탕으로 순서를 조율하려고 했습니다.
그 경험을 통해 저는 중요한 것을 배웠습니다.
저자 순서 갈등은 완전히 없앨 수는 없지만, 줄일 수는 있습니다.
기여도의 차이는 생길 수 있지만, 그 차이를 설명할 수는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원하는 위치를 얻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왜 그런 결정이 내려졌는지는 공유할 수 있습니다.
결국 문제는 순서 자체만이 아니라, 그 순서가 정해지는 과정에 있습니다.
인정은 기록되어야 한다
공동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여를 제때 인정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꼭 최종 저자 순서를 바로 정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연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누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계속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 figure는 어느 연구실이 주도했는지.”
“이 분석은 누가 담당했는지.”
“이 실험은 원래 계획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들어갔는지.”
“원고 작성은 누가 맡고 있는지.”
“revision 과정에서 추가 실험을 누가 수행했는지.”
이런 것들을 중간중간 확인해 두면, 나중에 저자 순서를 논의할 때 기준이 생깁니다. 반대로 이러한 확인 없이 연구가 끝나면, 각자는 자기 기억을 들고 협상 테이블에 앉게 됩니다. 그리고 기억은 대개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남습니다.
그래서 인정은 말로만 해서는 부족할 때가 있습니다.
기여는 기록되어야 합니다.
공동연구가 진행되는 동안 각 연구실이 맡은 figure, 각 실험의 담당자, 분석자, 원고 작성자, revision 대응자를 간단하게라도 정리해 두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누군가를 감시하기 위한 기록이 아니라, 나중에 기여를 잊지 않기 위한 기록입니다.
연구가 길어질수록 처음의 기억은 흐려집니다. 처음에는 “이 실험은 A가 정말 고생했다”라고 모두가 알고 있던 일도, 몇 달이 지나면 “그 데이터는 원래 있었던 것”처럼 취급되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추가로 도와준 일이었는데, 반복되다 보면 어느새 당연한 역할처럼 굳어지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여는 가능하면 그때그때 기록되어야 합니다.
기억에만 의존하는 공동연구는 결국 누군가의 노동을 지우기 쉽습니다.
인정은 늦게 할수록 어려워진다
처음에는 고맙다고 말할 수 있었던 일도, 시간이 지나면 당연한 일이 됩니다. 처음에는 추가 기여로 보였던 일도, 반복되면 그 사람의 원래 역할처럼 굳어집니다. 처음에는 누군가가 빈틈을 메운 것이라고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연구가 끝날 때쯤에는 그 빈틈이 있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공동연구에서 실무자의 노동은 특히 사라지기 쉽습니다.
메일을 보내고, 일정을 맞추고, 데이터를 정리하고, 파일명을 통일하고, figure를 다시 만들고, 보고서 초안을 작성하는 일들은 연구를 굴러가게 하지만, 최종 논문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 일들이 반복되면 주변 사람들은 그것을 기여가 아니라 역할로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원래 그 사람이 하던 일.”
“그 연구실에서 맡기로 한 일.”
“늘 그렇게 해 왔던 일.”
이런 식으로 이름 붙여지는 순간, 추가적인 노동은 더 이상 추가 기여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정은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더 어려워집니다. 나중에 한 번에 평가하려고 하면, 이미 많은 일이 당연한 것으로 굳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공동연구에서 건강한 저자 순서 논의는 갑자기 생기지 않습니다.
그것은 평소에 기여를 어떻게 보고,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기록했는지의 결과입니다.
납득 가능한 저자 순서를 위해 필요한 것
완벽하게 공정한 저자 순서는 어쩌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공동연구에서는 각자의 기여가 서로 다른 형태를 갖고, 연구실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기준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납득 가능한 저자 순서는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몇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 저자 순서의 기준을 너무 늦게 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최종 투고 직전에 저자 순서를 논의하면, 이미 감정이 쌓여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연구가 어느 정도 방향을 잡고 핵심 데이터가 보이기 시작했을 때, 중간 점검의 형태로라도 기여도를 이야기하는 것이 좋습니다.
둘째, figure 단위의 책임자를 정리하는 것입니다.
논문은 결국 figure 중심으로 구성됩니다. 어떤 figure를 누가 만들었고, 누가 실험했고, 누가 분석했고, 누가 해석했는지 정리해 두면 저자 순서를 논의할 때 훨씬 구체적인 근거가 생깁니다.
셋째, 원고 작성과 revision 대응에 기여도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실험이 끝났다고 해서 논문이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논문을 실제 문장으로 만들고, reviewer comment에 답하고, 추가 실험을 설계하고, figure를 다시 정리하는 과정도 중요한 기여입니다. 이 과정이 저자 순서 논의에 충분히 반영되어야 합니다.
넷째, 보이지 않는 조율 노동도 무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연구실 간 일정 조율, 데이터 정리, 회의록 작성, 샘플 전달, 실험 조건 통일 같은 일들은 논문에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공동 연구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이러한 노동이 모두 저자 순서로 환산될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기여도 논의에서 완전히 지워져서는 안 됩니다.
결국 좋은 저자 순서 논의는 누가 더 많이 가져갈 것인가를 따지는 과정이 아니라, 누가 어떤 방식으로 연구를 가능하게 했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저자 순서는 연구자의 시간을 기록하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그 순서에는 감정이 실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감정이 실린다는 이유로 이 문제를 피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감정이 실리는 문제일수록 더 일찍, 더 구체적으로, 더 조심스럽게 이야기해야 합니다. 공동연구에서 저자 순서는 마지막에 정리하는 행정 절차가 아니라, 연구가 진행되는 동안 계속 확인해야 하는 기여도의 결과입니다.
논문 한 편이 세상에 나오면, 독자는 대개 제목과 초록, 그리고 저자 목록만 봅니다. 하지만 그 저자 목록 뒤에는 각자의 시간이 있습니다. 좋은 협업은 그 시간을 함부로 지우지 않는 방식으로 완성되어야 합니다.
다음 편에서는 공동연구에서 회의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회의는 협업을 위해 꼭 필요하지만, 때로는 일을 줄이기보다 새로운 일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회의에서 결정된 것처럼 보였던 일이 왜 다시 실무자의 몫으로 돌아오는지, 그리고 회의가 많아질수록 왜 일이 더 명확해지지 않는 순간들이 생기는지 살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