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연구의 이상과 현실 1 - 우리는 왜 함께 연구하는가
논문 한 편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그 뒤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을까요. 저널에 게재된 여러 논문들을 펼치면 제목 아래 바로 저자 목록이 보입니다. 첫 번째 1 저자의 이름과 마지막 교신 저자의 이름, 그리고 그사이에 나열된 수많은 이름들을 볼 수 있습니다. 독자는 주로 첫 번째 저자와 교신 저자만 기억하고, 나머지 저자들은 스크롤을 내리면서 무심코 지나치게 됩니다. 하지만 연구 현장 안에서 일을 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고 있습니다. 그 이름들 각각이 얼마나 다양한 역할과 무게를 가지고 논문 한 편에 참여하고 있는지요. 어떤 이름 뒤에는 수십 번의 실험 실패가 있을 수 있고, 어떤 이름 뒤에는 밤새 정리한 데이터 시트가 쌓여 있으며, 또 어떤 이름 뒤에는 아무도 몰라주는 일정 조율 및 커뮤니케이션의 시간이 켜켜이 쌓여 있을 것입니다. 저자 목록은 그 모든 것을 담기에는 턱 없이 부족할 지도 모릅니다.
저는 바이오메디컬공학을 전공하면서 여러 학교의 여러 연구실이 함께 참여하는 공동연구를 수차례 경험했습니다. 공동연구를 진행하면서 제가 맡은 역할은 꽤나 다양했습니다. 실험만이 아니었습니다. 실험 기획부터 데이터 정리, 연구실 간 의사소통은 물론 각종 서류 처리, 연구비 관리 같은 행정 업무까지 실무의 상당 부분을 직접 담당했습니다. 아무래도 크기가 작은 연구실이라 더 그랬을지도 모르지요. 그 과정에서 저는 공동연구가 이론적으로 약속하는 것과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 사이에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를 몸으로 배우게 되었습니다.
이 연재는 그 차이에 대한 기록입니다.
공동연구가 약속하는 것들
공동연구는 현대 과학의 표준적인 연구 과제를 수행하는 방식이 되었습니다. 하나의 연구실이 모든 것을 감당하기 어려운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서로 다른 전문성을 가진 집단이 모여 하나의 목표를 가진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힘을 합치는 것은 당연한 흐름처럼 보이며, 실제로 공동연구가 필수적이라는 논리는 꽤 설득력이 있습니다.
첫째, 시너지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A 연구실은 생체 소재 합성을 잘하고, B 연구실은 세포 실험 인프라가 탄탄하고, C 연구실은 동물모델 실험 역량이 있다면, 세 곳이 함께할 때 어느 한 곳이 혼자 할 수 없는 연구가 가능해집니다. 서로 다른 전문성이 만나 새로운 발견을 통해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낸다는 아이디어는 학문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정책적으로도 다 방면에서 매우 매력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효율성이 향상됩니다.
역할을 나누면 각자가 잘하는 것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쓸데없는 중복 투자는 줄이고, 자원을 최적화하여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연구비 지원 기관 역시 이러한 논리를 좋아합니다. 여러 기관이 참여하는 과제일수록 규모와 영향력이 커 보이고, 예산의 효율적 활용이라는 명분도 생기기 때문입니다. 대형 과제를 설계하는 자리에서 ‘공동연구’라는 단어는 거의 언제나 긍정적인 신호로 읽힙니다.
셋째, 네트워크 형성이 가능합니다.
공동연구는 연구자들 사이의 관계를 만들고 유지하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함께 논문을 쓰고, 학회에서 얼굴을 마주치고, 다음 과제를 구상하면서 형성되는 학문 공동체는 이러한 협력의 반복으로 더욱 촘촘하게 구축됩니다. 좋은 공동연구 경험은 연구자의 커리어에서 중요한 자산이 되기도 하지요.
공동연구에 대한 이 모든 이야기는 틀리지 않습니다. 실제로 훌륭한 공동연구들이 존재하고, 단독으로는 불가능했을 발견들이 협업을 통해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논리가 현장에서, 특히 실무를 담당하는 연구자에게 그대로 작동하는가 하는 부분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현실이 시작되는 곳
공동연구가 시작될 때, 모든 것은 대체로 긍정적입니다. 킥오프 미팅이 열리고, 각 연구실의 역할이 개략적으로 정해지게 됩니다. 공동의 연구 목표가 공유되고, 일정이 잡히면, 그 자리에 앉아 있는 PI(책임 연구자)들은 각자의 연구실을 대표해 말을 나누고, 협력의 청사진을 함께 그립니다. 회의실 안의 분위기는 대체로 활기차고, 이 연구가 어떤 결과를 낼 수 있을지에 대한 기대가 오갑니다.
그리고 미팅이 끝나면, 실무는 지도교수님 아래의 대학원생에게 내려오게 됩니다.
"○○ 씨가 이번 주 안에 프로토콜 정리해서 저쪽 연구실에 공유해 주세요."
"데이터는 언제까지 나올 것 같아요?"
"저쪽에서 샘플 받으면 바로 실험 들어갈 수 있죠?"
이 질문들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답해야 하는 사람이 항상 같다는 것, 그리고 그 사람은 대개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연구자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구조적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실무를 담당하는 것이 대학원생의 역할이고, 경험을 쌓는 것이 훈련의 일환이라는 논리도 있습니다. 저도 그 논리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실무를 한다'라는 것과 '책임을 진다'라는 것이 분리되지 않은 채로 함께 내려오는 경우가 많다는 점입니다. 일이 잘 되면 구조가 잘 작동한 것이고, 일이 틀어지면 실무자가 잘못 조율한 것이 됩니다. 조율이 잘못되면 실험 일정이 틀어지고, 의사소통에 오해가 생기면 데이터 해석에서 갈등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무게는 구조 전체가 아니라, 특정 개인이 짊어지게 됩니다.
저는 이러한 상황을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 누군가는 반드시 그 자리에 있어야 하고, 그 누군가는 대부분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결정하게 되는 그 상황을요.
이 연재가 말하고자 하는 것
이 연재를 통해서 누군가를 비판하거나 특정 기관의 문제를 폭로하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사실, 제가 만난 대부분의 연구자는 각자의 자리에서 성실하게 일을 했습니다. 물론 악의적인 사람도 있었습니다. 추후에 나오는 글에 이 일도 한 번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악의적인 사람이 없었는데도 상황이 나빠지는 경우가 많았고, 그것이 오히려 더 해결하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사람이 아니라 구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역할이 불분명한 채로 시작된 협업, 책임의 경계가 흐릿한 관계, 소통이 단절된 채 이어지는 실험들. 이것들은 특정 연구실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연구라는 시스템이 현장에서 작동하는 방식 자체의 문제입니다.
앞으로 이 연재를 통해서 저는 이 구조를 찬찬히 들여다볼 것입니다. 역할 분담은 어떻게 불균형해지는가. 책임 소재는 왜 항상 불명확한가. 데이터를 둘러싼 소유권과 해석 갈등은 어떻게 발생하는가. 논문 저자 순서는 어떤 기준으로 결정되며, 그 과정에서 어떤 감정이 오가는가.
그리고 이 연재는 공동연구에서 출발해, 더 넓은 연구 환경의 이야기로 이어질 것입니다. 연구실이라는 조직이 작동하는 방식, 연구자가 번아웃 없이 버티기 위해 필요한 것들, 연구를 마친 뒤의 진로와 정체성까지. 결국 이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는 하나의 질문이 있습니다.
연구 현장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지금 괜찮은가.
완벽한 협업이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보다 나은 협업은 분명히 가능합니다. 그 가능성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현실을 정직하게 바라보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 연재가 그 출발점이 되었으면 합니다.
공동연구의 이상과 현실, 그 사이 어딘가에서 오늘도 실험실 불을 켜는 연구자들에게 이 글을 건네고 싶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공동연구가 시작될 때 역할 분담이 어떻게 설정되고, 그것이 왜 처음부터 불균형의 씨앗을 품고 있는지를 다루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