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 학교에서 우승했던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우리가 아이디어를 제공한 회사에서 초대한다고 초대한다고 하더니 3개월이 지나서야 진짜로 미팅을 가졌다. 계절은 어느새 여름에서 겨울이 되어있었고 우리는 그 프로젝트를 거의 잊어가고 있었다. 미팅 내내 무슨 말을 하는지 거의 알아듣지 못했고.. 집중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점심을 사주신다고 해서 기대하고 갔는데... 피자가.. 내 손바닥보다도 작았다. 데니시들이 소식한다는 말을 전설처럼 듣기는 했는데.. 이 정도일 줄이야. (덴마크 사람이 밥을 사준다고 하면 밥을 꼭 먹고 가세요?) 적잖이 충격을 먹고 미팅 끝나고 혼자 또 카페에 가서 카다멈번을 사 먹었다. 참 이상하다. 그렇게 큰 대회에서 우승했을 때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기분이 들면서 온몸에 전율이 흘렀었는데 시간이 조금 지났다고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열정 넘치던 초반과 상반되는 지금의 내 모습이 조금 슬프기도 했다. 좋은 것도 힘들었던 것도 슬펐던 것들도 결국 다 한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다 지나간다. 항상 기분을 중간에 맞춰야 한다던데 이런 것 때문일까? 너무 하이 한 기분에서 바닥을 치면 더 힘들어지니까. 하지만 그렇더라도 나는 즐거울 땐 즐거움을 만끽하고 슬픔이 찾아오면 슬픔도 만끽하는 사람이 되어야지. 감정을 아끼고 참지 말아야지. 악뮤의 노래 중에 '기쁨 뒤에 슬픔이 오는 건 아름다운 마음이야. 쫓아내지 말고 품어주어라. 아주 예쁜 돌이 된단다'라는 가사가 떠오른다.

스웨덴에서 돌아온 나는 자퇴를 결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동안 공부에 치여 하지 못했던 것들을 하기 시작했다. 이곳의 친구들은 공부도 하면서 학교에서 하는 이런 활동도 활발하게 참여하던데.. 나는 어째서 그렇게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걸까? 하나를 내려놓아야 다른 하나를 시작할 수 있는 멀티가 되지 않는 나.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춘다는 건 어떤 걸까? 리스를 만들면서 너무 재밌는데 조금 슬픈 생각도 들었다. 매번 과제도 공부도 착실히 하는 내 친구들이 리스 만들기에 다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쟤네는 저런 체력과 여유가 어디서 나오는 걸까 하면서 부럽고 질투가 났다. 그리고 동시에 손을 꼬물 거리며 무언가를 만들 때 제일 집중도가 높고 재밌어하는 나라는 사실을 또 한 번 각성하게 됐다. 무언가를 손으로 만들 때가 가장 재밌고 뿌듯하다. 덕분에 생각만 해도 해피한 내가 가장 좋아하는 홀리데이인 크리스마스를 일찍 맞이할 수 있게 됐다.
다른 도시에 사는 미국 친구의 땡스기빙 데이 파티에 초대되어 난생처음 혼자서 재료 다 준비해서 제대로 김밥도 만들어 보았다. 덴마크에서 김밥을 처음 말아봤다니 참 웃기지만 너무 기억에 남는 날이다. 그리고 또 한 번 나는 손재주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발도 없이 그냥 종이 포일로 싼 건데 이렇게 잘 만들 줄은 몰랐다. 역시 고수는 장비를 탓하지 않는 법.
좋은 사람들, 사랑스러운 아기들 그리고 맛있는 음식까지. 완벽한 하루였다. 내가 만들어온 김밥은 애피타이저로 내놓자마자 5분 만에 매진되었다. 다들 감동의 눈물을 흘려주며 먹어주어서 어찌나 뿌듯했던지! 김밥이 생각보다 좋은 파티 음식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아이들과 함께 있으면 세상 모든 걱정과 시련들이 싹 사라지는 듯한 기분이 든다. 순수한 생명체들이 주는 해맑은 웃음과 엉뚱한 질문들이 나의 순수함을 끄집어 내주면서 너무 힘들어하지 않아도 된다고 위로해 주는 것 같다.
우리 동네 트리 점등식도 참여했다. 12월이 되자마자 본격적으로 크리스마스를 맞이할 준비가 시작되는 것이다. 나는 서양 국가들의 이런 호들갑이 참 좋다. 하루하루 설레는 이벤트들을 1년 내내 참 많이도 심어놨다. Fastelavn, 이스터, 서머 홀리데이, 핼러윈, 땡스기빙, 크리스마스 등등. 우리나라도 설날과 추석 말고 더 많이 재밌는 날들이 생겼으면 좋겠다. 더 많은 날들을 설레며 기다릴 수 있게.
핀란드에서 친구들이 놀러 왔다. 알고 지낸 지 벌써 10년이 다 되어가는 내 친구들이 맨날 덴마크에서 울고 있는 나를 만나러 날아와준 것이다. 이대로 울기만 하다가 우리도 안 보고 한국에 돌아가면 안 된다면서. 이 의리를 어찌 갚을지 머리를 굴리다가 옆집 아저씨한테 침구와 매트리스를 빌려서 세명 다 침대에서 잘 수 있도록 준비했다. 친구들이 어떻게 하면 더 편하게 묵다 갈지 골똘히 생각하며 방을 꾸미는데 어찌나 설레던지. 평소에 꿈이었던 에어비앤비를 운영해 보고 싶다는 꿈을 살짝 맛본 기분이다. 이날을 위해서 내 방에 침대가 이층 침대랑 싱글 침대가 있었던 거구나! 하면서 초반에 기부해 주신 분들께 너무 감사한 순간이었다. 선물을 잔뜩 사들고 새벽 2시에 친구들이 내 방에 들어왔을 때, 늘 혼자였던 내 방이 온기로 가득 찼다. 그간 내가 정말 외로웠구나.. 사람이 정말로 그리웠구나 싶었다.
친구들이 덴마크에서 머무는 동안 그간 가보지 못했던 외식도 잔뜩 했다. 이게 뭐라고 그동안 못했을까 싶고.. 덴마크에선 참 돈에 대한 압박이 심했던 거 같다. 한 학기에 몇천만 원이 넘는 학비도, 생활비도 다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데 생활비가 기존에 계획했던 것보다 더 많이 들어가는 바람에 늘 초조했던 거 같다.
내 핀란드 친구는 셰프인데, 덴마크에는 세계 최고의 레스토랑인 Noma 가 있다. 그런데 내가 학교에서 듣고 있는 수업이 노마 프로젝트랑 협업을 하고 있어서 노마 프로젝트 오피스를 방문해 볼 기회가 생겼다. 내 친구를 데려가면 너무 좋은 기회가 될 거 같아서 관계자에게 이메일을 보내 부탁을 드렸고, 흔쾌히 수락해 주셔서 오피스 투어는 물론 노마에서 개발한 각종 소스들을 테이스팅 해볼 수도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친구들이 너무 행복해해서 내가 다 행복했다. 다시 한번 덴마크는 자신이 두드리는 만큼 얻어 갈 수 있는 나라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먼저 묻지 않으면 기회는 영영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곳에서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단단히 배웠다.
덴마크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테마파크 중 하나인 티볼리 파크가 있는데, 이곳 또한 너무 가고 싶었지만 너무 비싸서 가보지 못했는데, 친구들 덕분에 10년 만에 다시 오게 되었다. 10년 전에 여행 왔을 때도 이곳이 가장 좋았는데, 지금도 여전히 낭만이 가득한 곳이다. 10년 전에는 이게 없었는데 이게 생겼네 하면서 예전 사진을 뒤져보면서 추억 여행을 제대로 했다. 그리고 한국에 가져갈 덴마크 마그넷도 이곳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구매했다. 이 순간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라서 어찌나 슬펐던지. 그래도 든든한 친구들 덕분에 울지 않고 씩씩하게 즐겁게 하루를 마무리했다.
학교에서 하는 크리스마스 디너도 참여했다. 그동안 도움을 많이 받았던 지인도 초대해서 저녁을 대접했다. 덴마크에선 덴마크인 친구를 만나기가 참 어려운데, 덴마크에서 크리스마스 때 먹는 음식을 이렇게라도 먹어볼 수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 햄요리(고기)가 다른 나라와는 달라 신기했다. 껍질 부분을 바삭하게 튀겨주는 게 특징이다. 학교 음식은 평범했지만 친구들이랑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그리고 나의 자퇴를 앞두고 도란도란 모여서 대화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나중에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갓 구운 햄으로 만든 샌드위치를 먹은 것이 정말 찐이었는데 그 맛을 잊을 수가 없다. 너무 맛있었다.
그동안 못했던 일들을 계속해서 해나갔던 2025년의 마지막 달. 나에게 꽃 사주기! 꽃을 참 좋아하는데 꽃을 사다가 꽂을 여유도 없었다니.. 참 직장인에서 학생으로 다시 돌아가는 건 어려운 거 같다. 세상의 스콥을 다시 줄여야 하는 일. 내가 좋아했던 것들을 잠시 참아야 하는 시기. 하루하루의 삶을 소중히 여기는 나는, 미래를 위해 지금의 고통을 참는 것에 실패하고 만다.
솔로 데이트도 참 많이 했다. 나처럼 외식 좋아하는 사람들은 덴마크에 살면 참 힘들 수 있다. 외식 물가가 너무 비싸서.. 한 번 나가려면 큰 마음을 먹어야 한다. 학교에서 만난 친구들은 보통 다 돈이 없는 20대 초반의 학생들이라 이런 곳에 함께 오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늘 혼자 데이트를 했는데 나는 혼자서도 잘 노는 사람이라 재밌게 여기저기 쏘다녔다. 한 10년 뒤쯤 내가 덴마크에 다시 돌아왔을 때쯤은 그 친구들도 일을 하고 있겠지? 함께 브런치를 하는 날이 오면 좋겠다.
수업을 많이 드롭하고 시간을 만들어서 국제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도 했다. 덴마크에서 일을 해보고 싶어서 석사를 온 것인데, 정작 일을 못해보고 가면 후회할 것 같아서. 그런데 도저히 학교 스케줄을 다 감당하면서 할 시간도 체력도 되지 않아서 많은 것들을 내려놓았다. 그러고 났더니 일을 할 공간이 생겼다. 나는 craft를 담당하는 선생님이었는데, 역시나 손을 움직여 뭔가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큰 희열을 느꼈다.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아이들이 나를 졸졸 따라다녔다. 함께 트리도 만들고 눈사람과 산타 모자도 만들었다. 나보다 창의적인 아이들을 보면서 참 많이도 배웠다. 원하는 걸 뚝딱 만들어주는 나를 아이들은 DIY Person이라고 부르며 참 좋아해 주었다.
이제서야 내 삶이 올바르게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학교에서 아이들과 있는 시간 동안은 마음이 참 편안했다. 한참 자퇴를 고민할 때 유튜브에서 우연히 수학을 가르치시는 선생님으로 유명한 정승제 선생님이 한 말이 떠올랐다. "내가 남들보다 이것만큼은 더 잘할 수 있겠다. 하는 게 재능이라고" 그게 나에겐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일인데, 좋아는 하지만 재능은 없었던 바이오를 하면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던 게 아닐까? 내가 석사를 온 이유도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늘 부족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더 배우고자 함이었는데, 이 재능 없음이 나를 이렇게도 힘들게 할 줄은 몰랐다.

참가비가 비쌌지만 나는 이제 돈을 버는 사람이므로 덴마크 크리스마스 전통 놀이인 Pakkeleg에도 참여해 보았다. 근사한 스테이크 요리도 먹고, 각자 준비해 온 선물을 제한 시간 내에 주사위를 굴려 나온 숫자대로 서로 뺏고 뺏다가 정착한 선물이 내 것이 된다. 다 뺏기면 선물을 하나도 못 받은 사람이 되기도 한다. 나는 운 좋게 선물을 3개나 받았는데 모두 다 마음에 드는 선물을 받아서 행복했다. 또 한 번 돈만 생각했다면 놓쳤을 이런 추억들을 이제라도 하나씩 챙길 수 있어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그때만 할 수 있는 경험과 추억을 돈으로 살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지불하는 게 나다.
모든 수업을 다 드롭해도 절대 놓고 싶지 않았던 유일한 수업인 푸드 이노베이션도 테이스팅 이벤트를 마치며 끝이 났다. 사워 도우를 발효시켜 미소를 만들기까지 정말 아무런 정보 없이 시작했던 우리는 3개월 만에 완제품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테이스팅 이벤트에 참여해 주었고, 호평을 받았다. 이 수업은 나에게 많은 것들을 가르쳐 주었다. 비현실적 이어 보였던 아이디어를 꿈꿀 용기, 수많은 회사들과 콘택트 하면서 아이디어를 발전시키는 대담함, 바쁜 스케줄 속에서 두 명씩 나눠서 매주 발효를 진행했던 우리의 팀워크, 시키지도 않은 테이스팅 이벤트까지 열어서 재미까지 챙기며 수업을 온전히 즐기는 이 친구들과 함께한 시간들은 정말 행운이었다. 내가 이 학교에서 배운 대부분의 지혜는 이 수업을 통해서 얻었다.
우리는 이 모든 과정을 4명이서 돌아가며 영어로 프레젠테이션을 했고, 너무나 당연하게도 모두가 만장일치로 12점 만점을 받았다. 12점 플러스 플러스!를 외치며 점수를 더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스위트한 교수님들과 끝까지 멋있어준 팀원들과 이 학교를 마무리할 수 있어서 참 감사했다. 그날 한 손엔 내가 만든 미소를 들고, 그간 가보고 싶었던 고급 진 생선 가게에서 연어와 관자를 사 와 초밥과 미소된장국을 만들어 먹으며 마지막 시험이 끝난 것을 자축했다. 오늘은 슬프지 않았다. 너무너무 열심히 했던 수업이기에 후회도 없고 배운 게 정말 많았기 때문이다. 다만 다음날 한국에서 있을 내 베프의 결혼식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조금 아쉬웠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다. 모두 다 가질 수는 없나 보다. 이렇게 나의 유학은 짧지만 굵게 끝이 났다.
그리고 이탈리아 친구네 집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면서 내가 그간 얼마나 사랑이 고팠는지 깨달았다. 덴마크에서 혼자 원룸에서 자취하면서 학교 가고 요리하고 자고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냈던 나였는데 식구가 30명은 족히 되는 대가족과 이탈리아에서 일주일을 보냈다. 나는 이곳에서 정말 많이 웃었다. 너무 웃어서 볼이 아플 지경으로 웃고 또 웃었다. 영어가 잘되지 않아 소통이 어려울지라도 손짓 발짓으로 온몸으로 표현하며 대화했다. (나중엔 내가 이탈리아어로 대화를 하고 있는 지경이었다.)

내가 어린 시절에 나 느꼈던 가족의 따뜻함과 이웃과의 소통이 로마에는 아직 남아있었다. 매일 아침과 저녁에 같은 테이블에 둘러앉아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했고, 친구들이 집에 놀러 오면 부모님을 포함한 모든 가족이 함께 어울려 재밌게 노는 광경이 꽤나 신선한 충격이었다. 내가 로마에 있는 한 나도 그 가족의 일원이었다. 사돈의 팔촌에 회사 동료들까지 내가 로마에서 있던 일주일 동안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면서 만났던 사람들은 50명은 족히 넘을 것이다. 나는 내향적인 사람이지만 사람들에게서 에너지를 얻는 mbti로 따지면 E와 I의 경계선에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자취를 처음 해보면서 모든 압박들을 오롯이 혼자 감당하면서 참 힘들었을 것 같다는 생각을 로마에 와서야 하게 되었다. 늘 가족이 많았고, 외국에 살 때도 룸메이트들이 있었는데 이번엔 혼자 집을 써서 더 외롭고 허전했던 거 같다. 덴마크에선 항상 내가 왜 이렇게 힘들고 외롭지?에 대한 질문이 끊이질 않았었는데 그 답을 이탈리아에서 찾았다.
이탈리아에서 덴마크로 돌아오던 날 비행기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나에게 엄청난 도파민을 주셨던 따스한 이탈리아 가족들이 너무 그리울 거 같아서. 그리고 우울하게만 끝날 줄 알았던 나의 유학이 행복으로 끝마칠 수 있게 해 주셔서. 너무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너에겐 이탈리아에 홈이 있다며 언제든지 돌아오라는 말과 함께 안아주었던 가족들을 뒤로하고 2025년의 마지막 날을 덴마크에서 또 혼자 보냈다. 하지만 이전처럼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마음이 사랑으로 가득 채워져서 그런가. 이탈리아에서 가족들이랑 옥상에서 신나게 방방 뛰어놀면서 불꽃놀이를 봤어도 좋았겠지만, 그래도 내가 힘든 와중에도 애정했던 덴마크에서 이 해의 끝을 보고 싶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따로 어딜 가지 않아도 어느 곳에서도 밤새 폭죽이 터지던 덴마크의 문화를 보지 못했을 테니까. 선택의 연속이었던 짧은 유학 기간 동안 나는 내가 무엇을 더 원하고 갖고 싶은지 끊임없이 고민해 나가며 나만의 길을 걸어왔던 것 같다. 그리고 비로소 5개월간 잃었던 미소를 되찾았다.
한국에 돌아가기까지 남은 2개월 동안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내가 좋아하는 가구 전시도 원 없이 보고. 내가 좋아했던 핀 율의 생가가 우리 집 근처였다는 소름 돋는 사실도 이제야 깨닫고 자전거를 타고 다녀왔던 날도 잊지 못한다. 너무 소름이 끼쳐서 감탄과 동시에 스산한 느낌마저 들었던 가구계의 거장의 집에 다녀온 날 가구를 해봐도 좋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한국에서 하는 가구 제작 학교에 지원했다. 그리고 그 충동적인 결정은 현재 디자이너가 된 나를 있게 했다.
덴마크에서처럼 똑같이 혼자 살고 혼자 생활비를 내면서 살았는데 서울에서 가구 학교를 다니는 5개월 동안 나는 참 행복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니까 외로울 틈도 없었다. 덴마크에서 인생에서 가장 바쁜 날들을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한국에 돌아와서 더 바쁜 시기를 보냈다. 가구 학교에서 주 5일 하루 8시간씩 톱질을 하면서 체력적으로 정말 힘들어서 병원에 입원을 하기도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가 너무 가고 싶을 정도로 재밌었다. 매일 내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고 아이디어를 내고 하면서 작품을 하나씩 만드는 과정이 너무 좋았다. 성과들이 바로바로 눈앞에서 보이니까 성취감이 더 컸던 거 같다. 바이오를 할 때는 늘 중간 과정만 반복하고 결과를 보려면 많은 시간이 드는데, 가구는 하루 만에 뚝딱 만들어지기도 하니까 성격 급한 나에겐 안성맞춤이었다.
평소에 배워보고 싶었던 주짓수도 배우고 유럽 곳곳을 여행하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생일 주간에는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해 매일 파티를 벌였다. 이탈리아에서 배운 것이다. 파티는 매일 해도 질리지 않는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도란도란 모여 앉아 식사를 하는 시간이 나는 참 좋다.
마지막까지 운 좋게 덴마크의 핼러윈이라는 파스텔라븐(Fastelavn)까지 즐기고 갈 수 있었다. 빵순이라 우연히 동네 빵집에 들러서 빵을 고르고 있었는데, 옆에 계시던 아주머니께서 이 빵은 지금 시즌에만 먹을 수 있는 거니까 이걸 추천해!라고 하셔서 구입한 빵이 파스텔라븐 볼러라고 부르는 이 축제를 위한 빵이었다. 안에 크림이 들은 페이스트리였는데 딸기 크림이 너무 생딸기 맛이 나서 먹자마자 머릿속에 폭죽이 터지는 맛이었다. 우연히 만난 사람 덕분에 새로운 걸 경험해 볼 수 있었다. 이런 이벤트들이 해외에 사는 재미이기 때문에 너무 감사했다.
그리고 또 우연히 친구의 초대로 참여한 러닝 클럽에서 그 파스텔라븐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다. 아이들이 우리나라로 치면 박 같은 오크 통을 방망이로 내려치면 그 오크통이 갈라지면서 안에서 캔디가 쏟아지는 시스템이다. 귀여운 코스튬을 차려입은 아이들이 겨우겨우 깨진 통 안에서 쏟아진 캔디를 주워 담으며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니 덩달아 행복해졌다. 이게 바로 내가 한국 가는 비행기를 타는 마지막 날에 일어난 일인데, 다시 한번 나는 얼마나 운이 좋은 사람인가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짧은 유학이었지만 누구보다 얻은 게 많은 알찬 유학이었다.
그동안 저의 고군분투 일기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비록 생각보다 빠르게 끝나버렸지만 저는 지금 한국에서 어느 때보다 행복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덴마크에 가지 않았다면, 학교생활이 잘 맞았다면 제가 가구를 시작할 수 없었을 거예요. 덴마크에서 방황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이렇게 된 덕분에 가구계의 거장인 덴마크로 제가 다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도 해봅니다. 수많은 흔들림 속에서 저만의 길을 찾는 과정을 함께해 주시고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이야기를 읽으며 누군가에겐 작은 힘이 되었길 바라면서 이 연재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