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체 방학을 마치고 어느 정도 충전이 됐다. 스타트업을 구상해 봐도 좋을 것 같다는 희망도 갖게 되었고, 내가 노력하면서 길을 찾다 보면 또 다른 길이 펼쳐질 것 같은 무언의 자신감도 생겼다. 이렇게 좋은 방향으로 생각을 바꾸니 진짜 좋은 일들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다.
학교 식당에서 우연히 한국어가 들렸다. “어, 이상하다. 우리 학교에 한국인은 나뿐인데?” 하면서 귀를 기울여 보니 학회를 온 한국인 단체였다. 뻔뻔하고 외로운 나는 냉큼 달려가 반갑다고 인사를 전했다. 한국의 연구소에서 학회 발표를 하러 오신 박사님들이 대부분이셨다. 또 하필 내가 말을 건 분은 바로 이 학교에서 포닥을 하신 분이셨다. 그래서 너무 반가워하며 내가 이 학교의 유일한 한국인이라 너무 반가워서 말을 걸었다고 말씀드렸더니 신기해하셨다. 물가가 비싼 나라라 보통 박사나 포닥으로 돈을 벌면서 학교를 다니지, 석사를 하러 오는 곳은 잘 아니라고 하셨다. 듣고 보니 그런 것 같다. 박사는 월급도 높고 3년 만에 무조건 졸업해야 하는 구조라서 박사 하기에 너무 좋은 나라라고 하셨다. 갑자기 내 돈 내산으로 석사를 하러 온 내가 바보 같아 보였다. 하지만 이미 온 걸 어쩌겠나. 그 박사님은 내가 안쓰러워 보였는지 내일 지금 이 학교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박사님을 소개해 준다고 하셨다. 학생은 없어도 박사 과정이나 일을 하고 계신 분들은 있었다니..! 약간의 희망이 보였다.
그 박사님은 학교에서 일하신다는 연구원님의 연락처를 내게 넘겨주셨고, 다음 날 우리는 학교 카페에서 셋이 만나서 커피를 한잔했다. 그 연구원님 역시 우리 학교에서 포닥을 한 후 계속 10년 넘게 일을 하셨다고 한다. 곧 영주권도 나온다고 하셨다. 포닥만 해보셔서 석사에 실험 수업이 없다는 사실과 한국인이 없다는 사실 모두에 충격을 받으셨다. 그리고 힘들 때마다 언제든 연락을 하라고 하셨다. 같은 연구실에 박사 과정으로 있는 한국 학생도 소개해 주셨다. 학교에 언제든 찾아갈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로 큰 위안이 되었다. 또 그분은 한국인 과학자 협회를 소개해 주시면서 가입할 것을 권유해 주셨다. 가입하고 얼마 후 한국인들끼리 모여 연구 주제 발표도 하고 한국 음식점에 가서 코리안 바비큐를 먹으면서 한국 사람들과 교류할 기회들이 생겼다. 이 작은 나라에 한국인이 이렇게 많았다니 충격적이기도 했다. (우리 학교에만 없었구나….) 한국 사람들과 한국말을 할 수 있고, 한국 음식을 먹을 수 있고,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소속감이라는 것을 드디어 느낄 수 있게 되어 감사했다.
첫날 헤드 교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운동도 시작했다. 학기 초에는 학교 동아리 무료 체험이 열리는 주간이므로 다양한 운동을 트라이해 봤다. 배드민턴도 해보고, 라틴 댄스도 해보고, 프리즈비 동아리도 시도해 보았다. 시원하게 내달리며 땀을 흠뻑 흘리고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니까 그간의 스트레스가 사악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비록 배드민턴은 인기가 많아서 가입 대기가 있었고, 프리즈비는 너무 재밌었으나 첫날부터 손가락을 다치는 바람에 등록을 포기했다. 하지만 운동을 시도했다는 자체로 의미가 있다. 운동은 신체 건강을 위해서도 있지만, 정신 건강을 위해서라도 놓치면 안 되는 부분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낀 날들이었다.
내가 이 학교를 다니면서 가장 많이 들은 단어는 바로 ‘Sustainability’다. 학교 안에 카페는 일회용 컵을 제공하지 않고 다회용 플라스틱 컵을 보증금을 받고 판매한 후, 다시 가져오면 보증금을 돌려주는 방식을 취할 정도이다. 학교 곳곳에는 일반 쓰레기통은 물론 플라스틱, 종이, 음식물 쓰레기까지 분리할 수 있도록 여러 종류의 쓰레기통이 한 번에 놓여 있다. 도서관에는 책을 빌려갈 때 쓰라고 에코백과 쇼핑백이 걸려 있다. 누구든 원하면 빌려 갔다가 다시 가져다 놓을 수 있다. 책도 웬만해서는 전자책으로 제공해서 학교 도서관에는 종이책이 거의 없다. 도서관은 그저 공부를 하는 공간일 뿐이다. 이만큼 우리 학교는 지속가능성에 진심이다.

나도 이곳에 와서 중고 가구를 무료로 나눔 받고 사용하면서 지속가능성과 환경에 대한 관심이 자연스럽게 높아졌다. 삼 남매 중 둘째로 태어나서 늘 언니한테 물려받는 게 싫었던 나는 한국에서는 중고 물건은 사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이 나라는 갓 태어난 아기에게도 중고 옷을 선물로 준다고 한다. 학교 친구들을 봐도 옷을 꿰매서 입는 애들이 대부분이며, 신발은 한 번 사면 평생 신는 거라고도 했다. 나도 물건을 오래 사용하는 편이긴 하지만 이 정도로 진심은 아니었던 터라 반성하고 또 반성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학교에서 열리는 환경 + 지속가능성 워크숍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이날의 주제는 어떻게 하면 CO2 배출을 줄일 수 있을까 하는 것에 대해 다양한 나라에서 모인 학생들끼리 토론도 하고, 패널도 만들고, 유리창에 자유롭게 메모하면서 다양한 의견을 주고받았다. 이때 나는 한국은 여름에 너무 더워서 에어컨을 켜지 않으면 정말로 생명에 위협을 줄 수도 있기에 실내에서는 항상 에어컨을 틀고 있는데, 유럽에서는 에어컨을 켜지 않아도 지낼 수 있는 정도라서 우리나라가 너무 CO2 배출을 많이 하고 있는 것 같아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했다. 그때 유럽 친구들은 그건 지리적으로 어쩔 수 없는 문제이고 우리가 여름 날씨에 더 유리한 것뿐이니 미안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며 나를 위로해 주었다. 그러면서 너무 더우면 주변의 다른 나라로 갈 수는 없는지 물었다. 유럽 친구들에게는 차를 타고 국경을 넘을 수 있는 다양한 나라의 옵션이 있지만, 우리나라는 북한으로 막혀 있어서 비행기를 타지 않으면 타국으로 갈 수 없다고 답했다. 일본이나 베트남처럼 우리나라보다 더 더운 나라들도 많아서 가봤자 소용이 없다고도 전했다. 유럽 친구들은 다소 신선한 충격을 받으며 북한을 통해서 갈 수는 없는 건지 물었다. 우리나라가 지금 유럽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핫하고 인기 있는 나라가 되긴 했지만 아직 갈 길이 먼 것 같다. 우리 학교 유일한 한국인인 내가 더 많이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던 재밌는 워크숍이었다.
최대한 일회용품 사용을 줄이고, 중고 물품을 활용하며, 대중교통 대신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것으로 나는 지금 충분히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을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렇게 환경에 관심을 가지고 워크숍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
오늘도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시간에는 나일론에 대한 워크숍 이야기를 들고 올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