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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과학자의 여정] 4화. 휴학, 입대, 제대, 그리고 복학
Bio통신원(히어로(필명))
P 공대는 2학년 때부터 비로소 전공과목을 배우게 된다. 나는 2학년 때 일반생물학, 일반생물실험, 유기화학, 세포생물학을 수강했고, 3-4학년 땐 생화학, 생화학실험, 분자생물학, 유전학, 생리학, 유전학, 면역학을 들었다. 1학년 때 수학, 물리, 화학의 삼단 콤보를 영어 원서로 소화해 낼 땐 주로 문제를 풀면서 개념이나 공식을 이해하는 방식이었다면, 전공과목은 수식을 이용하여 문제를 푸는 방식이 아니라 진득하게 매일 읽고 이해하는 방식이었다. 생물학을 과학의 인문학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 만했다. 그래서인지 당시 읽어나가는 교과서의 양은 엄청났다. 우린 소설도 아닌 두껍고 무거운 영어 책을 시간이 날 때마다 들고 다니며 읽어나가야 했다. 가만히 앉아서 졸지 않는 능력이 비상한 무기로 여겨지는 시기로 접어든 것이었다.
19동 205호 주민들, 그러니까 교주 형과 민수와 나는 2학년이 되면서 모두 19동을 탈출했는데, 19동은 모든 기숙사 동 중에서도 가장 실내 공간이 작기로 유명하여 일명 ‘닭장’이라는 별명까지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유일하게 19동만이 2층 침대를 사용하고 있었다. 교주 형은 2동으로, 민수와 나는 12동으로 이사를 했다. 우리뿐만이 아니었다. 한 기숙사 동에서 모든 동기들이 같이 살다가 각자가 신청한 기숙사 동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면서, 동기들끼리의 교류, 특히 자정이 넘어서야 오픈하는 19동 205호의 영업장은 자연스럽게 문을 닫게 되었다. 그 이후로도 멕시칸 아주머니는 여전히 19동 205호, 아니 나의 목소리를 기억하셨고, 우린 그 혜택을 누릴 수 있었지만, 아무래도 찾아오는 사람이 적어지다 보니 멕시칸 아저씨의 얼굴을 보는 횟수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바야흐로 신입생 딱지를 떼고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된 것이었다.
2학년 때 전공과목을 공부하면서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 배웠던 생물학은 수박 겉핥기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생물학을 전공하러 왔던 나조차 중고등학생 땐 생물학을 과학 과목 중에서도 가장 재미없어했으니 더 이상 설명을 안 해도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원리도 모르고 암기만 강요당했던 이유는 오로지 입시를 위해서였을 텐데, 그 아쉬운 시절들은 타임머신이 주어져도 돌아가고 싶지도 않을뿐더러 후학들에게도 결코 권하고 싶지 않은 순간들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교과서라고 편찬된 한 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암기해 내는 능력이 아니라 단 한 페이지를 배우더라도 원리와 개념에 입각하여 이유를 이해하고 충분한 질문과 토론을 거쳐 자기 것으로 만들 줄 아는 능력, 스스로 생각하고 답을 도출해 나가는 능력이라고 나는 여전히 믿는다.
입대를 위해 휴학하기 전까지 가장 좋아했던 과목은 세포생물학이었는데, 이 과목은 내가 생물학에 어쩌면 처음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로 작용했다. 처음으로 생명에 대한 경이가 생기게 되었던 것이다. 세포는 생체 내의 가장 작은 활동 단위로서 각 조직마다 그 조직에 특화된 다른 형태를 가지고 다른 기능을 담당한다는 사실, 그런데 이 모든 다양한 세포들이 수정란에서 분열과 분화를 거치면서 여전히 똑같은 DNA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세포 내부에서 센트럴 도그마에 의해 생산된 단백질이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공장과도 같다는 사실 등을 알게 되면서 나는 생명의 신비에 눈이 뜨게 되었다. 이때의 경험과 지식은 복학 후 빛을 발하게 될 나의 실험 능력에 지대한 영향을 주게 된다.한편, 나를 곤혹스럽게 만든 과목도 있었으니, 이름하여 유기화학이었다. 덕분에 탄소가 백 가지가 넘는 원소 중에서 얼마나 독특한 역할을 하는지, 탄소와 수소, 산소, 질소와의 결합이 생체 내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되어 나중에 생화학을 배울 때에도 큰 도움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유기화학은 나에게는 높은 장벽과도 같았다. 연습문제를 풀 때마다 원리를 어느 정도 이해했다고 생각했음에도 늘 오답을 내놓곤 했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이 유기화학은 두 학기에 걸쳐 배우게 되었고, 그중 하나는 일반물리에 이어 재수강할 수밖에 없는 학점을 받기도 했기 때문에 나에겐 지금도 그다지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다행인 것은, 아니 이걸 다행이라고 말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유기화학의 깊은 늪에서 나와 함께 헤매던 동지가 있었으니 바로 교주 형이었다. 우린 재수강 동기가 되었다. 역시 나는 교주 형이 좋았다. 의리의 사나이로 내 기억에 남아 있다. 반면, 민수는 달랐다. 동기들 중에서도 늘 상위권 성적을 유지했고, 늘 같이 먹고 노래방 가서 노래하며 놀았음에도 시험 당일 새벽에는 귀신 같이 일어나 날카로운 눈빛을 발하며 공부에 전념을 했다. 그리곤 언제나처럼 A+는 아니더라도 A0나 A-를 받아냈다. 교주 형과 내가 간신히 학사경고를 면하던 것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말로만 듣던 천재라는 인간이 우리 바로 옆에 있었던 것이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나는 민수를 친구로서 좋아하고 예비학자로서는 존경하게 되었다. 분명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큰 인물이 될 거라고 나는 의심하지 않고 믿게 되었다. 그리고 이 믿음은 머지않아 현실이 된다.
3학년 1학기에 접어들면서 나는 지친 것 같았다. 학문을 계속해야 하는지, P 공대생으로 내가 적합한지, 이 똑똑한 녀석들과 경쟁을 계속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1998년 봄, 19명의 남자 동기들 중 벌써 3명은 입대를 한 상태였다. 결국 나도 그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그때 나는 아마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의 정체성에 대해 진지하게 질문을 던졌던 것 같다. 그러나 답을 찾을 수 없었다.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이대로 계속 공부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 나중에 민수가 거치게 될 박사특례 제도로 나도 입대를 하지 않을 수 있었지만, 그 당시 나에겐 휴지기가 필요한 것 같았다. 그래서 휴학을 결심하고 입대를 결정한다.
1998년 가을이었다. 집으로 배송된 영장을 보니 ‘의정부 306 보충대’라고 아주 성의 없게 타이핑된 엽서였다. 난 당연히 ‘논산 훈련소’가 적혀 있을 줄 알았다. 내 주위에선 모두 논산으로 징집되었기 때문이다. 아마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내 군생활이 꼬이기 시작했던 건. 대학교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그 해 9월. 머리를 빡빡 깎고 난 부모님과 함께 의정부를 향했다. 그 당시 의정부는 내 생애에서 가본 한반도 최북단의 장소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최북단’이란 단어를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지만 말이다. 의정부 306 보충대에서 난 더 분류되어 며칠 만에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 대광리에 위치한 훈련소에 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대광리로 말하자면, 의정부에서 차를 타고 2시간 정도 더 북쪽으로 가야 나오는 곳이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6주간의 훈련소 생활이 끝나고 난 한 술 더 떠서, 더욱 북쪽으로 가게 된다. 내가 자대 배치를 받은 곳은 민간인이 들어가지 못하는 민통선, 그러니까 ‘민간인 출입 통제선’ 안쪽에 위치한 곳이었다. DMZ (비무장지대)를 철책 하나를 두고 경계 근무를 서는 GOP 부대로 배치를 받게 된 것이었다. 부산이라는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태어나 평생을 살다가, 약간 북쪽에 위치한 포항이란 시골에서 또 3년 반을 살다가, 대한민국 국민 중 아주 적은 수의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는, 진정 ‘최북단’에 가게 된 것이었다.
대광리에서 6주간의 신병 훈련이 끝날 무렵이었다. 교관 중 하나가 자대 배치 건으로 모든 훈련병들 앞에서 말했다. "서울대 나와!" 내 기억엔 한두 명인가 조용히 걸어 나갔던 걸로 기억한다. 그다음이었다. "연세대나 고려대 나와!" 또 몇 명이 앞으로 나갔다. 대통령 훈장 받는 것도 아닌데, 그들은 굉장히 자랑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앉아 있던 모두가 그 호출의 의미를 알기 때문이었다. 좀 학벌이 되는, 소위 공부 잘한 놈들은 행정병으로, 그것도 학벌에 따라 더 상급 부대로 배치를 받게 되어 남은 군생활을 군인이 아닌 듯 군인으로 편하게 보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난 기다렸다. 당연하다는 듯이 그다음은 교관이 “P 공대 나와!"라고 말할 줄 알았던 것이다. 서울대야 그렇다 쳐도 연고대보다 먼저 불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굉장히 못마땅해하면서 말이다 (그 당시 P 공대 애들이 갖는 피해의식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 이상 호출은 없었다. 다음 일정이 진행되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나는 손을 들고 이렇게 물어보고 싶었다. “P 공대는요?" 아니, P 공대는 왜 안 부르시지 말입니까?,라고 했어야 했나. 아무튼 나는 진짜로 망설였다. 그러나 끝내 침묵을 지켰다. 혹시 까먹고 내일이라도 다시 부를 수 있을 거라는 가망 없는 희망을 갖고서.
중학교 때부터 안경을 쓰기 시작했지만, 시력이 그다지 나쁘지는 않았다. 훈련받을 때 땀도 많이 나고 안경 때문에 불편할 때가 많은 데다, 뭐 자세히 보고 멀리 볼 필요가 없는 훈련을 받는 날이면 난 안경을 굳이 쓰지 않았다. 어느 날이었다. 자대 배치를 받기 위해 어디에선가 대기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날도 난 안경을 쓰지 않았다. 수색대원을 차출한다고 또 다른 교관들이 찾아온 날이었다 (수색대원이라 함은 GOP보다도 더 북쪽, 그러니까 GP까지 관할하고 DMZ를 수색하는 군인들이며 신체가 A급이어야 될 수 있다).
내무반에 각 잡고 앉아 있는 우리를 둘러보더니 몇 명을 지명했고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뿔싸. 순간 머리가 재빨리 돌아갔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안경 좀 쓰겠습니다!" 시력이 안 좋냐고 물어봤다. 안경 안 쓰면 생활이 불편하냐고 물어봤다.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교관은 그냥 자리에 가서 앉으라고 했다. 안경 쓴다는 것이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난 그날 좀 많이 나 자신에게 쪽 팔렸다. 왠지 불의를 행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떳떳하지 못하고 당당하지 못했다는, 왠지 모를 자책감이 몰려왔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휴,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는 나를 발견했다.
그렇게 해서 난 남들 다 쓰는 ‘P 공대’라는 간판을 써먹지도 못했고, 또 신체가 건강하다는 이유만으로 수색대원까지 될 뻔한 위기를 간신히 넘기며 GOP 부대, 그중에서도 한 번 들어가면 휠체어를 타고 나온다는 열쇠 부대, 5사단 27연대 3대대 10중대 1소대로 자대 배치가 되었다. 난 소총수였다. 일빵빵, 땅개였다. 상대적 박탈감이겠지만, 어쨌거나 굉장히 억울했다. 내 친구들은 모두 P 공대 간판이나 생명과학과 덕을 보고 대부분 의무병이나 행정병으로 뽑혔다는데, 유독 나만 철책 땅개로 배치가 되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아, 그땐 정말 지옥에라도 떨어진다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나는 인생의 다채로움과 깊이를 경험하게 된다. 물론 강제적이었지만 말이다.
먼지 풀풀 날리는 육공 트럭을 타고 중대 본부에 도착하니 깜깜한 밤이었다. 내무반으로 들어가니 반쯤 미쳐 보이는 병장들이 깔깔이를 입거나 소시지 체육복을 입고 나를 반겼다. 각 잡고 앉아 있으려니 편하게 앉으라고 했고, 눈치를 채고 "아닙니다!"라고 하면 벌써부터 말 안 듣는다고 성질을 부렸고, 또 시키는 대로 하면 행동대장인 상병 이름을 불렀다. 그러면 그 상병은 기회를 잡았다는 듯 굉장히 위협적으로 욕과 함께 내게 기합을 줬다. 벌써부터 빠졌대나 뭐래나. 이래도 저래도, 어떻게 해도 당할 수밖에 없는 그 상황, 아, 난 태어나서 그런 분위기는 처음이었다. 미칠 것만 같았다.
1소대 4분대로 배치가 되었다. 군대 가기 전에는 거의 울어본 적이 없는 것을 은근 자랑거리로 삼던 나였다. 그러나 난 매주 일요일마다 초코파이를 주는 교회에 가서 펑펑 울어댄다. 하나님이 날 버리신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P 공대를 아는 놈이 거기 있었던 것이다. 성균관대인가 어딘가를 다니다가 입대했다고 했다. 그 일병 놈이 무식한 병장에게 한 P 공대에 대한 설명으로 인해 난 그날 그 시간부터 오로지 갈굼의 대상이 되었다. 다른 이유가 필요 없었다. P 공대 다닌다는 사실 하나로 영문도 모른 체 난 고문을 당해야만 했다. 맞기도 했고, 간식이나 밥을 주어진 양보다 두 세배로 다 먹어 치워야만 했다. 백일 휴가 나올 때 난 몸무게가 90킬로그램을 육박했다. 거의 10킬로그램 이상 찐 것이다. 부산 집에 도착하니 부모님이 날 보자마자 우셨다. 속상했다.
상상이 가는가. 내가 백일 휴가 복귀 때 느꼈던 그 복잡한 심정을? 거울을 보며 내가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정말 혼란스러웠다. 내가 믿는 하나님도 그냥 날 방관하고만 계신 것 같았고, 그 사람들이랑 함께 2년 정도를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숨이 턱 막혔다. 휴가 복귀하지 않고 자살하거나 탈영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입대하기 전에는 자랑거리로 여기던 것들이 고문과 학대를 받는 이유로 작용한다는 사실이 나로선 정말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거울의 반대면에 있는 세계로 온 것 같았다. 모든 가치 기준이 거꾸로 된 그런 세상.
입대 전 내가 살던 세계에서는 공부 잘한다는 사실이 언제나 긍정적인 의미를 가졌고 칭찬과 존경의 이유가 되었다. 특히 학생 신분이라면, 그건 마치 최고의 학생이라는 의미까지도 부여되곤 했었다. 그러나 내가 배치받은 군대는 반대였던 것이다. 논리/합리/이성적인 것들은 모두 교만하고 거만하고 질서를 파괴하는 주적으로 대우받는 듯했다. 그런 것들보다는 그 작디작은 세상에서의 경험, 즉 짬밥만이 가장 크고 위대한, 아니 유일한 가치 판단의 기준인 듯했던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그런 현실 같지 않은 현실은 몇 달 후 끝나게 된다. 내게는 가끔, 심각한 문제가 나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벌어진 어떤 위기로 인해 해결이 되곤 하는데, 그때도 그랬다.
어느 날이었다. 소대 전체가 벌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 상황병 한 명만 남겨두고 소대장을 포함한 모든 소대원이 완전군장에 총까지 메고 급속 행군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20킬로그램이 넘는 무게를 짊어지고 우린 열을 맞추어 뛰기 시작했다. 날이 더워서 그랬는지 한 두 명씩 픽픽 쓰러졌다. 절반 정도가 그 급속행군을 끝마치기 전에 낙오했다. 낙오자 중엔 이등병은 물론이며, 일병, 상병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병장은 모두 살아남았다. 정말 신기했다. 내무반에서 매일 미친 짓을 하는 그 실없는 인간들이 그 순간 굉장히 위대하게 보였다. 눈은 빛나고 있었으며 어느새 리더의 위치에서 소대원을 챙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알았다. 짬밥의 힘을. 그 자존심을). 그러나 난 살아남았었다. 살이 붙었지만 여전히 체력은 좋았고, 사실 그것보단 오기였다. 살아남으려는 의지였다. 낙오하면 사람은 의무병 트럭에 실려갈 수 있지만, 그 낙오자가 짊어졌던 군장은 살아남은 소대원들이 책임져야 했다. 나 역시 살아남은 병장, 상병들과 함께 낙오자들의 군장을 나눠서 짊어졌다. 곧 급속행군을 중단하라는 명령을 받고 소대원 모두가 멈췄다. 살아남은 자들의 모임이었다. 이등병이었던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순간 그렇게 날 갈구던 병장들과 상병들의 눈에서 뭔가 변화를 알아챌 수 있었다. 나를 말없이 바라보는 눈이 평소와 달랐다. 무언의 인정 같은, 드디어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합격선을 통과한 듯한 느낌이었다.
그렇다. 난 그들의 세계에서 그들만의 방식으로 정정당당하게 인정받은 것이었다. 그날 이후 갈굼은 끝이 났다. 난 화장실로 가서 몰래 눈물을 훔쳤다. 대학 합격했을 때보다 몇십 배는 더 큰 기쁨이었다. 그 ‘위대한 인정’을 받은 후 나의 입지는 현격히 달라졌다. 모든 게 그대로였으나, 모든 게 바뀐 것 같았다. 나 빼고 모두가 약에 취한 것 같기도 했고, 영혼이 다른 사람으로 바뀐 것 같기도 했다. 정말 인생은 모를 일이다. 위기가 기회가 되기도 하고, 기회가 위기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인간인 우리는 그것을 예측할 수도 없고 조절할 수도 없다. 난 그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잘 모르겠다.
내무반에서나 훈련 중 5분간, 10분간 휴식할 때면 선임들은 보통 노가리를 깐다. 그럴 때마다 어떤 해결되지 않는 말싸움이 생기면, 그들은 그날 이후로 거의 항상 나를 불렀다. 종종걸음으로 그들에게 다가가면, 내게 대뜸 묻곤 했다. 어떤 게 맞냐고, 도대체 이건 뭐냐고. 솔직히 대부분은 어이가 없는, 그러니까 많은 지식이 필요 없고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는 논쟁 같지도 않은 논쟁이었지만, 그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내가 아는 선에서 진지한 표정을 짓고 정중히 대답을 하는 것밖엔 없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내 대답이 그들에게 있어선 곧 판사의 판결과도 같이 받아들여진다는 것이었다. “XX, 봐, 내가 뭐랬어? 영웅이가 맞대잖아!” ㅎㅎㅎ 내 말은 모든 말싸움과 논쟁을 종결시켰고, 난 졸지에 소대의 판결자가 되었다. 거의 고문관과 같은 레벨에서 병장과 상병들의 말이 틀렸는지 맞는지 판결하는 레벨로 수직상승했던 것이다. 이럴 수가! ㅋㅋㅋ 그렇게 매번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내 맘대로 대답을 하면서도 판사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게 정말 얼마나 웃겼는지 모른다. 인간이란 정말.
그들이 날 갈궜던 이유는 별 다른 게 아니었다. 그들의 피해의식이었고, 열등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들만의 그 작은 세상에서도 남을 지배하고 군림하며 자기 맘대로 하고 싶어 하는 우리 인간의 민낯이기도 했다. 그들의 문제도, 구조적 문제도 아니었고, 다만 인간의 문제였다. 그래서 군대는 사람이 바뀌어도 사람이 없어지지 않는 이상 바뀌지 않는 것이다. 혼자 살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함께 살면 지배와 군림의 문제가 반드시 등장하게 되어 있는 존재가 인간이 아닌가 싶다. 공자는 논어에서 세 사람이 모인 곳엔 언제나 스승이 있다고 했지만, 현실적으로 그 말을 바꾸자면, 차라리 세 사람이 모인 곳엔 지배자? 군림자? 갑? 이 존재한다고 말해야 될 것 같기도 하다. 그게 인간의 속성을 좀 더 잘 표현하는 것 같아서다.
그들의 세계로 깊이 들어가게 되면서 난 점점 그들 중 하나가 되어갔다. 그러면서 그들의 출신과 성장 배경을 알게 되었는데, 다는 아닐지라도 난 그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 중엔 창녀촌의 포주도 해봤다는 자도 있었고, 나이트에서 근무하며 여자들과 많이 놀아본 것을 훈장처럼 여기는 자도 있었으며, 사기도 쳐 보고 많은 여자들과 밤을 함께 보낸 경험을 영웅담 얘기하듯 말하는 자도 있었다. 대학은커녕 교육이라곤 거의 받아본 적이 없어 교육과는 전혀 상관없는 직종에 있다가 온 사람들이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그들은 제대를 하게 되면 다시 그 직종으로 돌아가든지, 아니면 굉장히 미래가 불투명한 자들이었던 것이다 (적어도 나는 제대하면 P 대학 생명과학과 3학년 2학기로 복학하면 되었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군대에서 그렇게 병장질, 상병질하는 것이 얼마나 큰 희열이었을까 생각해 보면 숙연해질 정도였다. 그들에게 비친 내 모습은 그저 편하게 공부만 하다가 세상 이치를 하나도 모르면서도 그들을 가르치려고 갑질하는 재수 없는 놈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나보다 훨씬 더 많이 지혜롭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했던 행동들이 내가 어이없이 당했던 숱한 일들이었던 셈이다. 그들이 이해가 됐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었다. 정의와 불의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 사람들이, 내가 전에는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생각보다 굉장히 많다는 걸 직접 보고 체험하면서 인정하게 된 계기였다. 나아가, 정해진 시간이 지나고 제대를 하게 되고 공부를 하며 학위를 취득하다 보면, 또 내가 언제 그들과 같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인가 생각해 보니 그 시간이 갑자기 굉장히 귀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들만의 방식으로 그들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은 내겐 인생 전체를 놓고 봤을 때에도 실로 굉장한 의미를 가진다. 자신이 잘한다고 믿고 있는 것들도 어떤 다른 관점에서는 다르게 판단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뭐 하나 잘한다고 스스로 교만한 사람들은 정말이지 얼마나 위험한가 싶다. 그 하나가 그 세계에서는 일종의 언어와도 같은 것이다. 어찌 보면 난 공부 잘함과 좋은 대학 간판을 가지고 특권을 누리고 싶어 했던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합법적인 새치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일종의 갑질을 하는 존재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한 세계의 한 언어만 잘했다고 모든 세계에서 그것이 먹힐 거라고 자신만만하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이 얼마나 어리석고 가엾은 인간이었단 말인가!
제대한 지 23년이나 지난 지금 다시 생각해 본다. 누군가가 기획하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해석하며 그 기획자의 존재를 신으로 본다면 신의 계획이라고 믿을 수 있을 것이며, 아예 첨부터 신의 존재를 거부하고 그저 모든 인간사를 랜덤으로 규정한 다음 확률론적으로만 해석을 한다면 운명의 장난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엔 과학적이거나 논리적인, 누구라도 부정할 수 없는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A나 B라고 단정할 순 없을 것이다. 어쨌거나 나는 내게 닥쳐온 그 2년 2개월의 시간을 잘 버텨냈고 나름대로의 교훈을 얻게 되었다. 이후 이 시절의 경험은 나에게 타자와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고, 힘든 시기도 버텨낼 수 있는 힘이 되어 주었다. 나는 제대 후 다음 해에 3학년 2학기로 복학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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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의사생활’의 패러디라고 볼 수 있겠지만, 그것이 담아내지 못하는, 아니 어쩌면 그것이 담을 수 없었던 이야기가 있다고 생각했다. 많은 부분은 의사라는 직업이, 특히 한국에서, 갖는 독특한 위상 때문이지 않을까 한다. 의사는 베이비붐 세대 이전부터 Z세대에 이르기까지 실질적인 부와 명예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직업이며, 시대를 초월하여 누구에게나 특권층으로 여겨질 만큼 선망의 대상이 되어왔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이 많은 감동과 공감을 불러일으켜 성황리에 막을 내렸지만, 그 성공의 비결 중 하나는 주인공들의 직업이 의사였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의사를 선망하면서도 의사가 되지 못한 우리들은 의사의 삶이 궁금했던 것이다. 우리와 다를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문제로 고민하고, 그들도 가정의 불화로 가슴 졸이며, 그들도 인간관계 때문에 속상해하는 등 결국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드라마를 통해 확인함으로써 잠시나마 그들과 연대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과학자라는 직업은 아이들의 ‘장래 희망란’에서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그도 그럴 것이, 과학자들, 그중에서도 특별히 기초과학자들의 사회적 대우와 인식이 과거에 비해 현저히 낮아지기도 했다.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평균 연봉만 따져도 적게는 두 배, 많게는 열 배 이상의 차이가 난다. 의사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들여 공부와 연구의 끈을 놓지 않고 사회생활을 시작했는데도 말이다. 설상가상으로 과학자의 경우, 연봉을 받을 수 있는 자리에 오르기까지 훈련받는 기간은 의사의 그것보다 일반적으로 훨씬 더 길며, 훈련을 마치는 시기도 정해지지 않아 평생 불안정한 상태에서 직업 생활을 해야 하는 상황도 심심찮게 벌어진다. 우리 중 많은 이들은 다른 이름으로 불릴 뿐 평생 계약직 훈련생의 신분으로 살아가고 있다. 의사의 경우, 의대만 나와도 개업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고, 레지던트 생활을 마치면 전문의로서 더 큰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과학자들의 상황과 극명한 대비를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과학자들은 박사 학위를 힘겹게 취득했다 할지라도 (생물학의 경우 보통 6년 정도 소요된다), 박사 후 연구원이라는 고되고 불안정한 과정을 견뎌내야 비로소 한 실험실을 책임지는 자리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놀라운 사실은 그렇게 힘들고 긴 기간을 거쳐 실험실 보스가 된다 하더라도 연구비 획득과 학생 및 연구원 고용 문제에 부딪혀하고자 했던 연구를 수행하기가 극히 어렵다는 것이다. 박사과정을 시작한 이후 10년에서 20년 정도 후에 겨우 조교수가 되었는데, 그마저도 불안정해서 본인은 물론 어느새 생겨난 가족들에게 죄책감을 느낄 정도로 고생의 길을 걷게 되는 경우가 왕왕 벌어지고 있다는 게 오늘날의 서글픈 현실이다. 이 글은 20세기말에 대학에 들어가 21세기 초에 대학원 생활을 하며 간신히 박사 학위를 취득한, 지금도 여전히 과학계에서 손을 떼지 못한 채 과학자라는 직업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와 동고동락하며 꽃다운 20대 후반을 함께 보낸 동료들의 이야기다. 모두 의사가 될 수 있었으나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기초과학에 몸을 싣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묵묵히 한국 기초과학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생물학자들의 이야기다. 그들은 현재 모두 가정을 가졌으며 모두 한 아이에서 세 아이의 엄마 아빠가 되어 있다. 많은 이야기들은 실제 있었던 사건에 기반한다. 그러나 절반 정도는 개연성 있는 허구를 동원해 각색을 가했다. 등장인물의 이름은 모두 가명이며, 경우에 따라 두세 인물의 캐릭터를 한 인물 속으로 압축시킨 경우도 있고, 몇몇 인물은 현실엔 존재하지 않았던 인물이다. 기본적인 장소는 포항공대이지만, 그곳의 위치와 시설 등의 세부사항은 허구를 동반한다. 자, 우리들의 철없던 대학원생 시절의 이야기, 돌이켜보면 별 것 아닌 것들로 가슴 아파하고 상처받던 시절의 이야기, 그 와중에 밤을 새며 실험에 매진하던 시절의 이야기, 그 열정과 낭만의 이야기를 이제 시작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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