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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 제약업계 직장인의 고군분투] 비대면 시대, 영어 듣기는 경쟁력이다
Bio통신원(김루이(필명))
글로벌 회사에 입사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당시, 나는 미국 본사와의 TC (teleconference)에 대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 지금은 주로 화상회의를 하는데, 당시에는 “다자간 전화”로 회의를 했었다. 화상회의 프로그램이 있긴 했으나, 코로나 전이라서, 보편화가 안되었었다. (어휴~ 옛날사람~~)
TC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영어 듣기 능력”이다. 뭘 알아들어야 말을 할 수가 있지 않겠는가? 나는 학생 때도, 토익 시험의 “듣기”는 아무리 노력해도 늘지가 않았다. 그래서 토익 점수를 많이 올릴 수가 없었다. 900점대인 사람들 정말 존경한다. 내 귀는 정말 “막귀” 임이 분명하다.
사실 듣기 능력이 떨어지는 것은, 타고난 DNA인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 집에 오는 전화를 받지 못했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이 나는데, 전화가 오면 울음이 쏟아졌고, 온 집안을 돌아다니며, 전화받을 사람을 찾아다녔다. 어린 마음에, ‘혹시 내가 전화를 받았다가, 수화기 너머에 있는, 저쪽 상대방의 말을 못 알아들으면 어떡하지?’라는 두려움이 컸었다. 이런 나의 성격은 회사 생활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TC에 참석할수록 나의 막귀는 나를 점점 바보로 만들었다. 어쨌든 이 산을 넘어야 하는데, 듣기 능력 향상을 위해, 맨 처음 시도한 것은 회의를 녹음해서 replay 하는 것이었다. 이 방법은 상당히 효과가 있었다. 혹시 같은 문제로 고민하시는 분이 있다면 개인적으로 완전 강추다. 이 방법을 통해서, 원어민인 부서장님의 말을 이해하게 되었고, 각자의 나라에서 회의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이름과 목소리를 구분을 할 수 있게 되었으며, 회의 내용도 이해하게 되었다.
그런데, 매번 1시간 분량의 회의를 반복해서 듣는 것은, 상당히 노동 집약적인 일이었다. 이렇게 해서는 업무 효율이 너무 떨어졌다. 이를 위해 매일 야근을 할 수도 없는 일 아닌가? 뭔가 대책이 필요했으나,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TC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상대방과 주로 이메일을 왔다 갔다 하면서, 읽기와 쓰기로 소통하려고 했고, 전화는 웬만하면 안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던 중! 일이 생겼다!
급하게 사내 인트라넷을 통해 과제 예산을 올려야 하는데, 계속 에러가 떴다. 어느 한 단계에서 멈춰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질 않는다. 사용 매뉴얼이 있었는데, 이게 책 한 권이다. 매뉴얼을 아무리 뒤져봐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 다른 PM들에게 물어봤는데, 다들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나에게 한마디를 던졌다.
“미국 본사 IT 서비스센터에 물어봐.”
‘그래, 그게 답이지. 나도 모르는 바가 아니다.’
일단, 본사 서비스 센터에 이메일을 써서, 나의 문제를 호소해 보았다. 얼마 후, 아주 친절한 답변이 왔는데, 요즘 아시아 쪽에 자주 생기는 에러이니, 아시아 IT 담당자의 연락처를 주면서 이곳과 해결을 하라고 했다. 나는 다시 그 직원에게 메일을 썼다. 그랬더니, 또 아주 친절한 답변이 왔다. 몇 월 며칠 몇 시에서 몇 시 사이에 자기에게 전화를 하라는 것이다.
올 것이 왔구나!
마음의 준비를 하고, 그날 그 시간에 전화번호를 눌렀다.
그쪽에서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 들렸다.
“Hello. This is OOO in IT Center.”
나는 천천히 말했다.
“Hello. This is KIM in Korea. I sent you the email regarding the intranet problem. I’m blocked in the approval step for project budget process.”
이제 그의 대답을 들을 차례다. 그 순간, 내 몸에 존재하는 모든 신경은 나의 오른쪽 귀를 향했다. 무.한.대.의 초.집.중. 모드로 “영어를 알.아.들.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오른쪽 귀로 피가 쏠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초집중하여, 귀를 최대한 열고 들으니, 아. 이게 왠일 인가, 그의 말이 귀에 들어왔다.
영.어.가. 들. 렸. 다.
막.귀.가. 뚫. 렸. 다.
나는 전화를 끊고, 신비로운 체험을 한 사람처럼, 내 영혼에 신의 축복이 내린 사람처럼, 그 자리에 한참 동안 앉아, 그 희열을 온몸으로 만끽했다. ‘하하하, 나는 이제 막귀가 아니다~~.’
그 한 번의 성공은 나를 상당히 변화시켰다. 내 문제를 스스로 해결했다는 자신감으로 오랜만에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러던 어느 날!
본사의 과제 담당 Christine과 영국 지사의 Adam이 과제 일정을 체크해야 한다면서 TC를 요청하였다. 현재 수립된 일정에 문제가 있어서, 다시 세팅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연 사유 점검 및 합리적 일정 재설정이 Agenda였다. 나는 메일로 이런저런 설명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들이 이미 미팅이 잡아 버렸고, 나에게 invite 메일이 왔다. 그리고 내 캘린더에도 버젓이 미팅이 세팅되었다.
나 혼자 들어가는 TC 라니.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벌써부터 겁이 난다.
미팅 날짜는 어김없이 찾아왔다.
드디어, 미팅 시간. 나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 번호를 눌렀다.
그리고 참여를 위해 #을 누른 후, 스피커에 조심스레 말했다.
“Hello. This is OO Kim in Korea R&D center is online.”
저쪽에서 하는 말이 들린다.
“Hi. This is Christine in R&D headquarter in US is online.”
“Hi, Christine. Hi Kim. This is Adam in UK is online”
지금부터 초.집.중. 모드. 이것이 내가 습득한 유일한 듣기 방법이다.
나는 완벽하진 않지만, 그럭저럭 소통이 되었다. 중간에 Adam의 어떤 질문을 못 알아들어서, Christine 이 나에게 다시 설명을 해주었다. 어쨌든, 원하는 대로 과제별로 일정을 다시 세팅하고 회의는 무사히 끝났다. 이 글로벌 회사의 본사 직원들은 전반적으로 친절했다. 그들끼리 나를 위해서 소통하고 알려주기까지 하다니. Adam의 영국 악센트는 나에게 숙제를 남겨주었다. 어쨌든, TC를 혼자 들어가서, 회의를 커버했던 이 경험은, 나에게 또 한 번 “영어 듣기” 성공의 경험을 안겨주었다.
그렇게, 직장 생활은 하루하루 지나갔다.
그리고, 시간은 쏜 살 같이 흘러갔다.
어느덧 그로부터 5년 후.
그동안 나는 로컬 회사 연구소로 이직했고, 글로벌 사업부와 소통하는 역할을 자주 맡게 되었다.
회사에서는 임상시험이나 공장 생산을 해외 선진국에서 수행할 계획이 있어서, 공동협력자가 필요했다. 국제 전시회나 박람회에 참석 후, 돌아오면 후속 작업으로 회사들의 컨택이 진행된다. 그중 미국의 유명 제약 회사로부터, 우리와 협력을 하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를 추진하기 위해서 “글로벌 화상회의”가 세팅되었다!
그 미국 회사 측에서는 R&D head 와 R&D team 이 참석할 예정이고, 참석자 명단을 보니 6명이었다. 우리측 참석자는 연구소 3명, 글로벌사업부 2명 이렇게 5명이다.
담담히 출근을 하였고, 우리는 5명이 모여서 시작 시간 15분 전에 마이크로소프트 팀즈를 켰다. 지구 반대편의 접속자가 한사람 한사람 들어왔다. 첫 만남이니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했다. 역시 영어식 자기소개는 참 길다. 학교 공부는 뭐 했고 학위는 뭘 했고 회사에서는 뭘 했는지 각자 본인의 히스토리를 요약한다. 나는 이미 여러 번 경험이 있어서, 이런 자기소개에 익숙하다. 누가 옆구리 툭 치면, 자동으로 ON 이 되어 나올 정도이다.
화상 미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이미 여기저기서 같은 내용을 발표했기 때문에, 영어가 머리에서 나오기보다는, 입에서 나오는 느낌이었다. 어쨌든 최대한 잘 설명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진심을 다하는 연구자의 모습을 보이고자 했다.
QnA 세션!. 사실 화상회의에서는 이것이 더 중요하다.
나는 스피커를 귀에 대고, 초.집.중. 모드로 태세 전환을 했다. 질문자와 최대한 주파수(?)를 맞추려고 노력했고, 그의 질문에 몰입했다.
“This reaction ~~~return~~~” 라고 들렸다. 순간적으로, 이 반응이 왔다 갔다 하느냐고 물어보는 거구나. 바로 알아차렸다.
나는 대답했다.
“This reaction is irreversible.”
질문은 이어졌다.
“~~~Endotoxin test ~~~?” ‘엔도톡신 시험을 했느냐고 물어보는구나. 주사제라서 이걸 물어보네. 아직 안 했는데…’
그래서 이렇게 대답했다.
“We haven’t done it yet, but we plan to test the endotoxin after a sterilization.”
이런 식으로 키워드를 catch 해서 적절한 답변을 했다. 미국 사람들은 역시 질문이 많다. 대부분의 질문을 이해했고, 대답했으나, 한 가지 질문은 이해를 못 했다. 나는 유연하게 이메일로 보내주시면 답을 드리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한 시간 반 정도의 미팅이 지나고, 아주 좋은 분위기에서 끝이 났다. 이후에 우리는 MOA를 맺게 되었다. 글로벌 미팅은 성과로 바로 이어져서 할 때마다 보람을 느낀다.
사실 영어 듣기 능력을 향상시키고자, 나는 요즘에도 주말에 1시간 정도 미드를 본다. 처음에는 모든 대사를 알아들어야겠다고 마음먹고, 영어 자막을 틀고 보고, 자막 없이 보고, 들릴 때까지 보고, 별 짓을 다했는데, 이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배우마다 말하는 스타일이 다르고, 캐릭터를 위해 발음을 뭉개 버리기도 하고, 예술적 영역이다 보니, 일상생활에서 잘 안 쓰는 표현도 있고, 시적인 은유들도 많고, 과장된 표현들도 많기 때문이다.
이제는 접근 방법을 좀 바꾸었다. ‘미국 사람들은 노래로 대화를 한다’라는 관점으로 접근한다. 그들은 노래를 조용히 읊조리다가, 강조하고자 하는 단어들에 “강세”를 주는데, 나는 그것을 빨리 캐치 해서 맥락을 이해하도록 노력한다. “대화”가 “가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단순히 읊조리는 부분은 안 들릴 수 있고, 굳이 안 들어도 된다. “영어 듣기를 위한 미드”를 선택할 때, 약간의 기준이 있다. 이왕이면, 주인공이 발음이 좋고, 등장인물이 복잡하지 않아야 하며, 비주얼보다는 스토리가 있는 것을 선택한다.
포스트 코로나 이후 비대면 시대, 게다가 한국 바이오산업이 성장하면서, 외국과의 “화상회의”는 점점 업무의 일부가 되어 가고 있다. 화상회의의 핵심은 “듣기”에 있다. 그동안 나는 영어 때문에 고생 고생 Dog고생 많이 했지만, 솔직히 그만큼 성장했음을 느낀다. 이제는 오히려 화상회의가 잡히면, 반갑고, 그 업무가 끝나면, 왠지 밥값은 한 것 같아 뿌듯하다. 회사에서 짬이 오래될수록 서바이벌 무기가 하나 있어야 하는데, 내가 가진 무기 중 꽤 쓸만한 것은 영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쭉 지적인 (?) 회사 생활을 하며, 건재하길 기대해 본다.
본 기사는 네티즌에 의해 작성되었거나 기관에서 작성된 보도자료로, BRIC의 입장이 아님을 밝힙니다. 또한 내용 중 개인에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사실확인을 꼭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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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는 대부분 박사와 Post-doc을 마치고, 대학에서 자리를 잡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산업계로의 진출하려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에 교수 임용이 매우 어려워졌고, 그래서 그런지 산업계로도 진출을 많이 하는 것 같다. 산업계 입장에서는 좋은 인력이 많이 유입되는 것은 상당히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국내 바이오 제약 분야가 워낙 Job market 이 작고, 업계 종사자 수가 적은 분야라서, 진입장벽이 상당히 크다. 또한, 진입을 했더라도, 연구단계에서부터 제품생산까지 기간이 매우 오래 걸리기 때문에, 전체 업무사이클에 대한 역량을 쌓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필자가 실제로 직장생활을 하면서 도움이 될 만한 선배를 찾기가 쉽지 않았고,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혼자서 고군분투했던 것 같다. 이 글은 직장 내에서 겪었던 크고 작은 에피소드로 구성되었다. 성취했던 일들과 힘들었던 일들을 모두 포함시켰다. 아직 취업을 하지 않은 독자들에게는 회사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대략적으로 알 수 있을 것이고, 업계에서 일하는 직장인들에게는 본인의 회사에서 비슷한 상황이 발생했을지도 모른다. 아무쪼록 이글이 많은 바이오 제약 업계 관련인들에게 간접적으로 경력 개발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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