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스토리를 담고 있는 연재를 만나보세요.
[나의 박사 일지] 프롤로그 - Happy Ending, or End of Happiness
Bio통신원(만다린(필명))
끝이라는 단어는 꽤 복잡하다. 후련함, 안도감과 같은 가벼운 감정들과 함께 미련, 아쉬움, 후회 등의 무거운 감정들이 담겨있기 때문일 것이다. 박사 학위를 받은 뒤, 다음 발걸음을 어디로 내딛어야 할지 한창 고민하던 시기에, 나는 지난 5년 반 동안의 박사 과정을 마무리하는 에필로그로 ‘나의 박사 일지’를 시작했다. (https://www.ibric.org/bric/trend/bio-series.do?mode=series_view&newsArticleNo=8875820&articleNo=8882822&article.offset=10&articleLimit=10&beforeMode=series_list#!/list)
그로부터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나는 여전히 같은 질문에 답을 내리지 못한 채로 박사 학위 이후의 생활에 대한 프롤로그를 남기고 있다. 박사일지를 남기는 동안 나에게는 두 가지의 큰 변화가 생겼다. 첫째는 최종학력이 ‘박사’가 되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한국을 떠나 미국에서 ‘박사 후 연구원 (이하 포닥)’으로 생활하고 있다는 것이다.
학위 과정 내내, 나에게는 나의 지도교수님, 혹은 나의 수많은 선배 박사님들처럼 독립적인 연구자가 되기에는 재능이 부족한 것 같다고 수천 번, 수만 번을 되뇌었던 나는, 박사졸업과 동시에 취업을 할 계획을 세웠었다. 자기소개서를 작성해서 지원하고, 역량검사를 하고, 대면 면접을 보기를 수차례. 박사 학위 취업시장은 학사 학위 취업시장보다는 조금 더 수월하지 않을까 생각했었지만, 정말 큰 오산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박사학위의 분야에 따라 상황은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에는 박사학위를 받고 나니 전문성은 깊어졌지만 범용성은 줄어들어 취업의 문은 오히려 더 좁아진 것 같았다. 박사 학위 심사를 통과했을 당시에는 드디어 결실을 맺었다는 사실에 정말 기쁘고 행복한 마음이었지만, 취업과 진로결정 앞에 서니, 차라리 박사 과정 생이었을 때가 행복했던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역량 있고 유능한 인재가 되기 위해 5-6년을 할애했지만, 아직도 나에게는 경쟁력이 없는 것만 같았다. 누군가 나에게 박사 학위까지 취득한 것이 대단하다고 이야기할 때면, 나는 손사래를 치며 별거 아니라고, 운이 좋았던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누군가는 그런 나의 대답에 가면증후군이라는 진단을 내려 주기도 했지만, 스스로는 늘 정말 얕은 나의 지식의 밑천이 드러날까 조마조마한 기분이 들곤 했다. 그리고 자연스레 이어지는 ‘박사 학위 받으면 뭐 할 거야?’라는 질문에는 확고한 꿈이나 목표 대신 ‘글쎄, 나는 연구에 소질이 없는 것 같아.’라는 열린 결말을 내어 놓곤 했다.
[ 편도 비행기표를 끊고 떠나온, 종착지 없는 여정 ]
“혹시 미국으로 포닥을 나올 생각이 있니?”
그렇게 한창 진로고민에 빠져있을 당시, 일 년 전에 미국으로 포닥을 나가셨던 선배 박사님의 연락을 받고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나에게 포닥은, 그것도 미국으로의 포닥은 나의 진로 선택지에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박사 학위 과정에서 괄목할만한 큰 성과를 내지도 못했었고, 해외경험은 더더욱 없었기 때문이었다. 선배박사님의 연락을 받고 나의 가슴이 뛴 것은 아마도, 나의 가슴 한구석에 학부시절부터 당시까지 오랜 시간 자리 잡고 있었던 해외 생활에 대한 로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두근거림을 따라서 ‘포닥’이라는 진로가 어떠한 무게를 가진 것인지는 크게 고려하지 못한 채, 해외에서의 삶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에 눈이 멀어 나는 또 가벼운 마음으로 해외포닥을 결심했다. 물론 선배님의 추천으로 포닥을 지원한다고 해도 그 과정이 쉬웠던 것은 아니었다. 이력서를 보내어 지원을 하고, 인터뷰를 보고, 구두 오퍼를 거쳐 공식 오퍼를 받게 되면서 나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미국 포닥이라는 진로를 선택하게 된다. 그렇게 편도 비행기 표를 끊고, 캐리어를 두 개 끌고 오른 미국행 비행기. 끝이 어디인지 모를 나의 여정이 또다시 시작되었다.
[ 장래희망 ]
올해로 나는 2년 차 포닥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연고도, 해외 경험도 없었던 나는 미국에 와서 경험하는 모든 것이 새로웠다. 가끔은 생각만큼 나오지 않는 영어에 답답해하기도 하고, 때로는 대놓고 때로는 은은하게 느껴지는 인종차별에 서러워하고, 아직도 끝나지 않은 진로 고민에 막막해하기도 하면서. 그렇게 생존해내고 있다. 교수가 되는 것을 꿈꾸며 시작한 포닥이 아니다 보니, 1년 차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생활했던 것 같다. 하지만 연차가 쌓여가면서 요즘은 나의 남은 포닥생활, 그리고 포닥 이후의 커리어를 어떻게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러한 고민은 포닥을 시작하기 전에 했어야 하는 고민이 아니었을까 하며, 나는 또다시 단순한 생각으로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며 반성을 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으로 포닥을 온 것을 후회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미국에서 좋은 연구 환경을 경험하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소통하며 나의 연구를 꾸려 보는 경험은 그 무엇으로도 살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다만, 내가 후회하는 점은, 포닥을 시작하기 전에 포닥 생활에서 개발하고 싶은 커리어를 조금 더 명확히 세워보지 않은 점이다. 어린 시절 생활기록부에는 망설임 없이 장래희망을 적어 내곤 했는데, 곧 서른이 되는 나는 장래희망을 지워버린 어른이 되었다.
[ 당신은 교수가 되고 싶으셨습니까? ]
어느 날, PI와 대화를 하다가 문득 나는 이렇게 물었다. “교수님께서는 원래부터 교수를 목표하셨나요?” 돌아온 교수님의 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교수님께서는 자신이 포닥 이후의 커리어를 결정하게 된 기준 두 가지를 나에게 말해주었다. 첫째는 신기술을 응용할 수 있는 연구를 하고 싶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내가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들과 일할 수 있는 곳으로 가겠다.’는 것이었다.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마다 그 두 가지 기준을 따라가다 보니, 지금의 자리에 오게 되었다고 하셨다. 교수님의 대답을 듣고, 커리어에서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일까,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지게 되었다.
나의 진로에 있어서 내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지금까지 내린 결정들에서 내가 결정의 기준으로 삼았던 것은 무엇이었는가?
이전까지는 커리어 고민에 있어서 피상적인 질문에 답을 찾아보려 애를 쓰던 기분이었다면, 교수님과의 대화 이후로 앞으로 남은 포닥 기간 동안 어떠한 질문들의 답을 찾아야 할지 조금은 명확 해졌다. 그리고 오늘도 나는 열심히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며 하루하루를 온전히 경험하려 노력하고 있다. 호기롭게 시작한 나의 포닥 생활이 슬기로운 열매를 맺기를 바라면서.
본 기사는 네티즌에 의해 작성되었거나 기관에서 작성된 보도자료로, BRIC의 입장이 아님을 밝힙니다. 또한 내용 중 개인에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사실확인을 꼭 하시기 바랍니다.
[기사 오류 신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