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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의 말하기] 제1편: 왜 내 말은 아무도 못 알아들을까? - 소통에 서툰 천재들
Bio통신원(다온)
무엇이 우리 사이에 벽을 만드는가?
지난 15년간 연구자, 창업가, 그리고 평가위원으로 활동하며 느낀 가장 답답한 순간 중 하나는, 분명 같은 한국말로 대화하고 있는데, 마치 서로 다른 주파수의 라디오를 켠 것처럼 말이 겉도는 경험입니다. 이 답답한 감각을 스크린에 완벽하게 옮겨놓은 것이 바로 영화 <오펜하이머>의 청문회 장면입니다.
주인공 J. 로버트 오펜하이머, ‘원자폭탄의 아버지’라 불리는 희대의 천재. 과학자로서 치밀한 논리와 증거를 가지고 있었지만, 청문회장에서 그의 말은 힘을 잃고 공중으로 흩어집니다. 물론 당시 청문회는 이미 정치적 목적이 정해진 자리였고, 그의 모든 말은 의심과 왜곡 속에 묻혀버렸습니다.
하지만 그 장면이 우리에게 던지는 울림은 단순히 한 천재의 억울함을 넘어섭니다. 그것은 바로 과학의 언어가 세상의 언어와 충돌하는 순간을 극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증거와 논리로 말하는 과학자의 언어와, 의도와 맥락, 이해관계가 뒤섞인 사회의 언어 사이에서 부딪칠 때, 진실을 손에 쥔 사람마저 얼마나 무력해질 수 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진실마저 무력해지는 이 안타까운 모습이야말로, 우리가 ‘과학자의 말하기’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는 진짜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이 벽을 만드는 걸까요?
<영화 오펜하이머>
가장 많이 알기에, 가장 설명하기 어려운 역설
분명 완벽하게 설명했다고 생각했는데, 상대방이 전혀 이해하지 못해 당황했던 경험, 누구나 한 번쯤 있을 겁니다. 이 답답한 소통의 간극을 아주 간단한 실험으로 증명한 것이 바로 1990년 스탠퍼드 대학에서 진행된 유명한 심리학 연구입니다. 실험 내용은 이렇습니다. 한 그룹(태퍼)은 ‘반짝반짝 작은 별’처럼 누구나 아는 노래의 리듬을 두드리고, 다른 그룹(리스너)은 그 리듬만 듣고 노래 제목을 맞혀야 했죠.
결과는 어땠을까요? 태퍼들은 리스너의 50%는 정답을 맞힐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자기 머릿속에서는 완벽한 멜로디와 함께 리듬이 연주되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실제로 정답을 맞힌 리스너는 단 2.5%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의 귀에는 그저 의미 없는 소음의 나열로 들렸을 뿐입니다.
태퍼의 머릿속에서 흐르던 선명한 멜로디와 리스너의 귀에 들린 무의미한 박자 소리. 이 거대한 간극이 바로 ‘지식의 저주(The Curse of Knowledge)’입니다. 간단히 말해, 내가 무언가를 알고 나면 그것을 몰랐던 시절의 나를 상상하기 어려워지는 현상을 뜻합니다.
이 역설은 심리학 실험실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뇌에 깔린 기본 운영체제와도 같아서, 누구도 여기서 자유로울 수 없죠. 명절에 부모님께 새로 산 스마트폰 사용법을 알려드리는 상황을 떠올려 보면 명확해집니다.
"그냥 이 아이콘 누르고, 위로 스와이프 해서 앱 서랍을 여시면 돼요.”
우리에게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한 ‘아이콘’, ‘스와이프’, ‘앱’이라는 단어는 부모님께는 외계어나 다름없습니다. 우리는 분명 세상에서 가장 친절하게 설명하려 하지만, 이미 우리 몸에 체화된 단어들이 여과 없이 튀어나옵니다. 이 순간, 우리는 완벽한 멜로디를 안다고 착각하는 ‘태퍼’가 되고, 부모님은 의미 없는 소음만 듣는 ‘리스너’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지식의 역설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곳이 바로 과학자의 세계입니다. 과학적 개념들이 생각의 기본값이 되어 버려 체화되고, 세상을 보는 특별한 ‘안경’ 그 자체가 됩니다.
문제는, 우리는 그 안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안경을 쓰지 않은 사람들에게 세상이 어떻게 보이는지 상상하지 못한 채, 자신이 보는 것을 그대로 설명하려 합니다. 과학자와 대중의 소통이 엇나가기 시작하는 것은 대부분 이 지점에서부터입니다.
천재들이 남긴 소통의 흑역사
이 특별한 ‘안경’은 때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자들의 시야마저 흐리게 만들었습니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아이작 뉴턴을 떠올려봅시다. 그는 인류 지성사의 기념비적인 저작 <프린키피아>를 내놓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초대장이라기보다는, 아무나 넘볼 수 없도록 굳게 닫아 건 지성의 요새에 가까웠습니다.
뉴턴은 자신이 막 발명한 미적분학을 사용하면 훨씬 쉽게 설명할 수 있었음에도, 일부러 고대 그리스 방식의 복잡한 기하학으로 책 전체를 증명해 냈습니다. 마치 "이걸 해독할 지성이 없다면, 감히 내 이론을 논하지 말라”라고 선언하는 듯했죠.
그 결과, 당대 최고의 석학들조차 이 위대한 책 앞에서 길을 잃고 헤맸습니다. 뉴턴에게는 너무나 명백했던 우주의 설계도가, 다른 이들에게는 암호문 가득한 보물지도였던 셈입니다. 그는 보물의 위치는 알려주었지만, 정작 그 지도를 읽는 법을 알려주는 데는 지독히도 인색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루트비히 볼츠만의 이야기는 더욱 안타까운 사례입니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원자들이 무작위로 움직이며 통계적인 법칙을 따른다는 개념으로 세상의 열 현상을 설명하려 했습니다. 지금 우리에겐 상식이지만, 당시 학계의 주류는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은 과학이 아니다”라는 신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볼츠만은 학회에 나설 때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이단아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의 눈에는 수억 개의 원자가 격렬하게 부딪히는 세상이 생생하게 보였지만, 동료들의 눈에는 그저 허공에 외치는 미친 예언자처럼 보였을 뿐입니다. 그는 자신의 눈에 보이는 이 명백한 진실을 설명하려 애썼지만, 그의 언어는 번번이 동료들의 견고한 상식이라는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 났습니다.
결국 평생에 걸친 학문적 고립감과 싸우던 그는 스스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가장 큰 아이러니는, 그가 죽고 불과 몇 년 뒤 아인슈타인 같은 후배 과학자들이 그의 생각이 옳았음을 명백히 증명해 냈다는 사실입니다. ‘지식의 저주(The Curse of Knowledge)’가 만들어낸 소통의 벽은, 때로 한 천재의 삶을 통째로 삼켜버릴 만큼 무서운 것입니다.
벽을 허무는 것은 기술이 아닌 태도
뉴턴과 볼츠만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알려줍니다. 결국 과학자의 말하기란, 단순히 똑똑한 지식을 나열하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쓰고 있는 특별한 안경을 스스로 인지하고, 기꺼이 상대방의 눈높이에 맞춰 보려는 태도에 더 가깝습니다.
그렇다면 이 지독한 저주를 이겨내고, 자신의 안경 너머의 세상과 성공적으로 소통한 과학자는 없었을까요?
물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칼 세이건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그가 어떻게 자신의 전문 지식을 우리 모두의 코스모스로 번역해 낼 수 있었는지, 그만의 소통 비법을 차근차근 들여다보겠습니다.
본 기사는 네티즌에 의해 작성되었거나 기관에서 작성된 보도자료로, BRIC의 입장이 아님을 밝힙니다. 또한 내용 중 개인에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사실확인을 꼭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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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세상의 비밀을 푸는 열쇠(발견)를 손에 쥐고도, 정작 그 가치를 알아줄 사람의 마음이라는 문(이해)을 열지 못해 답답해합니다. 왜 내 말은 동료에게, 심사위원에게, 그리고 세상에게 가닿지 못할까요? 문제는 당신의 연구가 아니라, 당신의 말하기에 있을지 모릅니다. 이 연재는 단순히 말을 잘하는 기술이 아닌, 연결의 기술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데이터와 가설을 연결하고, 나와 동료를 연결하며, 마침내 과학과 세상을 연결하는 법. 연구실과 스타트업, 정부 과제 평가 위원을 모두 거치며 깨달은 연결의 노하우를 다섯 번의 여정에 걸쳐 아낌없이 나누고자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진실도, 누군가에게 닿지 못하면 한낱 실험실의 데이터로 남을 뿐입니다. 더 이상 당신의 위대한 발견이 외로운 서랍 속에서 잠들지 않기를 바란다면, 이 여정에 함께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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