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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연구실 생존기] 무력감,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느껴질 때
Bio통신원(미윤)
두어 달 전인가 한창 힘들었을 때 만난 사주명리 도사님은 가만히 내 사주를 받아 보더니 하는 일이 뭔지를 물었다. 대학원생이라는 나의 답에 도사님은 “올해 문서가 들어와 있는데 혹시 학위 받아요?”라고 물으며 내 귀를 솔깃하게 했다. 나는 이번 여름 학기에 졸업을 한다. 도사님은 더 나아가서 이번 해에 분명 취업이 될 텐데 올해는 모든 달이 다 좋지만 굳이 뽑으라면 9월이 가장 좋고, 4월과 5월도 괜찮다고 했다. 나는 4월 중에 포닥 자리를 찾았고 9월부터 일을 시작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
나도 이런 내 모습이 어이없을 때가 많았다. 명색이 과학을 한다는 사람이 앞으로의 운명을 묻고 다니니 말이다. 그러나 사람이 더 이상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때,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다 했고 이제 다른 사람의 역할을 기다리는 것밖에 남지 않았을 때 드는 무력감은 견디기가 어려울 때가 많다.
내가 어떤 자리에 아무리 뽑히고 싶어도 나를 뽑아 주는 사람의 마음과 여러 상황(예를 들면 최근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연구비 삭감 사태)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지도교수님이 빨리 피드백을 줬으면 하지만 내 글은 종종 교수님의 메일함 어딘가에서 후순위로 밀려 썩고 있으며, 리뷰어가 내 원고를 빨리 읽고 좋아해 주기를 바라지만 많은 경우 속도는 기대보다 늦고 비평은 신랄하다. 이렇게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일이 없을 때 대체 앞으로 내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해서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
그러다 문득 가끔 앞선 학생들의 궤적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가 있다. 적어도 내 주위의 많은 학생들은 비슷한 시기에 심리상담을 받기 시작했다가 비슷한 시기에 쉬고, 다시 비슷한 시기에 상담을 재개한다. 이유도 큰 틀에서는 거의 비슷하다. 상담사를 찾는 첫 번째 이유는 “랩 사람들과 일하는 방식이 맞지 않고, 교수님이 내 말을 절대 들어주지 않아서.” 그리고 얼마간의 행복한(?) 시간이 지나 다시 상담실로 돌아가게 되는 두 번째 이유는 “여전히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2년 차 중후반이었을 때였나 나는 학교 정신건강센터에서 제공하는 무료 심리상담(*)을 2주에 한 번 간격으로 한 학기 정도 받았다. 내가 심리상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당시 랩에 있던 5년 차 박사학생은 본인도 2-3년 차에 2주 간격 심리상담을 1년 동안 받았다고 했다. 그러다 얼마 전 졸업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다시 상담을 시작했다고도 했다. 랩도 다르고 전공도 다른 옆 건물의 다른 박사학생 역시 2년 차 중반이 지나서 상담을 조금 받다가, 이제 6년 차가 되고 졸업 준비가 시작되면서 다시 과거의 상담 선생님을 찾아갈 예정이라고 했다.
그들은 모두 개인적으로 따로 지불해야 하는 돈도 없으니 쉬지 말고 꾸준히 받았다면 더 행복한 학위 과정이 되었을 거라며 중간에 상담을 쉰 것이 아쉽다고 했다. 아무렴 당연하지, 기왕 시작한 거 나는 꾸준히 졸업 때까지 이 좋은 거 꼼꼼히 챙기고 내 마음건강도 알뜰히 챙길 거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나 역시 어느 순간 상담을 더 이상 예약하지 않게 되고 그렇게 순식간에 5년 차가 되어 다시 상담센터의 존재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대신에 신년운세를 좀 보러 다니다 말았지만.
“분명 그때 참 힘들었는데 지금은 마법같이 좀 괜찮네. 어떻게 안 힘들어졌더라?”를 생각해 보면, 내가 무엇을 하고 하지 않고에 관계없이 많은 경우 상황이 자연스럽게 나아진다. 일이 풀리려면 꼭 시간이 필요했다. 얼른 단백질을 정제하고 싶었더니 발현에만 48시간이 걸리더라. 한 편의 논문을 잘 소화하고 싶었더니 앉아서 꼭 논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시간이 필요하더라. 아무리 그 앞에서 화를 내고 발을 동동 굴러도 세포가 분열하는 속도는 빨라지지 않고, 앞으로 논문을 읽어야 할 시간만 길어지는 법이었다. 어떤 일을 시작해서 끝을 내려면, 그리고 사람이 성장하는 데는 그저 묵묵히 기다리고 흘려보내야만 하는 시간이 꼭 필요했다.
그리고 내가 겪는 고민과 힘듦이 다른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딱히 특별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어깨가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니 특별히 슬퍼하거나 특별히 행복해하지도 말 것. 그러나 그 기다리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재밌게 보낼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동안 미뤄뒀던 일들을 챙길 것. 누구나 자기만의 방법이 있겠지만 나는 집안일과 운동을 더 많이 하고 그동안 챙기지 못했던 친구들과 더 많이 이야기하는 것이 도움이 많이 되었다. 아니면 낮잠이 몰려올 때 참지 말 것!
그 누구도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는 것을 막을 수 없고, 봄이 오면 미국 스타벅스에는 다시 라벤더크림말차가 돌아온다. (라벤더크림 추가해서 드세요, 꼭이요!)
사실 가짜 무기력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다. 그동안 열심히 해서 내 임무를 다 완수했다면 조금은 쉬어도 되는 건 아닌지. 매일 매 순간 생산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느끼는 가짜 무기력 때문에 나를 힘들게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어차피 예상치 못한 인생의 폭풍우는 곧 다시 찾아올 텐데. 그러니까, 쉴 수 있을 때 잘 쉬자는 말이다.
그래서 요 며칠 이른 퇴근을 하면서 늦은 오후 이런저런 잡다한 생각에 빠질 때가 많다. 볕이 좋으니 괴상한 생각을 하기가 딱 좋기도 하고. 오늘은 사주든 타로든 운세라는 건 말하는 사람의 마음, 그리고 듣는 사람의 마음에 달렸다는 생각을 한다. 문서운은 학위를 받는 것만이 아니라 부동산 계약에서 큰 이득을 본다고 해석할 수도 있는 거고. 돌이켜 보면 말도 안 되는 운세풀이도 참 많았는데 결국 나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내 상황에 맞다고 생각하는 것만 기억할 뿐이었다.
*참고: 저의 짧은 식견으로, 정신건강에 대해서 한국과 미국의 차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조금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꽤 많은 친구들이 정신과 약을 먹고 있고, 한국에 비해 ADHD를 비롯해서 자신이 어떤 질환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빈도가 훨씬 흔한 것 같습니다. 심리상담도 매우 보편적이고, 당연히 정신과 방문뿐만이 아니라 심리상담 역시 건강보험이 적용됩니다.
저희 랩 선배 박사학생의 경우 미국인이어서 그런지 전부터 알던 상담사가 따로 있었다고 했으며 건강보험에서 커버가 되기에 따로 내는 비용은 없거나 크지 않다고 했습니다. 본문에 나온 저와 옆 건물 박사학생의 경우 학교 상담센터를 이용했는데 공교롭게도 둘 다 외국 국적 유학생이었지만, 전해 듣기로는 미국 시민이더라도 학교 상담센터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또한 저의 경우 대기가 거의 없었으나 어떤 기관의 경우 대기가 길다고도 들었습니다. 그 경우 학교 건강보험에서 커버가 되는 상담사(in-network)를 구하면 되고, 개인적으로 찾기가 어렵다면 학교에서 도움을 줍니다.
치료나 상담이 영어로 이루어져서 속상한 마음을 잘 표현할 수 없다는 걱정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에는 한국계 미국인 상담 선생님이 생각보다 아주 많습니다. 제가 처음 학교 상담센터의 문을 두드렸을 때, 저는 한국어로 상담이 가능한 선생님이 두 분이나 계셨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저는 두 분 중 저와 더 맞을 것 같아 보이는 선생님과 상담했고, 제 모든 상담 세션은 한국어와 아주 약간의 영어로 진행되었습니다.
최근에 재미있게 읽은 책이 하나 있는데요. Cathy Park Hong의 <Minor Feelings: An Asian American Reckoning>은 한국계 미국인인 저자가 한국어 상담이 가능한 정신과 의사 혹은 상담사를 찾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선택지가 상당히 많아서 결정을 위해 일일이 만나보는 이야기로 한 챕터를 거의 채워요!
본 기사는 네티즌에 의해 작성되었거나 기관에서 작성된 보도자료로, BRIC의 입장이 아님을 밝힙니다. 또한 내용 중 개인에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사실확인을 꼭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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