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의 영역
내게는 자명한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은 경우야 부지기수로 많다. 보통은 서로의 사정을 들어보면 이해하게 된다. 아이를 위해 다 해주겠다는 생각도, 아이가 스스로 할 수 있게 지켜보기만 하겠다는 생각도 이해할 수 있다. 고기를 먹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생각도, 죽기 위해 길러지는 동물들이 가엾다는 생각도 이해할 수 있다. 잘못된 일에 대해 잘못됐다고 말해야 한다는 생각도, 잘못된 일일수록 다치는 사람이 없도록 말을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도 이해할 수 있다. 이런 다른 생각들은 처음에는 갈등인 듯 보이다가 오히려 시야를 넓혀준다. 나 혼자만의 삶으로는 도저히 다다를 수 없는 너비의 세상을 보여준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 개인의, 전혀 넓지 않은 생각이기는 하지만 — 이해의 영역에 들지 못하는 것 같다. 연구비 부정 사용이나 날조, 표절, 저작권 도용 같은 것들에 그렇게 해도 될 만한, 이해할 만한 이유가 있을까. 예를 들어 프로젝트를 꼭 성공시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저지른 부정이나 제자를 너무도 아끼는 바람에 그를 위해 작심한 부정, 다들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해버린 부정은 이해해 줄 만 한가. 내 답은 자명하게 ‘NO’이니 모두의 ‘NO’가 부정 행위자들을 몰아내면 그만이다 싶었다. 그러나 세상은 생각보다 난해했다. 부정 행위자가 아닌,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과의 대화에서부터 가로막혔다. 세상이 넓어지기는커녕 세상을 보는 렌즈에 흙먼지가 잔뜩 낀 것 같았다.
‘순수한’ 장부 조작
연구비 부정 사용을 주도한 A는 연구 기관 안에서도 밖에서도 이름이 난 사람이었다. 그가 남긴 성과는 어느 것 하나 부족한 구석이 없어 보였다. 연구 역량은 물론이고 말솜씨와 글솜씨로 대중을 사로잡는 능력도 있었다. 연구 기관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는 데에 그의 공이 컸음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었으며, 그의 이름을 모르고 입학하는 대학원생 역시 없었다. 그가 연구비 부정 사용 의혹으로 조사를 받는다는 소문이 기관 내에 퍼지고 있을 때, 그가 누구인지를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편, 모두가 되묻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부정 사용한 액수였다. 모두가 받아본 적 없는 큰 규모의 연구비였고 각자의 수입을 떠올리면 더더욱 가늠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연구 기관도 내놓을 수 없는 돈이었으니. 그 큰돈을 어디에 어떻게 잘못 썼을까, 그것이 모두가 던진 또 다른 질문이었다.
“사적으로 쓰지는 않았다는데요.”
A가 속해있던 학과에서 대학원생으로 있던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 나는 억대 규모에 해당하는 영수증을 허위로 작성한 A의 행태가 무책임하고 편법적이고, 그래서 비윤리적이라고 말하는 중이었다. 그는 말을 계속 이었다. “연구를 위해 썼대요. 연구 설비를 살 때 실제로 지급해야 할 액수보다 많이 줘서 그렇지 본인이 쓰지는 않았다네요.” 아무리 연구를 위한 거라 해도 결국 장부를 조작한 거나 마찬가지다. 스스로 그렇게 했건 설비 업체로부터의 요구로 그렇게 했건 지원받은 돈으로 부당한 거래를 할 권한 따위 연구자에게는 없다. 내 생각을 전하자, 그는 학과 선배들이나 오래 일한 직원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라면서 태연하게 말했다. “연구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안 가린다더라고요. 여러 사람 곤란하게 할 때도 있는데 연구에 대해서만큼은 순수한 사람이래요.”
‘순수’라는 말을 이런 때 썼던가. 어떤 ‘순수’함인가. 다른 것이 섞이지 않았다는 의미에서의 ‘순수’를 말하는 건가. 연구를 향한 A의 마음은 아주 본능적이어서 다른 ‘불순한’ 목적이 뒤섞이지 않았다고 말하는 건가. 설마 악의가 없다는 의미의 ‘순수’인가. A가 연구비를 다룬 태도에는 연구를 향한 열망밖에 없었을까. 어느 쪽이건 순수하다고 치더라도, 연구비를 제 주머니에 차지 않으면, 연구를 위한 마음에서라면 부정도 이해할 만한가.
취업이 학위의 조건?
좀 더 뻔뻔한 예를 보자. 순수하다고조차 변명할 수 없는데도 암암리에 용인되는 일이다.
대학원생 B가 박사학위 논문 심사를 받는 중이었다. 그는 심사위원들에게 국제 학술지에 이미 출판 확정을 받은 연구 한 편을 소개한 뒤 아직 투고 전인 다른 연구도 덧붙여 소개했다. 심사위원 중 한 명이 두 번째 연구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 연구로는 국제 학술지에 출판할 수도 없을뿐더러 학위 논문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상태로 어떻게 심사를 받을 생각을 했냐는 말까지 나왔다. 지도교수가 나서서 B의 편을 들어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B의 심사는 그렇게 탈락 결정이 나고 끝나는 줄 알았지만, 며칠 뒤 심사회는 다시 열렸고 그는 그다음 달에 학위를 받았다. 직후에 그는 지도교수의 소개로 취업했다. 이후 지도교수는 당시에 느낀 초조함을 주변에 털어놓았다. B의 취업은 이미 전부터 약속되어 있었으며, 그 때문에 반대가 심한 심사위원을 설득하느라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른다고 말이다.
또 다른 대학원생 C 역시 박사학위 논문 심사회에서 심사위원으로부터 맹공격을 받았다. 연구의 전제와 설계부터가 잘못되었다는 지적이었다. 그 심사위원은 학위를 주기에는 개선해야 할 점이 너무 많아 논문 제출 기일에 맞출 수 없을 거라며 이번에는 포기하고 다음에 재정비해서 심사를 받으라고 말했다. 그러자 다른 심사위원이 날짜 안에 수정할 수 있는 부분만 최대한 수정해서 제출하게 하는 게 어떻겠냐며 설득했다. 그 이유인즉슨, C가 다음 연도부터 받기로 결정 난 연구비 때문이었다. C가 받게 된 연구비는 박사학위를 취득하는 것이 조건이었기 때문에 이번에 학위를 취득하지 못하면 해당 연구비 지원이 취소되는 상황에 놓여 있던 것이다. 학위를 취득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는 상태에서는 연구비를 신청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서둘렀고 지도교수도 용인했다. C의 논문을 비판했던 심사위원은 끝까지 박사학위 논문으로 인정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말했지만, 다수의 의견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그 외에도 학위를 취득하는 과정이 무척 무리하다거나 미심쩍은 경우는 간혹 있다. 그런 소문이 오갈 때마다 마치 별일 아니라는 듯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미 취업이 결정 나서 그런 거 아니에요?” 어떤 사람은 농담 반 진담 반 이렇게 말한다. “취업을 해두는 게 나름의 전략인가 보죠.” 학위가 취업의 조건인지 취업이 학위의 조건인지 알 수 없게 만드는 말들이다.
자기중심성, 그리고 회피
누군가의 부정에 대해, 의도가 순수하니까 부정을 했어도 그렇게 나쁘게 볼 수 없고 취업이 되었으니까 다소 부당한 방식으로 졸업했더라도 어쩔 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좋지 않은 일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대응인지도 모른다. 자신과는 직접 관련이 없는 부정적인 일들에 에너지를 쏟아봐야 지치기만 하고 달라지는 건 거의 없으니 말이다. 부정을 저지른 사람들은 부정을 부정으로 생각도 안 하거나 부정인 줄 알면서도 낯짝이 두꺼운 사람들이니 비난을 해봐야 그럴듯한 답을 받기도 어려운 게 매일반이다. 연구비 부정 사용 사건의 주동자 역시 자신의 목적은 ‘순수’했다며 결백을 주장했다. 부당한 방식으로 받은 학위라도 학위는 학위이니 ‘받으면 땡’이다. 다른 사람들처럼 박사 졸업장을 내밀며 취업을 하고 ‘박사님’ 소리를 듣는다.
이런 꼴을 계속 보고 있기보다는 ‘그에게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겠지’라며 이해하는 척 넘기는 것이 속이 편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한 발짝만 더 나아가 생각해 줬으면 한다. 부정 행위자들의 사정은 피치 못할 사정이 아니라 그들의 자기중심적인 욕망이며, 그들의 부정이 낳는 영향은 무고한 사람들에게까지 닿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A가 부정 사용한 연구비는 국가가 국민의 세금을 운용하여 지급하는 것이었다. 그가 잘해서 받은 상금이 아니라 연구자로서 그의 가치를 믿고 국가가 국민을 대신해 투자한 돈이었다. 그런 공적 투자에 대해 그가 벌인 일은 설령 연구를 위한 일이었다 해도 지극히 사적이다. 그 돈이 그의 주머니로 들어가지 않았더라도 그는 이미 사익을 취했다. 공적 투자를 받는 모든 연구는 사실상 공적인 것임과 동시에 연구자 개인의 성취를 이루기 위한 수단이다. 오히려 개인의 성취로 더 활용된다. 그러므로 더더욱 연구비를 집행하는 데 있어 투자한 주체가 제시하는 규칙을 위배하지 않아야 한다. 연구비를 제공하는 주체가 정한 규칙이 불완전한 일도 있지만 A의 행위는 그런 문제와는 무관하다. 지극히 사적인 사정을 특별히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 달라는 건 무슨 생떼인가.
B와 C의 행태는 더 노골적이다. 학위를 수여하는 시스템이 대학원생의 부당한 사익 추구를 도운 셈이다. 정당한 과정을 밟고 학위를 취득하는 대학원생의 수가 훨씬 많지만, 간혹 드러나는 이런 일들은 누군가에 의해 철저히 이용된다. 자기 자신도 때가 되면 먼저 취업을 하고 그걸 무기 삼아 졸업하겠다고 마음먹게 한다. 어떤 대학원생은 그 계획이 잘 풀리지 않았는지 후배들 앞에서 화를 내며 말했다. “지도교수라면 학위를 따게 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선배도 취업하기로 해서 학위 받았는데 나는 왜 안 돼?”
A의 사익 추구가 낳은 피해는 국민의 세금이 탈취당한 것만이 아니었다. 앞으로의 글들에서 조금씩 소개하겠지만 피해는 줄줄이 엮인 굴비처럼 이어졌다. B와 C의 사례는 양심껏 연구하는 대학원생들을 — 그들이 아무 일도 저지르지 않았는데도 —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한다. 그들은 B나 C보다 성실하고 능력이 있어도 졸업이 늦어지고 그만큼 늦게 사회에 나간다. 누군가는 ‘밖에서는 모르더라도 연구자끼리는 누가 신뢰할 만한지 다 알아. 실력 있는 사람은 언젠가는 다 알아줘.’라고 말하지만, 실력 이상으로 운이 따라야 하는 학계의 풍조를 생각하면 그리 위안이 되지는 않는다. 모두가 실력 있는 사람을 알아준다고 해서 부당하게 학위를 취득한 사람이 마땅한 처분을 받는 건 아니다. 그들은 학위를 손에 쥐고 전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존재가 되어간다. B와 C가 언젠가 누군가를 지도하는 위치에 선다고 생각해 보자. 학생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자신의 힘으로 학위 논문을 완수해 보지 못한 선생에게 지도를 받아야 한다. 피해가 얼마나 더 늘어야 하는가.
내 마음 편해지자고 하는 ‘이해’의 실체는 회피다. 보고 싶지 않은 일들에 관여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겠지만 그것은 생각과 다르게 힘을 가진다. 자기중심적인 부정 행위자들에게 변명거리를 쥐여주고, 의도치 않게 무고한 이들이 입는 피해를 방관하는 꼴이 되어 버린다. 그 사이 누군가의 자기중심성은 커질 대로 커진다. 반대로 세상은 결코 넓어질 수 없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