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에게 모유 수유를 하는 것이 면역력을 높이고 건강하게 양육할 수 있는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태반을 통과할 수 있는 IgG를 제외한 다른 항체는 엄마가 아이에게 전달할 방법이 없지만, 모유에는 IgA가 포함되어 있어 항체 전달을 통한 수동면역이라는 선물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모유를 수유하는 과정에서 아이와 라포가 형성되기 때문에 양육자와 피양육자 모두에게 최고의 선택일 것이다.
TV 등 각종 매체를 통해 볼 수 있는 모유 수유의 모습은 행복해 보이고 경이로워 보인다. 엄마는 그저 아이를 소중하게 안고 젖을 물리고, 아이 또한 엄마를 행복하게 바라보며 배를 채운다.
결혼 전 나는, 그리고 출산 전 나는 당연하게 모유 수유를 할 것이라 다짐했다. 몸이 힘들어서, 일해야 해서, 등등의 현실적인 어려움을 토로하며 모유 수유를 하지 않거나, 또는 금방 단유해버리는 엄마들은 다 핑계를 대는 것으로 생각했다. 오히려 최대한 모유를 수유할 수 있을 때까지 지속하겠다 다짐했고, 못해도 3년 동안은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역시 사람은 경험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겪어보지 않은 인생에 함부로 토를 달면 안 된다는 것을 또 한 번 뼈저리게 느꼈다. 누구에게나 다 사정이 있고, 그 사정을 자세하게 설명할 수 없으며, 모든 결과에는 어쩔 수 없는 개개인의 말 못 할 상황이 녹아있음을. 출산 직후 나는, 과거의 나의 어리석음을 단번에 깨달았다.
나는 코로나19 감염병으로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천해야 하는 힘든 시기에 아이를 낳았다. 가뜩이나 철저하게 감염 관리를 해야만 하는 병원에서는 조리원에 가기 전까지는 아이와 나를 격리했고 아이 얼굴을 창문 너머로만 볼 수 있었다. 모유 수유를 원하는 경우 유축기를 이용해서 모유를 짜내어 정해진 멸균 팩에 담아 전달하면 살균 처리(아마도 팩의 겉 부분을 UV 멸균했을 것 같다.)한 뒤, 병동의 간호사 선생님께서 우유병에 담아 아이에게 먹여주셨다.
환부가 어느 정도 회복되고 나서 엉덩이로 맞는 진통제와 소변줄이 필요 없어지고 화장실에 스스로 걸어갔다가 나올 수 있는 상태가 되자 가슴에 통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가슴 양쪽이 커진 뒤 시뻘게져 열이 화끈화끈 오르고 딱딱해졌는데, 열을 내리고 통증을 경감시키고자 물에 적신 수건을 가슴에 대는 순간 너무 아파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산모 대부분이 겪는 증상인지, 병원 같은 건물에는 수유 마사지를 하는 곳이 있었다. 하루에 한 번씩 마사지실에 내려가 처음 보는 선생님들 앞에서 상의 탈의를 한 채로 양쪽의 가슴을 마사지받으며 내 모유가 내 얼굴에 튀는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마사지를 계속 받으니 모유가 잘 나오기 시작했는데, 가슴의 통증은 경감되었으나 차오르는 모유를 계속 짜내야 했다. 그 시기 즈음 병원에서 조리원으로 거처를 바꾸게 되었는데, 첫 모자 동실 시간부터 젖 먹이는 연습을 시작했다. 발판에 두 발을 올리고 방석을 무릎 위에 올린 다음 아이를 안고 젖을 물리는 자세부터 연습해야 했고, 아이가 젖을 빠는 것 또한 훈련이 필요했다. 아이가 어느 정도 훈련이 되고 젖 빠는 힘이 강해지자 상처가 나서 쓰라리고 피가 나기 시작했다. 고무 캡(?)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으나 한 번 생긴 상처는 지속적인 통증을 가져다주었다.
문제는 직수(직접 수유)든 유축(간접 수유)을 하든 피는 계속 나고 쓰라리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얼마나 먹었는지 양을 측정하기 어렵고, 젖은 차오르는데 아이가 배고프지 않을 수도 있으니 주기적으로 유축해야만 했다. 덕분에 주기적으로 유축하는 것이 하루의 중요 일과가 되었다. 유축기에는 가슴에 밀착시키는 컵이 기본으로 1개가 있었다. 컵을 가슴에 감싸고 유축기에 기능을 설정하고 최대한으로 모유를 짜내어 멸균팩에 담았다. 이 과정을 왼쪽, 오른쪽 가슴에 한 번씩, 하루에도 여러 번 반복해야 했다. 멸균팩에 담은 모유는, 팩 겉면에 네임펜으로 이름, 날짜, 시간을 기록하여 보내주면 아이에게 먹여주었다.
누가 모유 수유는 아름답다고 했던가?
젖을 물릴 때마다, 그리고 유축기를 사용할 때마다, 나는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였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여기 왜 있는가? 내가 태어난 목적은 무엇인가? 내가 지금 이걸 왜 하고 있는가? 이 행위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왜 사람이라는 생물종은 모유 생산이라는 기능을 여성에게만 부여했는가? 나는 언제까지 이 일을 해야 하는가? 이 일을 꼭 해야 하는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생각보다 수유는 전혀 행복하고 즐거운 것이 아닌 우울하고 힘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우울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 생활을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힘들었다.
수유는 하면 할수록 모유의 양이 늘었다. 어느새 유축-유축 사이의 기간이 짧아졌고, 조금이라도 늦게 움직이면 모유가 뚝뚝 흘러 옷을 적셨다. 양쪽 가슴에 수유패드를 붙이고 있어야 했는데, 조리원에서는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고 내복을 입고 조리원 치마를 입어야 해서, 가슴과 내복 사이가 잘 밀착이 되지 않아 쉽게 옷이 젖어버렸다. 찝찝함은 둘째치고 모유의 비릿한 냄새가 코를 금방 찔렀다. 최대한 수유패드를 자주 교체하고 더 많이 유축하며 견뎠다.
문제는 조리원 퇴소 이후였다. 조리원에서는 그나마 모자동실 시간인 1시간 30분을 제외하고는 아이를 봐주시는 전담 선생님들이 있었는데, 조리원에서 퇴소하고 나면 이 모든 것이 온전히 나 혼자 감당해야 할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법적으로 정해진 출산휴가 90일만 제외하고 육아휴직을 쓰지 말아 달라는 (그 당시 학과장의) 당부에, 친정에서 약 한 달 반을 몸조리한 뒤 복직했다. 친정엄마 찬스로 낮에는 아이를 잠시 맡긴 뒤 출근했다가, 퇴근 후 아이를 돌보며 아침까지 지내는 생활을 시작했다. 문제는 유축이었다. 근무 시간 중간에 유축해야만 하니, 유축에 필요한 것들을 챙겨 계속 가지고 다녀야 했다.
1. 아침에 일어나 씻은 뒤 위/아래 내복을 입고 수유패드를 붙인 뒤 옷을 입는다.
2. 새벽에 건조기에 넣어두었던 호스와 유축기를 챙겨 출근한다.
3. 오전 업무를 마치고 점심시간이 되면 연구실 문을 걸어 잠근다. 호스를 유축기에 연결하고 컵을 가슴에 대고 유축을 시작한다. 왼쪽 가슴, 오른쪽 가슴에서 모유가 더 이상 나오지 않을 때까지 유축한다.
4. 유축이 끝나면 멸균팩을 밀봉하고 네임펜으로 날짜, 시간을 적은 뒤 연구실 냉장고에 보관한다. 수유패드를 교체한다.
5. 사용했던 호수 등을 화장실로 가져가 설거지하고 잘 마르도록 널어둔다.
6. 혼자 점심을 먹는다(수유 때문에 매운 것, 자극적인 것을 먹을 수 없고 유축하는 동안 동료들이 기다릴 수 없으니 혼자 먹는 것이 편하다.).
7. 오후 업무를 마친다. 한 번 더 유축한다. 네임펜으로 라벨링 한다. 점심때 유축했던 멸균팩, 유축기, 그 외 필요한 것들을 가방에 넣는다. 퇴근한다.
8. 집에 도착하면 육아를 시작한다. 2시간 정도의 간격으로 아이에게 수유하고, 트림을 시키고, 재운 뒤 옆에서 쪽잠을 잔다. 너무 피곤하지만 바로 잠이 오지 않는다. 설잠이 들 때 즈음이면 다시 일어난 아이에게 수유한다. 몇 번을 반복하다 보면 동이 트고 또 하루의 해가 떠오른다. 다시 하루가 시작된다.
그래도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수업 시간표를 내 마음대로 설계할 수 없어 매일 같은 패턴으로 유축하지 못할 수도 있고, 입시, 취업, 산학협력 등으로 출장을 가야 하기도 하지만, 이건 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 것이다. 나에게는 개인 연구실이 있으니, 문을 걸어 잠그면 유축할 수 있다. 연구실에는 나의 전용 냉장고가 있어 유축한 모유를 눈치 보지 않고 편하게 보관할 수 있다. 나는 자동차가 있으니 조금 무겁더라도 유축기를 매일 가지고 다닐 수가 있다. 엄마가 도와주시니 그래도 일은 할 수 있다.
내가 만약 일반 회사에 다니는 워킹맘이었다면, 이 일이 가능했을까? 근무 시간 중 시간을 내어 유축하는 것이 불가능할 수 있고, 가능하더라도 유축할만한 마땅한 공간을 찾기가 어려울 수 있다. 유축 후 모유를 보관하기 힘들 수도 있다.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이만하면 괜찮다 생각했다. 타인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 되면 안 되지만, 현재 내 상황은 감사하며 살아야 하는 경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출산 전의 패기는 금방 사라졌다. 나는 모유 수유를 6개월만 하고 그만두어야 했다. 결국은 업무에 쫓겨 유축 텀이 길어지고 점점 모유량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유축기를 사용하는 동안의 우울증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커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나는 아주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6개월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모유 수유를 할 수 있었고, 도와주시는 친정엄마가 있고, 그나마 혼자 짬 내어 쉴 수 있는 연구실이 있어 몸을 더 빨리 회복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수유 시간이 짧아 아쉽지만 이미 지난 과거이고 돌이킬 수 없다. 그냥 지금, 이 순간순간 아이에게 최선을 다하며,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겠다.
(육아를 병행하는 세상의 모든 워킹맘분들, 존경합니다. 언젠간 이 시기도 끝날 것이고 그땐 그랬지.라는 생각이 드는 날이 올 거예요. 저 또한 버텼으니, 여러분들은 더 잘 해내실 거예요.
-누구일지 모를, 이 글을 읽을, 나와 비슷한 상황에 처했거나 처했었던 분들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