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입맛이 없는 임산부
배가 점점 불러왔다. 다행히(?)도 입덧은 없었다. 음식 냄새를 맡으면 구토할 것 같아 잘 챙겨 먹지 못할 수도 있다고 하던데, 레몬 사탕을 한가득 사놓은 것이 무색하게도 입덧하지 않았다. 대신, 입맛이 없었다. 무언가를 먹고 싶다는 생각 자체가 들지 않았다. 평소 좋아하던 음식을 보아도 먹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고, 무언가를 입에 넣고 씹어 삼켜야 한다는 것 자체가 이해가 안 될 지경에 이르렀다. 이렇게 너무 안 먹다가는 뱃속 아기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 같았다. 그래서 겨우 겨우 선택한 것이 사과였다.
아침에 일어나면 냉장고에서 사과 한 알을 꺼냈다. 흐르는 물에 사과를 깨끗하게 씻어 4 등분한 뒤 가운데 씨앗을 없앴다. 1/4 조각은 아침에 먹고, 남은 조각 중 2개는 점심에, 그리고 1개는 저녁에 먹었다. 이렇게 먹으면 속도 괜찮고 역하지도 않을뿐더러, 어쨌든 오늘 하루도 무언가를 먹었다는 것에 안도감이 생겼다. 조금 더 괜찮아져서 무언가를 더 먹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 날엔, 하루 견과 한 봉지를 뜯어서 견과류 3알 정도를 더 챙겨 먹었다.
#2. 옷을 사긴 아까워
매일 이렇게 지낸 덕분인지, 임신을 했어도 별로 티가 나질 않았다. 몸의 다른 곳은 그대로이고 배만 앞으로 동그랗게 나왔다. 그런데도 맞는 옷이 없었다. 배 둘레에 맞추면 다리가 너무 헐렁했다. 임산부들이 왜 원피스만 입는지 이해됐다. 그래봤자 몇 개월 입지 않을 건데, 임산부 전용 옷을 사기는 너무 아까웠다. 엄마의 장롱을 뒤져 넉넉한 원피스 몇 개를 찾아 하루에 한 번씩 갈아입었다. (출산 휴가 중 친정에서 머물렀다.) 어차피 휴직 중이라 옷에 신경 쓸 필요가 없어 편하고 좋았다.
#3. 옷을 어떻게 입어야 할까?
그러던 중, 고비가 찾아왔다. 갑자기 학교에 방문해야 할 일이 생긴 것이다. 우리 학교는 2년에 한 번씩 재계약을 하는데, 내가 출산 휴가로 학교를 떠나 있는 동안 계약 기간이 다시 찾아온 것이다. 교무팀에서 연락이 왔다. O월 O일 O요일, 학교 행정본관 교무처에 방문해서 교무처장님과 직접 대면하고 재계약 서류에 서명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부랴부랴 장롱을 뒤졌다. 우리 엄마가 나보다 배가 통통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엄마가 즐겨 입는 넉넉한 원피스 중 정장 느낌이 나는 것을 몇 벌 골라냈다.
이것저것 입어보며 제일 단정하고, 배가 나온 것이 표가 나지 않으면서 계절감도 맞고 색깔이 무난하고, 무엇보다 남의 옷 빌려 입은 것 같지 않아 보이는 검은색 플리츠 원피스를 골라냈다. 그 와중에 임신 전과는 체질이 바뀌었는지 계속 추위를 타다 보니 스타킹이 필요했고 결국 임산부 전용 옷을 판매하는 가게에 들러 검은색 원피스와 색깔이 맞으면서 평소에도 잘 입을 수 있고 재질이 부드러운 배에 스판이 가득 들어간 레깅스 하나를 구매했다.
스카프로 목을 두르고 동생의 정장 가방을 빌려 어깨에 멘 다음 혹시라도 뱃속의 아기가 추울까 싶어, 어울리지 않는 카디건 하나를 챙겨 입었다. 친정에서 버스 타고, KTX 타고, 다시 버스를 타고 4시간 정도를 쓰며 학교에 도착했다.옷을 고르고, 새로운 레깅스를 사서, 4시간을 달려 학교에 도착했지만 5분 만의 면담 종료와 10초 만의 서명이 약간은 허탈했던 것 같다.
#4. 수박이 먹고 싶어
매일 같이 같은 옷만 입고, 하루에 사과 한 알로만 살고 있는 와이프가 불쌍했는지, 남편은 맛집 여행을 제안했다. 국외 여행은 힘드니, 국내 여행 중 음식이 가장 맛있는 곳이 어딜까 생각하다가 전라도로 여행을 가기로 했다.
전라도는 굳이 맛집을 찾아다니지 않아도, 그냥 문 열고 들어가는 모든 음식점이 맛집이라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가장 왼쪽 아래로 내려가 구불구불 도로를 달리며 경치를 구경하다가 유명지에 들러 사진을 찍고, 그 지역에서 유명한 음식을 (아주 소량씩) 먹으며 보냈다. 하루는 유명한 삼합(소고기, 조개, 버섯)을 파는 가게에 들렀는데 그날따라 왠지 조금은 먹어도 될 것 같은 생각에 삼합 몇 점을 입에 넣었다. 갑자기 무언갈 제대로 먹어서일까? 평소에는 느껴지지 않는 구토감이 느껴지더니, 음식점 화장실에서 그대로 게워냈고 그날 저녁,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2번, 그리고 자다 깨서 2번, 총 4번을 구토했다.
4번의 구토로 몸 상태가 급격하게 좋지 않아져 남편은 여행을 마치고 나를 데리고 바로 집으로 돌아갔다. 그 순간이었다. 임신한 뒤로 무언가를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는데 그날따라 유독 수박이 먹고 싶었다. 마트에 도착했지만, 수박이 나는 계절이 아니라 구할 수가 없었다.
그날 과일 판매대에는 사과가 있었는데, 맛보기 사과를 예쁘게 조각내어 투명한 바구니에 담아 놓은 것을 보고 귀신 들린 듯 사과로 직진한 나는 이쑤시개 하나를 집어 들고, 그 많은 사과 조각을 끊임없이 먹었다. 평소 시식 코너를 잘 이용하지 않을뿐더러 하나 정도만 먹어보고 살지 말지를 결정하는 성격인데, 남이 쳐다보든 말든 상관없이, 투명한 바구니에 담긴 사과가 모조리 없어질 때까지 사과를 먹었다. 웬만하면 말릴 텐데, 남편도 그저 내가 사과를 모조리 없앨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그 많은 사과를 먹어 치워도 성에 차지 않은 나는 남편에게 온갖 투정을 부리며 수박을 사달라고 했다. 한 번도 이런 투정을 받아본 적이 없어 당황한 남편은 백화점에서는 수박을 팔 것 같다며, 나를 데리고 백화점 지하 식품관에 갔다.다행히(?) 백화점 지하 식품관에서는 수박을 팔았는데 계절에 맞지 않은 과일이라 그런지, 고귀한 자태의 수박은 한 통에 5만 원이었다. 임신한 와이프의 첫 투정이라 그런지 남편은 스스럼없이 카트에 수박을 담고 그대로 판매대로 달려갔다. 판매대에서 계산을 기다리고 있는데, 카트 안의 수박을 이상하게 바라보던 한 할머니가 카트 옆에 서 있던 나를 쳐다보고, 볼록 튀어나온 내 배를 한 번 더 쳐다보시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라지셨다.
불행하게도 수박은 너무 맛이 없었지만 계속된 구토로 몸에 수분이 부족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5만 원짜리 백화점표 수박은 하루 만에 사라졌다. 드라마 속 여주인공들이 왜 임신만 하면, 새벽에 잘 자는 남편을 깨워 음식을 사 오라고 투정 부리는지 이해하지 못했는데, 역시 사람은 경험해 봐야 이해하는 동물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