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 편에 이어서 이번에는 미국에 도착 후 첫 출근에 대한 기억을 되짚어 보고자 합니다. 제 PI는 저랑 두 살 밖에 차이가 안 나는 젊은? 교수님입니다. 외국인이긴 하지만 나이 차도 별로 안 나고 이야기하다 보니 겹치는 취미가 많아 대화가 잘 통해 금방 친해질 수 있었습니다. (미국에 온 지 1년이 조금 넘은 현재 저는 교수님과 함께 퇴근 후 헬스도 종종 다니고 단둘이 맥주도 마시러 가는 친한 형 동생 같은 사이가 되었습니다) 교수님을 처음 만날 날 뭔가 연예인을 만난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졸업 준비하면서 이메일로 가끔 연락을 해왔고, 줌으로 한두 번 정도밖에 보지 않았는데, 실제로 만나니 굉장히 신기했습니다. 교수님도 저를 굉장히 반겨주었고, 제가 사용할 오피스와 연구실을 구경시켜 주었습니다. 참고로, 저보다 몇 개월 먼저 합류한 다른 외국인 포닥도 있었기에 같이 담소를 나누며 구경하였습니다. 가장 먼저, 오피스를 구경하러 갔습니다. 오피스 문에 다다르자, 문 중앙에 커다란 이름표 자리가 있었고, 교수님께서는 플라스틱으로 된 제 이름표가 곧 도착할 테니 그것을 끼우면 된다고 했습니다. 사무실에 이름표가 붙는다는 것은 불과 며칠 전만 해도 대학원생이었던 제게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제가 있던 한국 대학에선, 이름표 붙은 방 = 교수님 방이었기에 벌써 뭔가 된 듯한 기분이 들면서 기분이 살짝 좋았습니다. 그리고 동료 포닥과 단둘이 무려 하나의 오피스를 쓰는 것 또한 나만의 프라이빗한 공간을 배정받을 것 같아 괜스레 어깨가 으쓱해지며, 이 맛에 박사를 따는 건가? 하는 기분이 들 정도로 들떴습니다.
하지만, 기분이 좋았던 것도 잠시, 오피스를 지나고 실험실에 도착한 순간, 매우 당황스러운 순간을 마주하였습니다. 우선, 매우 낡은 문을 열고 들어가니, 매우 좁고 낡은 실험실이었습니다. 여기까진 뭐 그럴 수 있다고 칩시다. 하지만, 그 작은 실험실을 다른 교수님 방과 반으로 나눠서 쓰는 것이었습니다. 분명 우리 교수님은 교수로 부임한 지 몇 개월 안 돼서 새로운 실험실을 배정받을 줄 알았는데,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이지? 하는 표정을 짓고 싶었지만, 최대한 티를 안 내며, Wow! It is our lab! I like it! 했습니다. 교수님은 그런 저를 보더니 살짝 웃으며 “사실 우리 실험실은 지금 새롭게 공사 중이고, 2주 정도면 마무리가 될 거야. 그전까지는 여기를 임시로 사용하는 거야. 우리의 진짜 실험실을 지금 보러 가자!”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저는 너무나 안심했지만,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며 교수님을 쫄래쫄래 따라갔습니다.
우리의 새 실험실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고, 그곳에 들어간 순간 저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습니다. 이전 대학원 생활을 했던 연구실도 학과 내에서는 거의 탑 3안에 들 정도로 큰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역시 미국의 유명 대학은 다르구나! 하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새롭게 인테리어를 한 제 연구실은 규모가 이전 연구실보다 3배는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놀라웠던 것은 실험기기용 식기세척기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에선, 실험이 끝나면 설거지해야 하는 게 정말 당연한 일이었는데, 여기서는 쌓아뒀다가 한꺼번에 식기세척기를 돌리면 끝이었습니다. 그런데 오토클레이브는 어딨지? 하는 궁금증을 가지고 실험실을 구석구석 구경하였습니다.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오토클레이브가 보이지 않길래, 아직 구매하지 않았나? 했지만, 그럼 실험을 그동안 어떻게 한 거야?라는 의문점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오토클레이브의 행방을 물었고, 특이한 대답을 얻었습니다. 알고 보니, 오토클레이브 방이 이 건물에 층마다 복도마다 있고, 그곳을 모든 연구실이 공용으로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알던 오토클레이브는 연구실마다 개인적으로 하나씩 가지고 있는 것이었는데, 이곳은 제가 있던 곳과 아주 달랐습니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한국의 시스템이 더 편한 느낌이긴 한데, 그래도 뭔가 이유가 있으니까 이렇게 공동으로 관리하는 게 아닐까요? 짐작해 보건대, 아무래도 오토클레이브는 고온, 고압이니 위험한 기기이니깐 학교 차원에서 관리 감독을 하는 게 안전한 것 같아서 그런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렇게 오토클레이브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하고 실험실을 둘러봤는데, 전기영동 할 때 사용하는 아가로즈겔의 구멍을 만드는 comb(빗 모양 플라스틱)가 색깔별로 다양하게 있는 것을 봤습니다. 그래서 신기하게 쳐다보니, 아니나 다를까 교수님께서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그거 이 건물 지하에서 만든 거야”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저는 이 건물에 이런 것을 파는 매장이 있다는 것으로 알아들었습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이 건물 지하에는 종로의 세운상가와 같이 설계도만 있으면 무엇이든 만들어 주는 3D프린팅 서비스 센터가 있었습니다. 비용은 재룟값만 받기에 comb 하나당 고작 50센트밖에 안 했습니다. 이후에도 저희는 이 3D프린팅 센터를 알차게 이용하여 엄청난 돈을 아낄 수 있었습니다. 하다못해, 현미경에 사용하는 부품도 이걸로 만들어서 몇백 달러를 아끼기도 하였습니다.
연구실 구경을 다 마치고, 교수님께서는 이번 주는 볼일 보고 1주일 뒤에 출근하라는 말과 함께 다시 한번 환영한다는 말로 저를 반겨주었습니다. 그리고 이후에는 동료가 될 포닥(앞으로 종종 등장할 것 같으니 A 포닥이라고 하겠습니다)이 전반적인 것들에 관해서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그중에서 또 신기했던 한 가지는 (앞으로 신기한 것은 계속 나올 겁니다) 우리 실험실이 있는 층에 실험 물품들을 파는 매장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많은 물품들을 구비해놓고 있고, 각 연구실 코드만 입력하면 바로 결제가 되는 매우 편리한 시스템이었습니다. 그때까지 느낀 감상평은 이 대학은 시스템화가 잘되어 있구나라는 것이었습니다. 아직 다른 미국 대학들을 경험해 보진 않아서 이것이 보편적인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여기까지가 제 기억상 미국 도착 후, 2일 동안의 일정이었습니다. 이후에, 근무 시작을 위해 학교 행정실에 자주 들렀고, 텅 빈 집을 채워 넣기 위한 아마존과의 사투, 자동차 구매를 위한 여정, 첫 학과 발표, 영주권 신청, 교통사고 등등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넘쳐납니다. 뭐부터 이야기를 드려야 할지 고민을 해보고 이후 연재 글에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