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nsplash의 Lily Rum 청년은 대학 졸업 후 정규직 취업을 모색하기 위해 인턴사원으로 입사한다. 이름하여 청년인턴. 아직은 짧은 인생의 연륜 탓에 어딘가 모르게 미숙하고, 자신의 것이라고 할 만한 것을 보여주기에는 이른 감이 있다. 조직 생활을 하며 어떤 경험을 하게 되리라, 생각했을까? 한 연구 분야에서 최신 동향을 공유하고 토론하며, 연구자들 간 네트워킹을 강화할 수 있는 심포지엄 행사. 연구자들뿐만 아니라 연구행정가들도 행사 준비부터 당일 진행에 이르기까지 분주하다. 일손이 부족하니 청년인턴에게도 임무가 부여된다. 사진 촬영. 행사 중간중간 부지런히 사진을 촬영했고, 이제 마무리 단체 사진이다. 단상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사진을 찍는 일은, 의외로 그리 단순하지 않다. 우선 기관장과 주요 보직자들 얼굴을 사전에 익혀두었다가, 그들을 가운데에 위치시켜야 한다. 한 명이라도 빠뜨려선 곤란하고, 그들 간의 서열을 파악하여, 1위를 정 가운데에, 차 순위자들을 왼쪽, 오른쪽 번갈아 가며 위치시켜야 한다. 이제 셔터를 누르기만 하면 될까? 아직 아니다. 쭈뼛쭈뼛 모인 이들이 으레 그러듯 어색한 표정이나 굳은 얼굴이어서는 곤란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잠시나마 이들이 웃음 짓게 해야 한다. 살짝 포즈를 곁들일 수 있으면 더 좋다. 다 같이 파이팅을 외치자고, 하트 손짓을 해달라고 주문한다. 앞에서 카메라를 들고 있는 한 사람의 지시에 모두가 따라야 하는 상황인 만큼, 그의 말은 자연스럽고, 납득할 만한 수준이어야 한다. 애당초 이런 막중한 임무를 청년인턴에게 맡긴 것이 실수다. 긴장한 탓인지 청년인턴의 어투는 어눌하고, 말은 센스가 부족하여 다소 엉뚱하기까지 하다. 차라리 어서 사진을 찍고 마무리하면 좋으련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임무를 수행하려다가, 시간만 지체하며 실수를 연발한다.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심포지엄이 끝나고 행사 주관 부서장은 기관장에게 불려 간다. 호된 질책 릴레이는 청년에게까지 이어진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청년은 조직 생활에서 어떤 경험을 하리라 생각했을까, 행정의 경험이란 것이 때론 말도 안 되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예상했을까? 신입 인턴이니만큼 어느 정도의 실수는 이해받을 수 있으리라, 여겼을까? 꿈으로 가득했던 청년의 밝은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드리운다.
흔히들, 나중에는 사진만 남는다고, 사진 찍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심지어 심포지엄 시작 직전, 사회자는, 청중석의 많은 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누군가 중요한 사람이 일찍 자리를 뜰 예정이므로 먼저 기념사진을 찍겠다고, 주요 인물들을 단상으로 불러올린다. 사진을 찍는 동안 다소 민망함은 청중들의 몫으로 남겨진다. 자부심이 남달랐던 한 기관장은, 어느 날, 기관 설립 초창기 시절 함께 고생한 보직자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함께 단체 사진을 찍는다. 다른 사진들과는 다르게, 이 사진은 대형 액자에 들어가,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는, 한 건물 입구 안쪽 벽에 자리를 잡는다. 이십여 년이 지나, 건물은 리모델링에 들어가고, 대형 사진 액자는 어두운 창고로 이동하여 애물단지 신세로 전락한다. 사실 일정 주기로 기관장이 교체될 때마다, 온/오프라인에 걸려 있는 각종 인물사진은 교체되기에 바쁘다. 얼마 전 창고에 들를 일이 있어, 바닥에 있는 그 액자를 보는데, 사진 속 인물들에게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든다. 사진, 남기 쉽지 않다.
사진을, 특히 단체인물 기념사진을 오래 간직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너무 단조롭기 때문이다. 어떤 행사이건, 어떤 상황이건 상관없이, 사진의 중앙에는 모두의 예상대로 가장 높은 직함을 가진 사람이 자리한다. 그는 자연스럽게 그곳에 서기 때문에, 사진기사는 그를 가운데 자리로 안내할 필요도 없다. 때론 변두리 자리로 밀려난 그날의 실질적인 주인공이 당황하기도 한다. 그래도 주인공은 애써 괜찮다고 자위한다. 실체는 자신이 이뤘으니, 겉치레는 그들이 하도록 둔다. 연구 심포지엄 기념사진이라면 누구나가 인정하는 그 분야의 대가가 중심에 서야 하지 않을까. 음악 연주회 기념사진이라면 지휘자가, 건물이나 다리 완공식 기념사진이라면 그것을 설계한 사람이, 국회의원, 시장, 기관장보다 가운데 서야 하지 않을까. 권력을 가진 자가 끄트머리에 서면 자존심이 상하는가. 그런 일에 자존심이 상하면, 가지고 있는 자존심에 문제가 있다는 것 아닌가. 중앙 자리를 양보한 권력자를 보았는가. 그런 희귀 사진이라면 오래 보존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겸손은 어렵다.
새로이 기관장이 부임한다. 사진이 중요해지는 시기다. 더구나 내부가 아닌 외부 발탁 인사다. 부임하자마자 기관 내부 시설을 둘러보는 라운딩을 하는데, 특이한 점이 하나 있다. 곳곳에서 본인의 핸드폰 카메라로 직접 사진을 찍는다. 장소도 찍고 안내하는 직원들과도 함께 연신 사진을 찍는다. 외부에서 왔으니, 모든 것이 새로워서, 또 생소한 직원들의 얼굴도 익히기 위해서 사진을 찍나 보다, 여긴다. 그런 것이라면 괜찮지만, 혹여나 보이는 것에만 치중하는 리더십을 가진 것은 아닌지, 걱정이 앞선다. 벌써 소문이 수상하다. 자유로운 복장보다는 정장을 선호한단다. 눈치 빠른 직원들은 벌써 검은색, 하얀색으로만 이루어진 단조로운 옷차림새를 하고 있다. 보이는 것만이 아닌 보이지 않는 것을, 꾸며진 모습 속에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직원들의 외모보다는 그들의 마음을 볼 줄 아는, 지혜를 가진 사람이길 바라본다.
첫 아이의 돌 무렵, 기념사진을 찍고 나서 좋아라, 보고 있던 내게 연구자 K가 다가온다. 나보다 두 살 많은 인생 선배이자, 쾌활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나를 동생 대하듯, 항상 호의를 가지고 대해주던 그녀다. 자기에게도 좀 보여 달란다. 사진을 보더니 감탄사를 연발하며 아이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는다. 그러더니 사진 파일 몇 개를 자기에게 보내달라고 한다. 그 무렵 내게서 업무적인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한 그녀는 선물로, 작은 앨범을 하나 만들어 주겠다는 것이다. 자기가 얼마 전 그런 기술을 어디서 배웠다며. 얼마 후 하드커버에 아이의 돌 사진 몇 장이 속지로 접혀 있어, 펼쳐 볼 수 있는 예쁜 수제 사진첩을 선물로 받았다. 과분한 선물이었다. 당시 연구행정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어서 큰 도움을 주지도 못했는데.... 성격 참 좋은 연구자였다. 십 년 전 그녀는 갑자기 죽었다. 미혼으로 혼자 살던 그녀는 욕실에서 넘어졌고 119가 아닌 엄마에게 전화했다. 그녀는 그렇게 갔다. 그녀가 남긴 사진 앨범 속 내 아이는 이십여 년 넘게 잘 살고 있다.
’모든 사진은 메멘토 모리*이다.... 모든 사진은 속절없이 흘러가 버리는 시간을 증언해 준다.... 사진은 유사-존재이자 부재의 징표이다‘ 1)사진첩도 마찬가지다.
최근 찍은 사진 속 내 얼굴을 들여다본다. 어느샌가 흰 머리카락은 늘었고, 얼굴엔 주름이 깊게 패었다. 시간의 소행이다. 리얼리즘 사진이라 할 만하다. 어느 노래 가사처럼
2), 계절이 수놓은 시간이란 덤 위에 나약한 사람임을 깨닫는다. 사진의 추억, 좀 아릿하다.
※ 참고
1) <사진에 관하여>, 수전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도서출판 서울, 2005년, p35~36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뜻의 라틴어. 죽음의 필연성을 되새겨주는 징표(가령 해골)를 뜻하기도 한다.
2) ’시간에 기대어‘, 최진 작사, 작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