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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의 생애주기별 고민거리] (5) 박사과정
Bio통신원(메기(필명))
우여곡절 끝에 박사 공부를 시작하게 된 필자는 초반 넘치는 열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오버해 버렸다. 똑똑하게 실험을 디자인하여 10번 할 실험을 2~3번 만에 끝냈으면 좋으련만, 소위 말하는 양치기를 하여 연구의 뚜렷한 목표도 설정하지 않은 채 쓸데없는 에너지와 돈 그리고 시간을 낭비하는 시간을 보냈다. 그 시절에는 다시 박사로 진학한 것에 대해 후회하고 클라우드에 자퇴서를 품고(?) 다녔다.
아무리 해도 뭐가 뭔지 모르겠고, 프로젝트가 다 달랐던 탓에 상의할 동료도 많지 않았다. 잠도 못 자고 실험하는데 결과는 매번 이상했다. 교수님은 또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싶다. 당시에는 믿고 기다려주시길 바랐지만, 인제 와서 보니 아무 업데이트도 안 해주는데 마냥 기다려주는 것도 참 어려운 일이셨을 것 같다. 박사과정이 많지 않았던 연구실에서 교수님이 새로 입학한 나와 동기에게 거는 기대가 매우 컸다. 열심히 하는 것 같으니 채찍질을 더 하셨던 그것으로 생각한다. 그게 그렇게 부담되었다기보다는,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니 너무 속상하고 답답했다. 박사과정이라고 어느 학회에 참석할 때마다 매번 발표해야 했는데, 그럴 때마다 교수님은 결과가 없다며 압박하셨다. 아무리 때려 넣어도 결과가 안 나오니 이쯤 되면 내가 잘 못 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일을 워낙 늦게 마치니 끝나고 맥주 한잔하러 갈 곳도 없었다. 자취방은 친구를 데려가기에도 협소했으니 스트레스 풀 곳도 없었다. 그럴 때면 12시까지 실험하고 심야 영화를 보러 가곤 했는데, 그나마 이것도 서울이라 영화관이 가까워 가능했던 것 같다.
가끔 다른 학교에서 학위를 하는 친구가 같이 놀자고 연락할 때면, 실험 핑계로 쉬기 바빴다. 몇 없는 인맥도 끊길락 말락 할 때쯤, 이래저래 투고한 논문의 revision 실험을 해야 했는데 정말이지 눈물이 났다. 잠을 얼마나 못 잤는지 실험하다가 꾸벅꾸벅 조는 건 일상이요. 누군가와 대화하다가 서서 졸은 적도 있다. 그 시점에는 형광등 불빛에 눈이 너무 부셔서 모자를 쓰고 다녔는데, 머리가 누구한테 얻어맞은 것처럼 아파서 모자에 유독물질이 있나 의심했다. 스트레스와 피로 때문에 머리카락이 암 환자처럼 빠졌고 나중에 보니 정수리가 휑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바쁜 와중에 연구비는 왜땜시 항상 부족한지, 박사과정이라고 매번 과제 제안서를 도맡아 쓰다가 밤을 새우기 일쑤. 어느 해는 과장 하나도 없이 제안서를 10번도 넘게 쓴 적도 있었다. 처음에는 교수님의 일을 왜 우리에게 시키시나 싶어 볼멘소리 했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니 교수님은 어미 새였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어미 새 역할을 자처하셨다고 생각한다. 강의, 보직, 그리고 연구실 관리까지 교수는 정말 사명감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직업이다. 필자는 많은 lab duty 중에서도 연구비를 담당했었는데, 정말 연구실 운영에는 어마어마어마어마무시하게 많은 돈이 필요했다. 한때는 돈이 없어 외상으로 시약을 받아 썼는데 빚이 1억이었던 적도 있다. (지금은 다 갚았다)
매번 제자들이 항체 사달라, 키트 사달라 허락을 맡으러 들어올 때면 교수님도 정말 한숨이 절로 나오셨을 것이다. 우리 교수님은 매우 책임감이 강한 분이시다. 예순을 앞둔 나이에도 여전히 새벽까지 일하시며 학생들의 인건비를 책임지기 위해 불철주야 일하신다. 그리고 당신이 학자로서 연구를 소홀히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시는 것이 몹시 티가 난다. 그런 지도교수님께 사사한 우리는 당연히 열심히 해야 했다.
특히 연구에 목을 매는 제자가 박사과정으로 들어왔으니 당근은 조금 주시고, 채찍질은 아주 많이 하셨다. 그럴 때마다 동료들과 연구실에서 저녁을 시켜 먹고 실험하면서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스트레스를 풀었다. 멋모르던 시절에 열심히 일하는 동기와 함께 논문을 쓴 적이 있었는데, 통금이 있었던 동기네 집 앞 24시 맥도널드에서 추위에 떨며 논문을 쓰다가 첫차를 타고 집에 간 적도 있었다. 그렇게 해서 당시 예상치도 못하게 좋은 저널에 논문이 accept 되었는데 교수님께서 정말 너무 기뻐하셨다. 어느 정도였냐면 accept 메일을 받자마자 연구실로 뛰어 들어오셨는데 발이 반쯤 공중에 떠 있으셨다.😲
그런 모습을 보니, 기대에 부응한 것 같아 기쁘고 그랬다. 웃음도 많고 눈물도 많았던 박사과정.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지만 가장 큰 어려움은 열심히 하는데도 결과가 석연치 않을 때이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박사과정 중 받은 가장 큰 스트레스는, 주위에서 언제 졸업하냐고 물어오는 것이다. 필자 자신도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는 그것을 100% 이해하고 있었지만, 대학원과 인연이 없던 주위 사람들은 그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고 예민한 질문을 해온다. 그들에게 박사 4년이 얼마나 짧은 것인지 박사 5년이 결코 길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것은 쉽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정말 정말 열심히 했던 필자는 (조기졸업은 내가 열심히 한다고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은 일찌감치 깨닫는지 오래였고) 정규 기간 안에 졸업하기 위해 숱한 밤을 새웠는데, 그것이 무색하게 졸업이 하염없이 밀렸다. 논문은 많았지만, 졸업프로젝트가 참 애매했다. 에너지를 쏟아부어 프로젝트를 expanding 했는데, 교수님께선 더 실험해서 좋은 곳에 투고하자고 하셨고, 적당히 하면 부족하다고 타박하셨다. 그 장단에 맞추다 보니 애매한 상태가 되었다. 낮은 곳에 쓰긴 아까웠고 높은 곳에 쓰기엔 뭔가 부족했다. 심지어 여러 이해관계 때문에 당장 투고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영어가 엉망이니 졸업논문 상태도 엉망이었고, 디팬스 심사위원들께 보내기에도 창피했다. 좌절하고 있으니 교수님께서 용기를 주셨다. 충분히 졸업할 수 있으니 준비하라고 하셨다. 그렇게 필자는 졸업했다.
학교마다 다르겠지만, 생각보다 졸업에는 돈이 많이 든다. 논문 심사비도 100만 원 가까이 들었으며, 영어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받았던 영문교열비도 꽤 비쌌다. 시간을 내 심사에 참석해 주신 교수님들께 약소한 선물도 드렸다. 거기에 박사학위 복을 빌리는데도 돈 10만 원은 들었다. 엉터리지만 나에겐 무엇보다 소중한 학위논문 양장본도 여러 부 제본하여 도서관에 제출해야 했고, 심사 교수님들께 드려야 했으니 한 200만 원은 쓴 것 같다. 다행히 필자는 선배의 조언으로 이 정도 돈을 미리 모아놨었기 때문에 부모님께 손 벌릴 일은 없었다.
졸업 디팬스를 했던 날이 생각난다. 생각보다 많이 떨리지 않았던 것이 신기했다. 발표를 마치고 나니 심사위원장께서 잠시 나가 있으라고 하셨는데, 들어오고 나니 “축하해요. 0 박사“라고 하셨다. 그게 뭐라고…. 참 듣기 좋았다. 장장 n 년 간의 대학원 생활이 그렇게 끝났다. 당일 연구실 식구들이 뒤풀이하자고 성화여서 밥을 먹으러 갔었는데, 부모님이 한턱내라고 주신 돈을 보태 간만에 잘 즐겼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나의 졸업을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었던 선배가 2차를 계산하셨고, 취해서 3차에 돈을 보태주겠다며 지갑에서 돈을 뭉텅이로 꺼냈던 후배도 기억난다. 이렇게 보니 난 참 좋은 사람들과 행복한 대학원 생활을 했던 것 같다.
다음날 필자는 출근길에 숙취로 속이 좋지 않아 학교 건물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하루아침에 달라진(?) 사회적 지위와 체면 때문에 차마 일을 치를 수 없었다. 박사가 되고 나서 처음으로 체면을 의식하게 된 순간이었다.
본 기사는 네티즌에 의해 작성되었거나 기관에서 작성된 보도자료로, BRIC의 입장이 아님을 밝힙니다. 또한 내용 중 개인에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사실확인을 꼭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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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인생에서 한 번쯤은 겪을 법한 난관에 여러분이 조금이나마 대비할 수 있도록 필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연재를 진행하려고 한다. 이 연재가 science를 업으로 하게 될 미래의 연구자분들에게 약간의 위안과 도움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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