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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학술지의 탄생과 발전] 2. 정기간행물과 과학학술지의 탄생
Bio통신원(전주홍)
들어가면서
오늘날 과학자는 〈Nature〉, 〈Science〉, 〈Cell〉과 같은 저명한 과학학술지의 권력에 어느 정도 예속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원하는 직장, 막대한 연구비, 고대하던 승진을 떠올리면 이런 현실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저는 다소 낯선 질문을 하나 던져보려 합니다. 이 학술지들은 언제 창간되었을까요? 각각 1869년, 1880년, 1974년에 창간되었습니다. 그렇다면 1869년 이전에도 과학학술지라 부를 만한 것이 존재했을까요? 만약 있었다면, 최초의 과학학술지는 언제, 왜, 그리고 누구에 의해 창간되었을까요?
이러한 질문들은 개별적인 과학 연구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는 않지만, 과학자로서의 삶과 연구의 의미를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이전 글을 바탕으로 정기간행물과 과학학술지의 탄생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1]. 본 주제를 다루기에 앞서, 인쇄술의 발달이 가져온 지식의 범람과 그 사회문화적 의미에 대한 논의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인쇄술 발명의 의미
인쇄술의 발달로 필사에 의존하던 기존의 책 생산 방식에서 벗어나 신속하고 대량으로 책을 생산할 수 있게 되면서, 지식 생태계의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2]. 먼저 책값이 하락하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책을 구매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림 삽입도 훨씬 쉬워져 지식의 시각적 전달이 가능해졌습니다. 이로 인해 수도원이 독점하던 배타적 학문 세계가 약화되었고, 성직자가 아닌 전문지식인이 등장했습니다. 이와 더불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 지식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보급할 수 있게 되면서 도서 시장이 성장하고 저자와 번역가와 같은 지식노동자도 등장했습니다 [3]. 이는 새로운 발견을 공유하고 소통할 수 있는 중요한 기술 환경이 구축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인쇄술이 가져온 사회 변화와 그 충격은 매우 컸습니다. 종교개혁을 이끈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인쇄술은 신이 내린 최고의 선물이자 최선의 선물이다. 왜냐하면 신은 인쇄술을 통해 진정한 종교를 세계 끝까지 알리고 모든 언어로 전달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반면, 영국의 역사학자 존 폭스(John Foxe)는 《순교자들의 책》에서 “교황이 지식과 인쇄술을 없애 버리든지, 아니면 인쇄술이 교황을 뽑아 없애든지 할 것이다”라고 언급했습니다. 이들의 발언은 당시 인쇄술이 가진 사회적 위력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1546년 가톨릭교회가 프로테스탄트와 인쇄술의 부정적 영향을 막기 위해 ‘금서목록’을 제정한 것 역시 사회적 변화와 그에 대한 반응을 반영하는 중요한 지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1564년 베네치아에서 출판된 《금서목록(Index Librorum Prohibitorum)》의 표지.
금서목록은 1546년 가톨릭교회가 트리엔트 공의회(Concilium Tridentinum)에서 정한 것으로 신앙을 위협하는 서적의 출판, 소유, 판매 및 독서를 금지할 목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검열은 오히려 도서 밀거래 시장을 부추기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습니다. 가톨릭교회의 금서목록은 제2바티칸 공의회 결정에 따라 1966년 6월 14일 공식적으로 폐지되었습니다.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Index_Librorum_Prohibitorum_1.jpg
지식의 상업화와 소유권에 대한 비판은 꾸준히 제기되어 왔습니다 [4]. 인쇄술이 등장하기 전에도 “지식은 신의 선물이어서 판매할 수 없다”는 전통적인 주장은 “교사는 노동에 대해 대가를 지급받아야 한다”는 새로운 원칙에 도전받고 있었습니다. 14세기 시인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는 《운명의 극복에 대하여》에서 책을 상품처럼 취급하는 사람들을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인쇄술의 개발과 보급 이후 출판문화와 도서 시장의 형성으로 이러한 비판은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사실 20세기 이후에도 이러한 문제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습니다. 1918년 사회학자 소스타인 베블런(ThorsteinVeblen)은 기업화된 대학의 출현을 지적하며 “미국의 연구 중심 대학은 제도적 구조나 규모, 예산 관리, 공적 평가 방식 상당수에서 노골적으로 기업화되었고, 경영가들이 지식 추구를 장악해 버렸다”라고 한탄한 바 있습니다.
과학 소통의 방식: 시연, 출판, 편지
근대 과학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새로운 발견을 평가하고 검증하는 과학 소통을 바탕으로 비판적 과학 문화가 정착했기 때문입니다. 과학 소통은 주로 세 가지 상호보완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첫째, 소수의 입회자에게 직접 시연하는 방식, 둘째, 출판을 통해 많은 가상의 증인을 확보하는 방식, 셋째 편지를 통해 최근 소식을 신속히 교환하는 방식이 동원되었습니다.
1648년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은 퓌드돔(Puy-de-Dome) 정상, 수도원 정원, 클레르몽 성당 탑 꼭대기의 기압 차이를 비교하는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파스칼은 실험의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해 대중의 입회하에 기압을 측정했습니다. 로버트 보일(Robert Boyle)은 시연 방식을 도입한 퓌드돔 실험을 가리켜 새로운 과학을 정당화하는 ‘결정적 실험(experimentum crucis)’이라고 극찬했습니다 [5]. 그러나 시연 방식은 제한된 인원만이 새로운 지식을 검증하고 공유할 수 있다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연의 한계는 출판을 통해 해결할 수 있었는데, 출판을 통해 훨씬 많은 가상의 증인(virtual witness)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퓌드돔 정상에서 기압을 측정하고 있는 플로린 페리어(Florin Perier). 루이 피기에(Louis Figuier). 1867년
‘결정적 실험’이라는 표현은 로버트 훅(Robert Hooke)과 아이작 뉴턴으로 인해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이보다 앞서 프랜시스 베이컨은 ‘결정적 사례(instantie crucis)’라는 표현을 사용한 바 있습니다.
출처: https://commons.m.wikimedia.org/wiki/File:Florin_P%C3%A9rier_measuring_the_mercury_level_in_a_Torricelli_barometer_near_the_top_of_the_Puy_de_D%C3%B4me.jpg
새로운 지식을 공유하고 공적으로 승인받는 수단으로써 서적의 ‘출판’은 인쇄술의 발전 덕분에 지식 유통 플랫폼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근대 해부학, 생리학, 병리학의 탄생을 이끈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Andreas Vesalius)의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1543), 윌리엄 하비(William Harvey)의 《동물의 심장과 혈액의 운동에 대한 해부학적 연구》(1628), 조반니 모르가니(Giovanni Morgagni)의 《질병의 장소와 원인에 관한 해부학적 연구》(1765)는 모두 서적으로 출판된 연구 결과물입니다 [6]. 이처럼 서적 출판은 오랜 기간의 연구 성과를 모은 ‘대작(magnum opus)’으로서 연구의 완성도를 높이는 장점이 있었지만, ‘지식의 순환 속도’의 측면에서는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서적 출판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과학자들은 편지를 통해 최신 연구 결과를 알리고 우선권을 확보하고자 했습니다. 편지는 사적 소통을 넘어 새로운 지식을 검증하고 공유하는 공적 도구로 발전했으며, 과학자들은 국경을 초월하여 ‘학식의 공화국(Respublica Literaria)’의 일원으로서 학문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을 느꼈습니다. 또한 편지 교환을 통해 형성된 지식 공유 네트워크는 근대 과학에 우호적이지 않았던 대학과 별도로 학술 모임의 결성을 촉진했습니다. 과학자의 수가 증가하고 편지 교환이 활발해지면서, 편지는 점차 오늘날의 학술지 논문과 유사한 성격을 띠게 되었습니다. 편지를 통한 지식 교환과 검증의 흔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남아 있으며, 이는 〈Cancer Letters〉나 〈FEBS Letters〉와 같은 학술지 이름, 짧은 분량의 연구 논문을 ‘Letter’로 칭하는 경우, 그리고 학술지의 ‘Letters to the Editor’ 섹션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최초의 정기간행물 〈주르날 데 사방〉
편지 교환을 통해 새로운 지식의 검증과 확산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었지만, 여러 학자가 동시에 지식을 교환하고 의견을 나누는 데는 여전히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또한 이동 수단이 여의찮은 상황에서 학술 모임을 자주 개최하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당시 과학자들은 어떻게 편지 교환의 한계와 제약을 극복했을까요? 여러 편지를 모아 하나의 책으로 출판하는 방법은 내용이 다소 이질적일지라도 다양한 최신 소식을 전달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17세기 중반을 지나 편지를 교환하는 지적 활동은 평론지나 학술지의 형태의 정기간행물 발간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1665년 1월 5일 월요일 발간된 〈주르날 데 사방〉의 표지.
첫 번째 호는 12페이지짜리 팜플릿 형태로 발간되었습니다. 프랑스 대혁명 기간 중인 1792년 출판이 중단되었습니다. 참고로 ‘잡지’를 뜻하는 ‘magazine'이라는 용어는 1731년 영국의 인쇄업자 에드워드 케이브(Edward Cave)에 의해 창간된 〈젠틀맨스 매거진(Gentleman's magzine)〉에서 처음 사용되었습니다. 영어 단어 'magazine'의 어원은 창고나 저장소를 뜻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1665_journal_des_scavans_title.jpg
최초의 정기간행물은 1665년 1월 5일 프랑스에서 탄생했습니다. 프랑스의 작가이자 법률가인 데니스 드 살로(Denis de Sallo)에 의해 창간된 〈주르날 데 사방(Journal des Scavans)〉이 그 주인공입니다. ‘주르날(journal)’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정기적으로 출판되는 저작물을 의미하며, 중세 불어 ‘scavans’는 ‘scavant’의 복수형으로 현명한 사람들을 뜻합니다. 〈주르날 데 사방〉은 과학, 문학, 법률, 신학, 유명인의 부고 기사, 신간 소개 등 다양한 소식을 전하며, 학식의 공화국에서 중요한 지식 유통 도구로 자리 잡았습니다. 하지만 〈주르날 데 사방〉의 내용은 과학 분야에만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므로 이를 정기적으로 간행된 과학학술지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주르날 데 사방〉의 인기는 당시 암스테르담과 퀼른 등지에서 해적 출판이 있었던 점에서 가늠할 수 있습니다. 1665년에 〈주르날 데 사방〉이 발간된 이후, 같은 해에 영국에서 〈철학회보(Philosophical Transactions)〉가, 1668년에는 로마에서 〈지식인의 저널(Giornale de’ Letterati)〉가 연이어 창간되었습니다. 이는 당시 정기간행물에 대한 수요가 이미 잠재적으로 존재했음을 시사합니다.
최초의 과학학술지 〈철학회보〉
최초의 과학학술지 〈철학회보〉는 〈주르날 데 사방〉보다 두 달 늦은 1665년 3월 6일에 영국에서 창간되었습니다. 〈철학회보〉는 과학에 관련된 주제의 편지만을 모아 출판한 최초의 정기간행물로, 19세기까지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과학학술지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이 학술지의 주된 내용은 영국과 유럽 전역 과학자들의 편지 발췌, 최근에 출간된 서적의 검토와 요약, 과학자들의 관찰과 실험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철학회보〉는 왕립학회의 공식 학술지로서 현재까지도 지속적으로 발간되고 있습니다 [7].
1665년 3월 6일 월요일 발간된 〈철학회보〉의 표지.
〈철학회보〉는 왕립학회의 총무들의 개인적 노력으로 정기적으로 발간되었고, 1752년부터는 왕립학회가 직접 발간하기 시작했습니다. 〈철학회보〉는 당시 최근 이루어진 과학적 발견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종료된 연구보다 현재 진행 중인 연구를 주로 다루었습니다. 또한 자연을 이해하는 데 있어 경험적 관찰이나 측정을 정확하게 기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여겼습니다. 편지를 모아 〈철학회보〉를 발간했기 때문에 특별히 구조화되거나 표준화된 형식을 갖추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논문은 영어로 작성되었으나, 천문학과 수학 논문은 라틴어로도 발표되었습니다.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Philosophical_Transactions_Volume_1_frontispiece.jpg
〈철학회보〉의 창간을 논할 때 헨리 올덴버그(Henry Oldenburg)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8]. 최초의 왕립학회 총무(secretary)였던 올덴버그는 유럽 전역의 과학자들에게 편지를 보내 최신 과학 지식을 수집하는 데 열중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편지 교환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구독자를 모집하고 수익을 창출하려는 지식 사업을 구상했습니다. 비록 개인 사업으로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올덴버그의 노력 덕분에 〈철학회보〉는 왕립학회의 공식 회보로 자리 잡았으며, 왕립학회의 과학적 성과를 널리 알리고 과학 발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었습니다. 〈철학회보〉는 창간 초기부터 의학 논문을 게재했으며, 18세기 초부터는 라틴어로 작성된 의학 관련 논문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9].
유럽의 과학자들은 〈철학회보〉를 통해 새로운 발견과 지식을 공유하며 공식적으로 우선권을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10]. 〈철학회보〉는 베이컨의 지적 기획과 이상을 실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철학회보〉는 공간적, 지리적 장벽을 넘어 과학자들의 학문 공동체 의식을 고취하는 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진화론의 옹호자로 잘 알려진 토머스 헉슬리(Thomas Huxley)는 1866년 ‘자연 지식의 향상에 대한 조언(On the Advisableness of Improving Natural Knowledge)’을 주제로 진행한 한 연설에서 “전 세계의 모든 책이 파괴되더라도 〈철학회보〉만 남아 있다면 물상과학(physical science)의 근간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며 지난 두 세기 동안 이룩한 거대한 지적 진보는 대부분 기록으로 남아 있을 것”이라고 평가하며 〈철학회보〉의 중요성을 높이 샀습니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신기관(Novum Organum)》의 권두화. 1620년.
헤라클레스의 기둥(지브롤터해협 양쪽)을 지나 미지의 대서양으로 떠나는 범선 모습이 보입니다. 오래된 도리아 양식의 기둥은 구세계의 질서와 틀에서 벗어나야만 새로운 지적 세계에 도달할 수 있음을 일러줍니다. 지적 항해를 떠나는 범선의 모습에서 새로운 지식을 찾는 일이 온갖 풍파를 맞고 견뎌야 하는 고단한 작업임을 여실히 느낄 수 있습니다. 범선 아래 적힌 “많은 사람이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Multi pertransibunt & augebitur scientia)”라는 다니엘 12장 4절의 구절은 ’대혁신(Instauratio Magna)‘을 꿈꾸었던 베이컨의 고민을 잘 드러냅니다. 후대 과학자들은 〈철학회보〉를 통해 베이컨의 열망을 어느 정도 실현할 수 있었습니다.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Novum_Organum.jpg
나오면서
이번 글에서는 최초의 과학학술지를 간략하게 다루어 보았습니다. 17세기 중반 과학자들이 과학 연구에 깊이 몰두하고, 학술 모임을 결성하며, 과학학술지를 발간하고자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철학회보〉 첫 호 서문에 적힌 “[...]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지식을 서로에게 전하고, 자연 지식을 향상시키고, 모든 철학적 기술과 과학을 완성하는 웅장한 설계에 기여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 왕국의 명예와 이익, 인류의 보편적 선을 위한 것이다”라는 구절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이러한 질문은 연구와 논문의 의미를 새롭게 되새기게 하며, 데이비드 브룩스(David Brooks)가 《인간의 품격: 삶은 성공이 아닌 성장의 이야기다》에서 지적한 현대 사회의 결함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합니다. 열정과 성찰 없이 오직 이익만을 추구하고, 성공만을 위해 자신을 부풀리며, 타인의 인정에만 몰두하고, 외적인 찬사를 삶의 척도로 삼는 시대에 과학자는 어떤 고민과 성찰을 해야 할까요?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핼릿 카(Edward Hallett Carr)는 “역사는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과거의 지적 배경과 사상의 흐름을 이해하고 그에 친숙해진다면 오늘날의 과학에 대한 이해도 한층 깊어질 수 있습니다. 또한 과거와 현재의 지적 맥락을 바탕으로 연구의 의미를 성찰하고 지식을 추구한다면 과학적 논의는 더욱 풍부하고 심도 있는 것이 될 것입니다.
미주 및 추천도서
1. 본 연재는 필자(전주홍,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생리학교실)의 두 저서인 《과학하는 마음》(바다출판사, 2021)과 《논문이라는 창으로 본 과학》(지성사, 2019) 그리고 교내 수업인 ‘의생명과학연구의 융합적 이해’와 ‘의생명과학 논문의 이해’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했습니다.
2. 키스 휴스턴 지음, 이은진 옮김. 《책의 책》(김영사, 2019); 테틀레프 블룸 지음, 정일주 옮김. 《책의 문화사》(생각비행, 2015); 뤼시앵 페브르・앙리 장 마르탱 지음, 강주헌・배영란 옮김. 《책의 탄생》(돌베개, 2014); 피터 버크 지음, 박광식 옮김. 《지식의 사회사 1. 구텐베르크에서 디드로까지》(민음사, 2017)
3. 1470년 17곳에 불과했던 유럽의 인쇄소는 1480년에 121곳으로, 1490년이 되자 204곳으로 늘어났습니다. 1500년에 이르러 저자명, 도서명, 출판 장소, 출판사 이름과 발행 연도를 적는 판권 형식이 도입되었습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등장하고 50년간 인쇄된 책은 그 이전 1,000년간 필사된 책의 수를 훨씬 능가했습니다. 1550년쯤에는 책이 너무 많다 보니 제목조차 읽을 시간이 없다는 불평도 생겨났다.
4. 지식이 거래의 대상이자 하나의 제품으로 취급되기 시작한 것은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에게서 찾아볼 수 있을 만큼 오래된 일입니다. 로마의 철학자이자 정치가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는 지식을 소유물로 간주했습니다. ‘표절(plagiarism)’이라는 단어는 원래 고대 로마에서 노예를 훔쳐 간 사람을 의미했습니다. 1709년 영국에서 제정된 저작권법은 당시 지식에 대한 인식을 보여줍니다. 흥미롭게도 토머스 스프랫(Thomas Sprat)은 《왕립학회의 역사》에서 ‘지식의 은행’과 같은 경제적 은유를 자주 사용했습니다.
5. 로버트 보일은 실험에 참관한 증인들을 살인 사건 재판의 증인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사실(fact)’이라는 용어는 자체도 원래 법정에서 사용된 개념입니다. 한편 ‘결정적 실험’이라는 개념에 대한 반론으로 피에르 뒤앙(Pierre Duhem)과 윌러드 콰인(Willard Quine)이 주장한 ‘자료에 의한 이론 미결정성’이 있습니다. 오늘날 과학에서는 하나의 실험 데이터로 최종 결론에 도달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에, 실험생물학자라면 이론 미결정성의 문제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철학자 루돌프 카르납(Rudolf Carnap)이 제안한 ‘총체적 증거의 원리’나 철학자 칼 헴펠(Carl Hempel)의 “가설의 확증은 수집된 증거의 양과 다양성에 크게 의존한다”는 견해에 실험생물학자들은 대부분 동의할 것입니다.
6. 베살리우스의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는 티치아노 베첼리오(Tiziano Vecellio)의 제자인 얀 스테펜 반 칼카르(Jan Steven van Calcar)의 도움을 받아 출간된 것으로 갈레노스의 해부학 이론에 많은 오류가 있음을 밝혀냈습니다. 하비의 《동물의 심장과 혈액의 운동에 대한 해부학적 연구》은 혈관 구조에 관한 지식, 혈액량에 대한 수학적 추산, 실험적 방법을 통해 혈액이 우리 몸을 순환한다는 사실을 밝혀, 혈액이 말초에서 소모된다는 갈레노스의 이론에 큰 타격을 입혔습니다. 모르가니의 《질병의 장소와 원인에 관한 해부학적 연구》는 환자의 생전 임상소견과 사후 부검 소견을 연관시켜, 특정 장기의 손상이 질병의 원인이라는 해부병리학을 주장함으로써 갈레노스의 체액병리학 이론을 무너뜨리는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7. 다만 과학적 발견의 범위와 깊이가 전례 없이 확장됨에 따라 1887년부터 두 개의 별도 분야로 나누어 발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수학과 물리학 관련 연구는 〈철학회보-A〉에 실리고, 의학과 생물학 관련 연구는 〈철학회보-B〉에서 다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철학회보〉의 역사에 관해서는 왕립학회 홈페이지(https://royalsociety.org/about-us/who-we-are/history/)를 참고하거나 〈철학회보〉 발간 350주년을 기념하여 왕립학회에서 만든 자료를 참고하길 바랍니다. https://royalsociety.org/-/media/journals/publishing/publishing-350-exhibition-catalogue.pdf
8. 헨리 올덴버그는 독일 브레멘에서 태어나 네덜란드 위트레흐트와 영국 옥스퍼드에서 학문을 수련했습니다. 그는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라틴어에 능통했으며, 특히 영어 실력이 뛰어나 영국의 시인 존 밀턴(John Milton)으로부터 가장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는 외국인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습니다. 올덴버그는 영국 귀족 자제의 가정교사로 활동했으며, 당시 영국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 중 하나인 로버트 보일의 조카를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뛰어난 언어적, 학문적 능력과 경력 덕분에 올덴버그는 과학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 전역의 과학자들과 활발하게 편지를 교환하며 새로운 과학 지식을 수집하고 유통시킬 수 있었습니다(https://makingscience.royalsociety.org/people/na8001/henry-oldenburg). 이러한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그가 창간한 과학 정기간행물의 정식 명칭은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활동 중인 기발한 사람들의 지식과 연구 및 노력에 대해 설명하는 철학회보(Philosophical Transactions Giving Some Account of the Present Understanding, Studies, and Labours of the Ingenious in Many Considerable Parts of the World)〉였습니다.
9. 〈철학회보〉가 발간된 이후 곧 의학 분야에 특화된 전문학술지도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예를 들어 1673년에는 코펜하겐에서 〈Acta Medica et Philosophica Hafniensia〉, 1679년에는 프랑스에서 〈Nouvelles Découvertes sur toutes les parties de la Médecine〉, 1684년 에는 영국에서 〈Medicina Curiosa〉가 창간되었습니다.
10. 중세 시대 저자를 뜻하는 ‘auctor’라는 단어는 주로 권위를 의미했습니다. 당시에는 어떤 저술가도 함부로 저자로 불리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윌리엄 셰익스피어조차 그의 사후에야 저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점은 오늘날 저자의 의미를 새롭게 고민해 보게 만듭니다.
본 기사는 네티즌에 의해 작성되었거나 기관에서 작성된 보도자료로, BRIC의 입장이 아님을 밝힙니다. 또한 내용 중 개인에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사실확인을 꼭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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