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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의 생애주기별 고민거리] (1) 연재를 시작하며
Bio통신원(메기)
필자는 biology를 전공한 연구원이며, 현재 해외 연구소에서 Offer를 받고 출국을 준비 중이다. 오랜 기간 이 업계에 몸담으면서 참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필자는 이 연재를 통해 그동안 겪었던 고민들을 공유하고, 어떻게 극복하고 결정을 내렸는지를 에세이 형식으로 풀어내려 한다. 이 글은 다른 연재글처럼 유익한 정보 위주의 글은 아니지만, 여러분이 이미 겪었거나 앞으로 겪을 고민들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필자의 글을 읽고 여러분들이 나름의 희망을 가지길 바란다.
필자는 이미 몇 년 전 박사학위를 받았으나, 코로나 핑계로 취업과 해외 포닥 중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자연스럽게 오랜 시간 국내 포닥 신분으로 시간을 보냈다. 대학원에 입학할 때부터 해외 포닥에 대한 강한 동경이 있었지만, 막상 졸업하고 나니 해외로 나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인맥도 부족했고, 영어도 서툴렀다. 비교적 빨리 학위를 마친 탓에, 아직 시간이 많다는 착각에 빠져있었다. 몇 년의 시간이 흘렀을 때, 진짜 취업과 해외 포닥 중에 선택을 해야 하는 시기가 왔고, 결국 연구에 대한 열망을 버리지 못하고 용감하게 해외 포닥을 가기로 결정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뚜렷한 성과 없이 진로 고민을 하고 있는 무척 평범한(?) 박사 중 한 명이기도 하다.
AI tool을 이용하여 생성한 Ph.D의 삶
: 고민의 연속이다.
돌이켜보면 참 순진했던 것 같다. 워라밸은 사치였고, 삶도 연구, 워킹도 연구라고 타이르며 온 에너지를 쏟아붓는 삶을 살았다(물론 지금까지도 그러고 있다.). 졸업이라는 목표만 보고 수년을 전력질주해 왔는데, 그 목표가 사라지니 허망하기까지 했다. 무엇을 하는 것이 좋을지, 무슨 연구를 해야 할지, 그리고 지도 교수님께 어느 정도로 선을 그어야 하는지(?)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그 핑계로 졸업 이후의 진로에 대한 decision making을 끊임없이 미뤘다. 지도 교수님과의 원만한 관계를 위해 취업과 해외 포닥은 나중 일이라 미루며 연구에만 몰두했으며, 그럴 때마다 논문은 쌓여갔지만, 그러다 보니 진로 고민은 뒷전이었다. 당장 눈앞의 논문이 더 중요했다. 그러다 미친 듯이 오르는 물가, 부동산, 그리고 결혼과 취업에 전혀 대비하지 못한 채 10년에 가까운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가버렸다.
알다시피 많이 좋아졌다고 해도, 박사 과정생이 받는 월급은 직장인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다. 요즘 보니 일부 석사 과정생들의 경우 24~25살에 200이 넘는 돈을 받는 경우도 있어 웬만한 직장인 부럽지 않을 것 같으나, 박사 과정생의 경우 제아무리 최대 금액(~300만 원)까지 받는다 해도 또래 직장인처럼 살아가기엔 부족할 수밖에 없다.
내가 학위를 하는 동안(꽤 긴 시간이었지만), 감사하게도 부모님 모두 현직에 계셨기 때문에 가정에 경제적인 어려움은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늘 가족에게 부담스러운 존재였다(지금까지도 그렇다.), 서른이 다 된 자녀가 아직도 “공부 중”이라는 것이 부모님에게 심리적인 부담으로 느껴지셨을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눈치 없이 용돈을 타 쓰는 것도, 핸드폰 요금을 내 달라고 하는 것도, 하다못해 심부름을 하고 물건 값을 달라 말하는 것조차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학교에서 받는 인건비는 대부분 자급자족을 위한 생활비로 나갔다.
그도 그럴 것이 대기업 및 중견기업에서 안정적으로 일하고 있는 또래의 연봉, 복지, 성과금에 비하면 학위 과정 중에 받는 월급은 정말 너무나 보잘것없다(그나마 다행이라면, 따로 알바를 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는 점). 아끼고 아껴서 조금씩 모아둔 돈은, 결혼을 하기에도, 부동산 투자를 하기에도, 서울에 따로 번듯한 자취방을 구하기에도 턱없이 모자란 돈이었다.
졸업만 하면, 돈을 포함한 모든 것이 다 해결될 줄 알았는데, 박사가 되니 모든 문제는 더 심각하게 다가왔다. 지도 교수님 밑에서 연구만 해오던 내가, 이제는 모든 것을 온전히 스스로 결정하고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감도 있었다. "왕관의 무게를 견뎌라"는 조언도 들었지만, 박사라는 것이 왕관이 맞기는 한 건가 싶었다. 한 해 한 해 정신력과 체력을 소모하며 보냈고 결국엔 그렇게 좋아하던 연구에 질려버렸다. 연구실을 떠나려 해도 박사라고 취업이 쉬운 것도 아니었으며, 대부분의 연구소들도 고용은 늘 불안정했고, 복지는 빈약했다. 대학에서 작성하는 근무 계약서는 사실 의미 없는 종이쪼가리에 불과했으니 제대로 휴가를 가본 적도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부모님은 졸업한 자녀가 대학에서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에 의문을 가지며 얼굴만 보면 왜 취업하지 않느냐고 타박하셨다. 국내포닥은 직업으로 쳐주지 않으셨다.
결국엔 모든 것은 먹고살자고 하는 일이니,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도 벌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연봉도 턱없이 적었다. 적어도 내 주변의 신입 포닥들의 인건비는 거의 최저임금에 가까웠다. 부모님을 설득하기엔 모든 것이 부족했다. 주위에 대학원을 다니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 분야의 분위기를 모르셨다. 해외에 가고 싶다고 해도 왜 공부를 더 해야 하느냐고 노골적으로 싫어하셨다. 지금은 응원해 주시지만, 아마 결혼을 안 한 자녀가 해외에 간다고 하면 걱정되는 것이 사실일 것이다. 해외에서 주는 인건비로는 미국에서 생활하기에도 빠듯할 것이고, 몇 년 있다 한국에 들어오더라도 빚이 없으면 다행일 것이니, 걱정되는 것도 당연한 듯싶다.
자녀가 고3이면 대학 입시, 대학에 가면 취업, 취업하면 결혼, 결혼하면 임신, 출산, 육아, 그리고 그것마저 다 해결되면 부동산 걱정이라지 않는가? 부모님의 걱정은 끝이 없다.
졸업 이후의 내 진로 고민도 문제였지만, 부모님과 주위 지인들에게 내 상태에 대해 끊임없이 변명(?) 해야 하는 것도 큰 스트레스였다. 해외 포닥을 가기로 결정해도, 기혼 박사는 외국에 가야 하니 배우자를 설득하는 것이 문제였고, 미혼 박사는 갔다 와서 결혼하는 것이 문제였다. 졸업 이후 자괴감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해외 포닥이라니? 꿈꿔왔던 이상과 실제 현실에는 꽤 큰 괴리감이 있었고, 그걸 너무 늦게 알아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작 굳게 마음먹은 연구원분들은 갓난아이를 데리고서도 가는 게 해외포닥이었다. 그분들도 그들 나름대로의 말 못 한 고충이 있었으리라. 연구가 뭐길래 이렇게 박사들을 끊임없이 고민하게 만드는 것인지, 우리의 인생은 참으로 단순하면서도 또 복잡하다. 남들이 대학교 졸업 때 진작에 끝내 놓은 고민을 왜 우리는 아직도 해야 하는 건가 싶을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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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인생에서 한 번쯤은 겪을 법한 난관에 여러분이 조금이나마 대비할 수 있도록 필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연재를 진행하려고 한다. 이 연재가 science를 업으로 하게 될 미래의 연구자분들에게 약간의 위안과 도움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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