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외 바이오 관련 동향 뉴스를 신속하게 제공합니다.
뉴스 종합
[과학학술지의 탄생과 발전] 1. 지적 풍토의 변화와 학술 모임의 등장
Bio통신원(전주홍)
들어가면서
과학자에게 논문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현실적 측면에서 보면 졸업의 관문이자 취업과 승진의 지름길이자 연구비 수주의 보증수표라고 말하는 것도 그다지 어색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떻게 논문을 써야 하는지나 어떻게 해야 영향력이 큰 논문을 쓸 수 있는지와 같은 실용적인 질문이 매우 중요해졌습니다. 경쟁 사회를 살아가는 일원으로서 이와 같은 고민을 해보지 않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다만 이 정도에서 고민이 끝난다면 쉴 새도 없이 앞만 보고 정신없이 달려가는 인생이나 다를 게 없을 것 같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저는 4회에 걸쳐 과학학술지의 탄생과 발전의 과정을 간략하게 살피면서 연구와 논문의 의미를 되짚어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이 글이 아무쪼록 과학자로서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1].
지적 풍토의 변화
새로움이 없다는 생각은 중세 시대를 지배했습니다. 수도원은 고전 문헌을 필사하여 지식을 보존하고 전승하는 역할만 주로 담당했습니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것이 없나니”라는 전도서의 한 구절이 이러한 상황을 잘 대변해 주는 것 같습니다. 12세기가 되기 전까지는 수도원 밖에서 성직자가 아닌 학자를 만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십자군 전쟁을 거치면서 중세 유럽은 고요함 속에서 엄청난 변화를 일으킬 힘을 축적했습니다 [2]. 특히 1492년 이후 대항해의 시대가 열리면서 신대륙으로부터 새로운 동식물이 들어오자 새로운 발견과 지식이라는 개념이 수용되고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3]. 바라보는 방식이 바뀌자 유럽 세계 내에서도 얼마든지 새로운 발견이 가능하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탐사뿐만 아니라 실험을 통해서도 새로운 지식이 생산되기 시작하자 더욱더 경쟁적인 지적 풍토가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발견이 활발해지자 정보공유의 문제가 불거졌습니다. 1647년 영국의 경제학자 윌리엄 페티(William Petty)는 영국의 박식가 새뮤얼 하트리브(Samuel Hartlib)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는 많은 재치와 독창성이 세상에 흩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미 발명된 것을 발명하려고 노력을 기울이는 경우가 허다하다. 정보를 쉽게 얻지 못해 어떤 일이든 금세 어려움에 봉착하기도 한다.”라는 말로 정보공유의 위기를 지적한 바 있습니다 [4].
그뿐만 아니라 새로운 발견에 이름을 붙이는 문제와 함께 우선권 주장과 인정이라는 문제도 새롭게 대두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문제가 나타났다는 말은 발견에 대한 논쟁을 판결할 수 있는 전문가 공동체가 형성되었고 판단 기준이 마련되었음을 일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당시 자연철학자(과학자)들은 어떤 방식으로 새로운 지식을 공유하고 공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을까요? 그런 방법 가운데 하나가 편지를 교환하는 것이었습니다.
호기심의 방(cabinet of curiosities). 올레 웜(Ole Worm)의 동판화. 1655년
호기심의 방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수집물을 백과사전식으로 모아둔 장소로서 유럽에서 16세기 중반부터 형성되어 17세기에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호기심의 방의 등장은 새로운 발견에 대한 개념이 수용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또한 호기심의 방은 사회적 지위를 확립하고 유지하기 위한 사회적 장치의 역할도 했습니다.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Museum_Wormiani_Historia_1655_Wellcome_L0000128.jpg
당시 편지는 지식 공유 네트워크 형성의 아주 중요한 도구였습니다. 자연철학자들은 편지로 지식을 교환하면서 국경을 초월하여 ‘학식의 공화국(Respublica Literaria)’이라 불린 학문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을 보였습니다 [5]. 예를 들어 프랑스의 철학자 마랭 메르센(Marin Mersenne)은 갈릴레오, 홉스, 데카르트, 가상디 등과 활발하게 편지를 교환하면서 당대 학자들과 학문적 교류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런 편지 교환을 통해 새로운 지식의 검증과 확산의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편지를 통한 교류만으로는 여러 학자가 동시에 지식을 교환하고 의견을 나누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 같이 직접 만나서 교류하는 학술 모임의 결성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17세까지도 스콜라 철학이 위세를 떨쳤기 때문에 유럽의 대학은 근대 과학의 개념에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대학과 별도로 학술 모임, 즉 학회(society)를 꾸려 활동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되었습니다.
학술 모임의 등장
고대 그리스 이후 새로운 지식을 추구하는 학술 모임이 출현하기 시작한 시점은 15세기 말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습니다 [6]. 1492년 베네치아의 인쇄업자이자 인문주의자 알두스 마누티우스(Aldus Manutius)는 아카데미 알디나(Accademia Aldina)를 설립하여 고전 문헌의 인쇄와 관련된 문헌학 문제를 다루고 새로운 사상을 논의했습니다 [7]. 학술 모임의 등장은 학문의 발전이 가속화되고 학문의 사회정치적 성격이 본격적으로 나타났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보다 더 과학에 초점을 맞춘 학술 모임은 16세기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표적인 학술 모임으로는 1560년 나폴리에서 결성된 자연의 신비 아카데미(Academia Secretorum Naturae), 1603년 로마에서 결성된 린체이 아카데미(Accademia del Lincei), 1657년 피렌체에서 결성된 아카데미아 델 치멘토(Accademia del Cimento) 등을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대부분의 모임이 오래 지속되지 못했고 후원자의 사정이나 사망에 따라 모임의 존속 여부가 결정 났습니다.
1660년 영국에서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공식적인 학술 모임이 등장했습니다. 베이컨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노력했던 자연철학자들이 두 개의 비공식적 모임인 보이지 않는 대학(Invisible College)과 실험 철학 클럽(Experimental Philosophical Club)을 바탕으로 ‘물리, 수학, 실험 학습 촉진을 위한 대학’을 설립한 것입니다 [8]. 2년 뒤 찰스 2세(Charles II) 국왕으로부터 런던 왕립학회 창설에 관한 왕실 헌장을 수여받았고, 이듬해 두 번째 헌장을 통해 찰스 2세를 왕립학회의 창립자이자 후원자로 명시했습니다.
1667년 토머스 스프랫(Thomas Sprat)이 쓴 《왕립학회의 역사》의 권두화
스프랫은 실험적 방법이 진실의 확실성을 담보하기 때문에 철학의 논쟁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하느님의 전령인 천사가 찰스 2세(가운데 흉상)에게 월계관을 씌어주고 있습니다. 왕립학회의 초대회장 윌리엄 브롱커(왼쪽)가 손가락은 찰스 2세가 왕립학회의 창립자이자 후원자임을 가리키고 있고 개혁가 프랜시스 베이컨(오른쪽)은 측정장치와 실험 도구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왼쪽 벽 책장 위에 저울과 시계가 놓여있고, 그 옆으로 로버트 보일(Robert Boyle)과 로버트 훅(Robert Hooke)이 사용한 공기 펌프도 보입니다. 찰스 2세의 흉상 위에는 왕립학회의 모토인 ‘Nullius in Verba’가 적혀 있습니다.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A_History_of_the_Royal_Society,_by_Thomas_Sprat_(frontispiece).jpg
왕립학회의 모토는 “누구의 말도 의지하지 마라(Nullius in Verba)”로 “확신에서 출발하면 의심으로 끝나지만 의심에서 출발하면 확신으로 끝날 것이다”라는 베이컨의 비판적 정신이 잘 드러납니다 [9]. 이는 관찰과 실험을 통해 확인되지 않은 고대 이론의 권위에 기대지 말고 가능한 모든 것을 시험하고 확인하는 자세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그대로 믿지 말라는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1684년 리처드 월러(Richard Waller)가 번역한 《자연 실험 에세이(Essayes of Natural Experiments)》의 권두화
1668년 아카데미아 델 치멘토가 펴낸 《Saggidi Naturali Esperienze》를 월러가 번역했고 권두화도 직접 그렸습니다. 월러는 권두화를 통해 왕립학회의 정신이 잘 드러나도록 했습니다. 의인화된 아카데미아 델 시멘토(Academia del Cimento)는 번역본을 왕립학회(Societas Regia)에게 건네고 있습니다. 대자연(Diva Natura)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응시하면서 번역본을 건네는 것을 승인하고 있습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보다는 실험적으로 생산한 지식이 ‘진짜 지식의 진흥’이라는 학회의 목적에 기여하는 방식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Essayes_of_Natural_Experiments.jpg
런던 왕립학회 이후, 프랑스에서는 1666년 과학 아카데미(Académie des sciences)가 설립되는 등 여러 학술 모임들이 공식적 기구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10]. 이는 과학자들이 협력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거나 상호 비판과 경쟁을 통해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조성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연구 성과를 평가하고 공적으로 인정하는 규범이 세워졌다는 것도 일러줍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과학 연구가 공식적인 공동체적 활동으로 전환되었다는 뜻입니다.
특정 분야의 과학자들이 학회를 결성하는 것은 패러다임의 공유와 관련이 깊습니다. 토마스 쿤(Thomas Kuhn)은 학회에 소속된 대다수 과학자는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하면서 평생에 걸쳐 패러다임을 명료화하는 데에 헌신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실제로 과학자들은 학술지에 연구 결과를 활발히 발표하면서 학회에 대한 소속감과 자의식을 강하게 표출하고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학술 모임의 결성은 학술지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나오면서
이번 글에서는 학술 모임이 등장한 배경과 의미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았습니다. 근대 과학의 성공 요인은 실험과 측정뿐만 아니라 새로운 발견을 평가하고 수용하는 비판적 과학 문화의 정착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연금술도 실험과 측정에 바탕을 두었지만 베이컨이 신랄하게 비판할 정도로 연금술사들은 자신의 발견을 공유하지 않았습니다. 칼 포퍼(Karl Popper)의 말처럼 과학은 열린 사회에서만 번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베이컨이 살았던 시대에 ‘history’라는 단어는 관찰이나 실험을 통한 체계적인 탐구 기록이나 보고를 뜻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과학과 역사의 만남은 그다지 어색한 일이 아니고 과학자라면 당연히 과거와의 대화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학술 모임의 등장에 이어 과학 전문학술지의 탄생을 주제로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미주 및 추천도서
1. 본 연재 글은 필자(전주홍,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생리학교실)의 두 저서인 《과학 하는 마음》(바다출판사, 2021)과 《논문이라는 창으로 본 과학》(지성사, 2019) 그리고 교내 수업인 '의생명과학연구의 융합적 이해'와 '의생명과학 논문의 이해'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했습니다.
2. 바이얼릿 몰러 지음, 김승진 옮김. 《지식의 지도》(마농지, 2023); 피터 버크 지음, 박광식 옮김. 《지식》(현실문화연구, 2006)
3. 데이비드 우튼 지음, 정태훈 옮김. 《과학이라는 발명》(김영사, 2020); 찰스 밴 도렌 지음, 박중서 옮김. 《지식의 역사》(갈라파고스, 2010)
4. “학문의 진보를 위해 윌리엄 페티가 새뮤얼 하트리브에게 보낸 조언”이라는 제목의 31페이지로 이루어진 편지 내용에서 인용했습니다.
5. ‘Respublica Literaria’라는 용어는 1417년 7월 6일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인 프란체스코 바르바로(Francesco Barbaro)와 포기오 브라치올리니(Poggio Bracciolini) 사이의 편지에서 처음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스탠퍼드 대학에서 수행한 ‘Mapping the Republic of Letters’ 프로젝트도 한번 참고해 보시길 바랍니다(http://republicofletters.stanford.edu/).
6. 오퍼 갤 지음, 하인해 옮김. 《과학혁명의 기원》(모티브북, 2022); 찰스 길리스피 지음, 이필렬 옮김. 《객관성의 칼날》(새물결, 2005); 이완 라이스 모루스 지음, 임지원 옮김. 《옥스퍼드 과학사》(반니, 2019)
7. 알두스 마누티우스는 베네치아 출판업계의 대표적 인물로 이탤릭체를 개발하고 세미콜론 등 가독성을 높이는 표기를 고안하는 등 서적 출판의 혁신을 가져왔습니다. 1489년 알디네 출판사를 차렸고 그의 안목과 마케팅 능력은 베네치아가 학문의 중심지로 부상하는 데 큰 공헌을 했습니다. 마누티우스의 노력 덕분에 《히포크라테스 전집》과 《갈레노스 전집》도 널리 보급될 수 있었습니다.
8. 1660년 그레셤 대학(Gresham College)에서 12명으로 구성된 위원회에서 뜻을 모은 것입니다. 1662년 로버트 모레이(Robert Moray)의 아이디어에 힘입어 찰스 2세로부터 ‘런던 왕립학회’ 창설을 공인받았고, 윌리엄 브롱커(William Brouncker)가 초대 회장이 되었습니다. 이어 1663년 두 번째 황실 헌장을 통해 ‘자연 지식 증진을 위한 런던 왕립학회’로 이름을 정했습니다. 왕립학회의 역사를 정리한 다음 웹사이트도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History of the Royal Society. https://royalsociety.org/about-us/who-we-are/history/ or https://royalsociety.org/journals/publishing-activities/publishing350/
9. 왕립학회의 모토는 고대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Horace)의 서한에 적힌 “나는 어떤 주인의 말에 충성을 맹세할 의무가 없습니다. 폭풍이 나를 데려가는 곳을 안식처로 삼겠습니다(Nullius addictus iurare in verba magistri, quo me cumque rapit tempestas, deferor hospes)”라는 구절에서 영국의 작가 존 이블린(John Evelyn)이 세 단어만 가져와서 만든 것입니다. 왕립학회의 정신은 1663년 로버트 후크(Robert Hooke)가 기초한 “왕립학회의 임무와 계획은 자연의 사물에 관한 지식과 모든 유용한 기술, 제조, 기계적 숙련, 엔진 및 발명을 실험으로 향상시키는 것이다”라는 왕립학회의 규약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10. 런던 왕립학회와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 모두 베이컨이 《새로운 아틀란티스(New Atlantis)》에서 구상한 이상적 연구기관인 ‘솔로몬의 집’을 모델로 삼았습니다. 영국의 찰스 2세와 프랑스의 루이 14세 모두 과학적 지식의 중요성과 잠재력에 주목했습니다. 특히 프랑스의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들은 재무장관 장바티스트 골베르(Jean-Baptiste Colbert) 덕분에 월급을 받으며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연구 활동이 제도적 뒷받침에 기대어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음을 보여줍니다.
본 기사는 네티즌에 의해 작성되었거나 기관에서 작성된 보도자료로, BRIC의 입장이 아님을 밝힙니다. 또한 내용 중 개인에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사실확인을 꼭 하시기 바랍니다.
[기사 오류 신고하기]
다른 연재기사 보기
전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