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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과학자의 여정] 15화. 2006년
Bio통신원(히어로(필명))
기억이란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이성적으로 중요하다고 여겼던 것들은 자주 잊히는 반면, 너무 사소해서 큰 의미를 가지지 않을 것 같아 보였던 것들은 기억으로 남는다. 때로는 냄새로, 때로는 소리로, 때로는 영화의 한 장면이나 그림 한 장으로 말이다. 17년이나 지난 지금도 2006년 여름, 평해 연수원에서의 워크숍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건 폐교 운동장에 찢어진 그물로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미니 축구 골대 앞에 선 내 모습과 모두가 숨죽인 채 나를 쳐다보고 있는 장면이다. 그날 나는 상대편 골키퍼의 머리 바로 위에 위치한 골대 아래를 강타하면서 기적적인 각도로 골을 성공시켰다. 그 순간 우리 랩 모두의 오래 참았던 침묵이 한꺼번에 큰 함성으로 터졌고, 우린 손에 손을 잡고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상대편은 자기네들이 질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면서 혀를 찼다. 그리고 각자 뿔뿔이 흩어져 바닷가로 수영하러 갈 때 그들은 내게 위협적으로 다가와 다음에 꼭 다시 경기하면 자기네들이 꼭 이기겠노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나는 마냥 좋았다. 그러라고. 꼭 이겨 달라고 여유 있게 응답해 주었다. 그날 우리가 승리를 거머쥔 건 실력이 아니라 행운이 많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말이 되는가. 이운재가 승부차기에서 이천수보다도 이동국보다도 더 기가 막힌 슛을 날려 골을 성공시키고 팀을 승리로 이끈다는 게. 어쨌거나 평해의 기억은 즐거움으로 남아 있다. 6년간의 대학원 생활을 떠올릴 때 기억에 남는 몇 장면 중 하나다.
평해에서의 발표는 이후 과학자로서 공식적인 학회에서 발표할 때 든든한 밑거름이 되어 주었다. 2006년이 되면서 실험실 가족들이 대부분 진행하던 프로젝트의 스토리가 견고해지고 있었으며, 마우스의 표현형 분석을 넘어 그 아래에 숨겨진 분자세포생물학적인 기작을 찾아내려고 모두들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 연구성과를 발표하러 국내 학회는 물론 국제 학회에 본격적으로 참석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만 해도 마우스 유전학으로 특정 유전자 기능을 생체 내에서 밝히는 연구가 많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때문에 우리 랩에서 발견한 사실들은 국내 생물학계에서 주목받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랩의 존재 자체가 국내 생물학계에서는 거의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건 임팩트 높은 논문을 내기에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과학자에게 있어서 학회는 소통의 장이다. 국내외 수많은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포스터 발표나 구두 발표로 보고 들으면서 얼마나 다양한 주제와 관점으로 혹은 어떤 방법과 어떤 모델로 연구를 진행하는지 그들의 연구가 논문으로 출판되기 이전에 알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과학자들은 학회 참석으로 인해 공동연구를 시작하게 되기도 하고, 이름으로만 알던 과학자들을 실제로 대면하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대학원생들에게는 향후 박사후연구원 자리를 알아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작용하기도 한다. 실험실 세팅의 일등 공신이자 나의 스승이었던 민수도 나중에 이러한 기회의 주인공이 된다.
2006년은 과학계에서, 특히 줄기세포 분야에서, 커다란 한 획을 긋는 해였다. 신야 야마나카 (Shinya Yamanaka)라는 한 일본 과학자가 Cell 지에 보고한 한 논문 때문이었다. 지금은 수많은 실험실에서 루틴 한 방법으로 사용되는 유도 만능 줄기세포 (iPSC, induced Pluripotent Stem Cell)의 첫 출현이었다. 바로 몇 달 전 우리나라 과학계를 뜨겁게 달구었던, 그리고 모든 과학자들을 부끄럽고 분노하게 만들었던 황우석 사건이 논문 철회로 마무리된 이후라서 그랬는지 야마나카의 발견은 더 커다란 의미로 다가왔다. 우리는 황우석 사건과 야마나카의 발견에 대해서 한동안 입이 마르도록 얘기를 했다.
또한 그즈음은 줄기세포와 암세포의 공통점이 주목을 받고 암 줄기세포 (Cancer stem cell)라는 단어가 정착되는 시기이기도 했으며, 줄기세포와 암세포가 몸 안에서 아무 데나 위치하는 게 아니라 특정한 환경에 자리한다는 Niche 개념이 점점 견고하게 정립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민수가 만들고 실험실의 여러 대학원생이 맡아서 분석했던 여러 조건부 넉아웃 마우스는 한결같이 여러 성체 줄기세포의 신비를 푸는 데 필요한 신호전달, 그리고 그것을 이루는 분자세포생물학적인 기작과 연결고리를 가졌기 때문에 우리들의 연구는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시대의 흐름에 발맞추어 진행되고 있었다.
바로 이런 시대의 흐름 속에서 우리 실험실엔 첫 박사가 태어난다. 민수가 2년간의 석사 생활과 4년간의 박사 생활을 마치고 드디어 박사 학위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교수님은 첫 제자가 성공적으로 랩을 세팅하고 우수한 업적을 내며 박사 학위를 받게 된 것에 감격하셨고, 그건 민수로부터 거의 모든 것을 배웠던 나머지 랩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민수의 박사 디펜스 때의 일화는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며 실험실에는 전설로 남게 되었다. 그 일화를 여기서 소개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우린 모두 응원하는 마음으로 민수의 박사 디펜스에 청중으로 참석했고, 민수는 언제나처럼 당당하고 조심스러운 태도로 발표를 진중하고 깔끔하게 마무리했다. 발표가 제시간에 끝나자 논문 심사 위원으로 오신 다섯 분의 교수님들께서 차례로 질문을 두어 개씩 던지셨다. 그중 한 질문과 그것에 대한 민수의 답이 압권이었다. 한 교수님이 이렇게 대뜸 질문하시는 거였다. “구민수, 발표 잘 들었네. 발표에 따르면 자네는 엄청나게 일을 많이 한 것 같은데, 그중에서 진짜 자네가 한 일은 무엇인가?” 이미 다른 실험실 선배의 박사 디펜스에 참석해 본 적이 있는 나는 그 질문의 의도를 잘 알 수 있었다. 박사 디펜스 발표자료에는 무수한 실험 결과가 압축적으로 담기는 게 보통이다. 그 결과 중엔 발표자 본인의 손을 거치지 않고 도움을 받았거나 공동 연구를 진행했던 팀의 결과가 섞여 있기 마련이다. 생물학계에서 하나의 논문을 써내기까지는 결코 혼자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이 주도가 되어 진행했던 연구가 아니라면 아무리 디펜스 발표를 잘했다 하더라도 그 발표자에게 박사 학위를 수여할 수 없다는 논리가 그 교수님의 질문 이면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논리는 박사라는 단어의 본질적인 의미에서 비롯된다. 박사란 독립적으로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를 뜻하는데, 어떤 관찰 결과로부터 가설을 세우고 그것을 검증하기 위해 실험을 디자인할 수 있으며, 디자인 대로 실험을 계획할 수 있고, 계획하 대로 실험을 수행할 수 있으며, 수행한 실험 결과를 분석하고 해석하여 의미를 도출해 낼 수 있고, 그것으로부터 논문을 써낼 수 있는 연구자가 바로 박사이기 때문이다.
민수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그러나 끝까지 겸손한 태도로 대답했다. ”다 제가 주도한 것 맞습니다.“ 그 교수님은 되물으셨다. ”아니, 자네가 그 많은 마우스들을 다 만들고 분석까지 다 했단 말인가?“ 민수가 조용히 네, 하고 응답했다. 그 교수님은 우리의 지도 교수님 얼굴을 쳐다보셨고, 우리 교수님은 맞습니다. 여기 구민수 군이 모두 주도해서 시작하고 진행하고 마무리했습니다. 랩 후배들이 도와주긴 했지만, 후배들 입장에선 배움의 시간이었을 테고, 구민수 입장에서는 후배를 가르치는 시간이었습니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 교수님은 곧장 우리들을 쳐다보셨는데, 우리들은 모두 당연한 사실을 왜 이렇게 따지지?, 하는 표정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때 수준이와 시철이가 거의 동시에 ”사실입니다.“라고 말했다. 그제야 그 교수님은 믿기 힘들지만 사실은 사실임을 인정하시는 듯했다. 놀람과 함께 흐뭇한 표정을 지으셨다.
민수는 우리 실험실의 첫 대학원생이자 첫 논문의 주인공, 그리고 첫 졸업생이자 첫 박사 학위의 주인공이었다. 민수의 졸업은 우리들에겐 일종의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는 역할도 했던 것 같다. 논문 심사 위원 교수님들을 감동시킬 수 있을 정도의 우수한 결과로 졸업하고 박사 학위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한 우리는 그 모습이 바로 가까운 미래에 선보일 우리들 자신의 모습일 수 있다는 희망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졸업 후 민수는 논문으로 마무리짓지 못한 프로젝트들을 마무리 짓기 위해 박사후연구원으로 우리 랩에 3년간 더 머물게 된다. 그리고 민수의 졸업과 함께 랩에는 새로운 가족이 들어왔다. 전형우와 모선경. 이 둘은 동갑내기로서 서로를 아끼면서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관계로 발전하게 되는데, 도저히 배꼽을 잡고 웃지 않을 수 없는 에피소드 몇 개를 소개해볼까 한다. 때는 2007년 봄, 나의 대학원 5년 차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본 기사는 네티즌에 의해 작성되었거나 기관에서 작성된 보도자료로, BRIC의 입장이 아님을 밝힙니다. 또한 내용 중 개인에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사실확인을 꼭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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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의사생활’의 패러디라고 볼 수 있겠지만, 그것이 담아내지 못하는, 아니 어쩌면 그것이 담을 수 없었던 이야기가 있다고 생각했다. 많은 부분은 의사라는 직업이, 특히 한국에서, 갖는 독특한 위상 때문이지 않을까 한다. 의사는 베이비붐 세대 이전부터 Z세대에 이르기까지 실질적인 부와 명예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직업이며, 시대를 초월하여 누구에게나 특권층으로 여겨질 만큼 선망의 대상이 되어왔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이 많은 감동과 공감을 불러일으켜 성황리에 막을 내렸지만, 그 성공의 비결 중 하나는 주인공들의 직업이 의사였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의사를 선망하면서도 의사가 되지 못한 우리들은 의사의 삶이 궁금했던 것이다. 우리와 다를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문제로 고민하고, 그들도 가정의 불화로 가슴 졸이며, 그들도 인간관계 때문에 속상해하는 등 결국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드라마를 통해 확인함으로써 잠시나마 그들과 연대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과학자라는 직업은 아이들의 ‘장래 희망란’에서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그도 그럴 것이, 과학자들, 그중에서도 특별히 기초과학자들의 사회적 대우와 인식이 과거에 비해 현저히 낮아지기도 했다.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평균 연봉만 따져도 적게는 두 배, 많게는 열 배 이상의 차이가 난다. 의사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들여 공부와 연구의 끈을 놓지 않고 사회생활을 시작했는데도 말이다. 설상가상으로 과학자의 경우, 연봉을 받을 수 있는 자리에 오르기까지 훈련받는 기간은 의사의 그것보다 일반적으로 훨씬 더 길며, 훈련을 마치는 시기도 정해지지 않아 평생 불안정한 상태에서 직업 생활을 해야 하는 상황도 심심찮게 벌어진다. 우리 중 많은 이들은 다른 이름으로 불릴 뿐 평생 계약직 훈련생의 신분으로 살아가고 있다. 의사의 경우, 의대만 나와도 개업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고, 레지던트 생활을 마치면 전문의로서 더 큰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과학자들의 상황과 극명한 대비를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과학자들은 박사 학위를 힘겹게 취득했다 할지라도 (생물학의 경우 보통 6년 정도 소요된다), 박사 후 연구원이라는 고되고 불안정한 과정을 견뎌내야 비로소 한 실험실을 책임지는 자리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놀라운 사실은 그렇게 힘들고 긴 기간을 거쳐 실험실 보스가 된다 하더라도 연구비 획득과 학생 및 연구원 고용 문제에 부딪혀하고자 했던 연구를 수행하기가 극히 어렵다는 것이다. 박사과정을 시작한 이후 10년에서 20년 정도 후에 겨우 조교수가 되었는데, 그마저도 불안정해서 본인은 물론 어느새 생겨난 가족들에게 죄책감을 느낄 정도로 고생의 길을 걷게 되는 경우가 왕왕 벌어지고 있다는 게 오늘날의 서글픈 현실이다. 이 글은 20세기말에 대학에 들어가 21세기 초에 대학원 생활을 하며 간신히 박사 학위를 취득한, 지금도 여전히 과학계에서 손을 떼지 못한 채 과학자라는 직업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와 동고동락하며 꽃다운 20대 후반을 함께 보낸 동료들의 이야기다. 모두 의사가 될 수 있었으나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기초과학에 몸을 싣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묵묵히 한국 기초과학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생물학자들의 이야기다. 그들은 현재 모두 가정을 가졌으며 모두 한 아이에서 세 아이의 엄마 아빠가 되어 있다. 많은 이야기들은 실제 있었던 사건에 기반한다. 그러나 절반 정도는 개연성 있는 허구를 동원해 각색을 가했다. 등장인물의 이름은 모두 가명이며, 경우에 따라 두세 인물의 캐릭터를 한 인물 속으로 압축시킨 경우도 있고, 몇몇 인물은 현실엔 존재하지 않았던 인물이다. 기본적인 장소는 포항공대이지만, 그곳의 위치와 시설 등의 세부사항은 허구를 동반한다. 자, 우리들의 철없던 대학원생 시절의 이야기, 돌이켜보면 별 것 아닌 것들로 가슴 아파하고 상처받던 시절의 이야기, 그 와중에 밤을 새며 실험에 매진하던 시절의 이야기, 그 열정과 낭만의 이야기를 이제 시작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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