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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만 하다 창업에 뛰어든 고군분투기] 내가 왜 창업을 했지?
Bio통신원(김위)
2000년 처음 대학원 생활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나는 평생 학교 아니면 연구소에서 일할 거라는 상상을 했지 창업을 할 거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건 박사과정일 때도 들어갔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인생은 언제나 자기 생각대로 평탄은 커녕 지옥에 내려 꽂히는 상황을 견뎌야 했습니다. 대학원 과정 중 제 몸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9 to 9의 월화수목금과 일요일 오후의 아름다운 근무를 견디긴 했습니다. 하지만 제 한계에 대한 육체적인 생체실험을 진행해 본 결과 응급실 VIP 회원이 되었습니다. 물론 오진이긴 했지만 뇌종양 판정과 제 몸에 튜브를 꼽는 개조 상태까지는 가지는 않고 다양한 대사 질환을 몸의 훈장처럼 주렁주렁 단 후 박사 후 과정도 하지 못하고 한국으로 귀국하게 되었습니다.
막막하긴 했지만 3년의 육체 재 개조를 하는 요양 기간 약 3년 정도는 몸 회복하는 데 집중하였습니다. 어느 정도 회복이 돼서 아름아름 학교에서 강의도 하고 한국이나 해외 연구소에 연구원 자리도 알아보는 상황이었습니다. 지금과 그나마 땅까지 올라온 상태지만 이 기간에는 필드워크, 위트워크고 나발이고 학사 1년 차 정도로 경험이 초기화된 상태였고 내 밑의 맨홀 깊이가 어디까지일까 잠시 예상을 해볼 수 있을 정도 상태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정말 놀고 있었던 건 아니고 나름대로 음주·가무가 아닌 정말 잉여 인간에 걸맞은 전공과는 전혀 동떨어진 건전한 취미 생활도 하면서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 정신적인 충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겨울이 찾아오기 전 베짱이에 걸맞은 인생을 낭비하고 있을 때 마침 한국에 있는 한 왜 절 좋게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기업체에서 연 구직 제의를 받았습니다. 이제 나도 집을 지키는 경비원에서 벗어나는 거냐는 부푼 희망을 품고 경건한 마음으로 마음의 득도를 하며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자 여기까지 라면 창업 분투기를 연재할 필요도 없고 ‘그냥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라는 메시지를 제 카톡 프로필에 올려야 하겠지만 그럴 일이 없으니 이 칼럼은 계속됩니다.
입사 준비를 위해 이것저것 다 정리라고 하기에는 딱히 재산도 없고 가진 물건도 없어 대학 입학 전 세상 다 가졌다는 기분으로 입사 결정되기 전보다 훨씬 더 열심히 놀긴 했지만 서서히 입사일을 차일피일 미루는 회사를 보며 서서히 불안감이 뒤통수를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6개월 후 입사 예정인 회사 이사로부터 연락이 와서 입사가 안 될 것 같다는 이야기에 하늘까지는 무너져 내리지 않았지만 잠깐 뭘 해야 하나라는 주마등이 약 1분 사이에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대부분은 이렇게 되면 또다시 취업을 알아보거나 마음의 정리를 해야 하러 여행이라도 가는 게 일반적일 텐데 인생은 하나뿐인데 오히려 사고를 더 크게 치자라는 남이 생각하기에 전혀 말도 안 되는 결정을 하고 맙니다.
앞서 이야기를 안 드렸지만 제 쓸모없는 취미는 컴퓨터 프로그래밍과 기기 제어입니다. 석박사까지 실제 제가 했던 분야는 gene therapy 및 signal pathway 그리고 cell co-culture 쪽이니 모르는 사람이 이게 말이 되라는 이야기를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실제 누가 봐도 둘은 전혀 다른 전공입니다. 그렇다고 제 취미 생활이 생 초보자 정도까지는 아니고 적으로 안드로이드 운영체제 및 안드로이드 앱 개발 그리고 동영상 전환 시스템 관련해서 몇 개의 소프트웨어 단독 저작권도 가지고 있으니 나름대로 잉여답지만, 아마추어 정도는 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래서 몇 년 정도 전공과 관련 없는 생산적인 일을 해보자고 집사람한테 이야기하면 두들겨 맞을 생각을 몰래 진행합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그때 모 개발자 사이트에서 나름대로 활동하고 있었고 여기서 한 번 전공자도 아닌데 IoT 기반의 오픈소스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해서 다목적 홈 제어 모듈을 만들어 보자는 다른 사람이 들으면 ‘이게 말이나 돼?’라는 야금야금 진행합니다.
우애 곡절 끝에 샘플 기기를 만들었고 그다음은 생산이라는 걸림돌을 넘어야 하는데 거듭 강조하지만 제 전공은 의생물학 기반이지 공학도 경영학도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안타까울 정도로 혀를 칠 상황이고 너도 이제 맨틀을 뚫고 나갈 정도로 정신이 나갔다고 생각할 정도겠지만 가장 큰 문제는 제가 익명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가족이나 친구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게 함정입니다.
자 이제 기기를 해외에서 만들었고 생산 후 이걸 개발자들에게 나눠줘야 하는데 수송만 하면 될 거라는 무지하고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 Pixabay
이렇게 대책 없이 일을 진행하면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장애물이 수도 없이 튀어나왔습니다. 당연히 무계획으로 일을 진행한 저는 여러 정부 기관에 뚜드려 맞았습니다. 자 이런 수많은 서류를 처리하지 않고 관공서를 드나들면서 서랍장에 무한으로 서류 집어넣는 비자율형 로봇이 안 되는 간단한 방법은 법인 만들어서 서류 몇 개로 진행하는 거였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효율적인 사람이라고 저 자신만 주장하였었는데 이런 과정을 거쳐서 서류로 몇 달을 고생하 느니 차라리 법인 만드는 데 1주일만 고생하자는 생각이 들었을 때 어느 순간엔 가 제 손에는 사업자등록증이라는 출생신고서가 쥐어져 있었습니다.
개발된 기기를 배포를 원활하게 할 수 있는 사업자등록증이라는 무기가 생겼으니 해야 할 일은 임무를 완수하는 겁니다. 1인 법인이라는 생 초보 대표가 그것도 창업을 하려고 했던 사람이 아닌데 회사 운영은 제쳐두더라도 국내에서 이쪽으로 아무런 연고가 없었던 사람이 할 수 있는 만만한 작업은 아니었습니다. 생산 공정 확인, 샘플 테스트, 배송업체 수배, 선적 작업 확인, 통관 관세사 섭외, 최종 물류 집하지 선정 마지막으로 배송까지 이걸 업체에 맡기면 쉽게 되겠지만 자금도 부족하고 알아볼 곳도 없어서 혼자서 다 하게 됩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이게 할 수 있는 일이었는지 대한 현실감조차 떨어집니다.
다행스럽게도 남들이 보기에도 임무 완료라는 도장이 찍힐 수 있을 정도로 첫 프로젝트는 완료했습니다. 그때는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 일탈행위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걸 더하면 내가 사람이 아니다일 정도로 성취감과 스트레스가 동시에 공존했습니다.
이렇게 큰 난관을 다행히 넘으면 임무 성공 후 해산이라는 프로젝트의 끝을 보겠지만 어찌 된 노릇인지 종료 이후에도 6년간 잉여 생활을 했던 랩 경험이 홀라당 날아가 버린 인간에게 줄 자리는 아니 감사하게 받을 자리조차 없었습니다.
여기서 해야 할 결정적인 선택은 다시 맨틀을 더 뚫어 버리는 식충이 생활을 하면서 가족들 눈치를 보느냐 아니면 못 먹어도 고를 하느냐 라는 기로에 다시 서게 됩니다.
그래서 한 결정은 그냥 법인 유지하면서 저처럼 쓸모없는 사람들을 뽑아서 한번 해보자는 앞도 뒤도 없는 남이 보면 망상처럼 느낄 선택을 하고 말았습니다.
본 기사는 네티즌에 의해 작성되었거나 기관에서 작성된 보도자료로, BRIC의 입장이 아님을 밝힙니다. 또한 내용 중 개인에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사실확인을 꼭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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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인이었다가 10년 만에 현업에 복귀하여 회전도 안 되는 머리로 처절하게 뇌의 처리 능력 이상으로 짜내면서 살고 있는 초보 연구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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