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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과학자의 여정] 6화. 다시 19동
Bio통신원(히어로(필명))
내 시작은 언제나 미약했던 것 같다. 대학원생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그 중요한 순간에 나는 내쫓기듯 다시 닭장에서 살게 되었으니 말이다. 2003년 나는 7년 전인 1996년처럼 19동에서 1년 간 살게 된다. 전혀 반갑지 않았던 19동은 거의 모든 게 똑같았다. 한 가지 큰 차이점이라면 주출입구 옆에 위치했던 공중전화 부스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멋대가리 없게 생긴 음료수 자판기가 한 대 더 들어섰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었다. 새로운 밀레니엄을 지나오면서 휴대전화의 상용화가 가속화되었고, 그에 따라 삐삐는 아무도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아무도 카세트테이프나 시디로 음악을 듣지 않았다. 대신 아이리버나 거원 등의 브랜드가 적힌 MP3 플레이어가 대세를 이루었다. 빠른 시대의 변화는 언제나처럼 전자기기의 변천사로 화려하게 가시화되고 있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19동의 낭만도 마치 지난 세기와 함께 증발해 버린 것 같았다. 나는 그게 못내 아쉬웠다.
2003년 2월, 학부를 졸업하고 곧 시작할 대학원 1학기 과정에 대한 수강 신청도 다 끝낸 상태였다. 문득 외로움이 느껴졌다. 나만 빼고 모든 게 바뀐 것 같은 기분에 잠식될 것 같았다. 얼떨결에 면역학 수업을 듣고 연구참여를 하고 민수를 만난 덕분에 넉아웃 마우스까지 만들게 되는 등 복학 후 1년 반이란 시간 동안 너무 많은 급작스런 변화를 겪어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다 소화하지도 못한 채 목구멍에 무언가가 여전히 걸려있는 것처럼 답답한 마음도 들었다. 내가 경험한 것들이 나 자신과 합일을 이루지 못했던 것이다. 나에겐 평형 상태가 필요했다. 나는 다시 나 자신으로 살아낼 준비가 필요했던 것이다.
가슴이 뻥 뚫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19동에 다시 입사했던 첫날이었을 것이다. 나는 어인 일인지 바다가 보고 싶었다. 작년 월드컵 시즌 이후 나는 도무지 바다 근처에도 갈 수 없었는데, 월드컵 신화와 맞물린 왕경태와 지욱이의 비극 때문이었다. 나뿐만이 아니었다. 무난히도 더웠던 그 여름, 우리 중 아무도 감히 포항 앞바다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왕경태와 지욱이의 사인은 알다시피 익사였다. 경찰의 말에 따르면 예전에도 그 바다 부근에서 여름 시즌이면 한두 명씩 빠져 죽었다고 했다. 그곳에 급류가 형성되어 어지간한 수영 실력이 없다면 절대 헤어 나올 수 없을 만큼 강한 물살 때문이라 했다. 그래서 경고문도 만들어놓고 바리케이드까지 쳐놨는데, 왕경태와 지욱이는 그날 새벽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우리와 함께 노래방까지 갔다가 기숙사로 들어가지 않고 곧장 바다를 향했고, 하필 그 부근에서 옷을 벗고 휴대폰도 놔두고 바다로 들어갔던 것이다. 경고문과 바리케이드를 보지 못했던 건 술에 취하기도 했고, 가망 없을 것 같던 포르투갈 전에 극적인 승리를 거둬 흥에 겨웠기도 했으며, 마침 그때가 동트기 전이라 보이지 않아 무심코 지나쳤던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여전히 의문이 남는 건 그들은 왜 갑자기 바다를 향했고 둘 다 그 속으로 그 깜깜한 새벽에 들어갔냐는 것이다. 마치 누가 부르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죽은 사람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가슴 아픈 사건이었지만, 둘의 시신을 확인하던 그 순간에도 내 가슴 한편엔 도무지 풀리지 않은 의문이 납덩이처럼 무겁게 남아 있었다.
수개월이 지나고 계절도 바뀌어 갑자기 혼자 남겨진 것 같은 외로움이 밀려들던 그날 내가 바다가 보고 싶었던 건 무의식적으로 나도 몰래 내 가슴을 짓누르고 있던 응어리 같은 무언가를 풀어내고 싶었던 게 아닐까 짐작해 본다. 모든 상실감은 어떤 모양으로든 연결되어 있기 마련이니까.
용기를 내어 왕경태와 지욱이가 마지막 숨을 쉬었던 바로 그 바닷가를 찾기로 했다. 전날 눈까지 왔던지라 걸어가는 길이 질퍽해서 바지 밑단이 금세 더러워졌던 기억이 영화 한 장면처럼 기억이 난다. 늦은 오후 혼자 버스를 타러 가는 길에서 민수를 만났다. 기숙사로 들어가는 길인 것 같았다. 어디 가냐는 말에 바람이나 쐬러 바닷가에 다녀오겠다고 했더니 민수는 눈빛이 바뀌면서 잠시 생각하더니 같이 가자고 했다. 나는 그러자고 대답했다.
버스를 타고 삼십 분 이상 가는 길, 맨 뒷좌석에 앉아 우리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민수와 함께 학교 밖으로 외출을 하는 건 대학 1학년 때 대구로 동기들이랑 단체 미팅을 딱 한 번 나갔던 이후 처음이었다. 나는 마음이 착 가라앉은 상태였는데 민수는 그걸 눈치챈 듯 왕경태 얘길 꺼냈다. 들어보지 못했던 얘기였다. 왕경태가 이전 Y대학에서 도망치듯 스스로 나왔던 이유와 민수가 수차례 왕경태를 도와주었던 일화에 대한 이야기였다.
왕경태의 지도교수는 이름만 들어도 다 아는, 언론에도 여러 번 등장했던 유명인이었다. 그 실험실에서 왕경태는 꽤나 인정을 받고 장래가 촉망받던 인재였던 듯했다. 충분히 납득이 되었다. 웨스턴블롯을 한 번에 여섯 장씩, 그것도 하루에 두 번 달릴 수 있다는 건, 그리고 무엇보다 그렇게 많은 실험을 짧은 시간에 집중해서 하고도 깔끔한 결과를 도출했다는 건 결코 아무나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한 마디로 교수의 갑질이었다. 언론에 비친 그 교수의 모습은 인자하고 사람 좋은 양 같은 이미지였는데, 민수를 통해 들은 왕경태의 고백에 의하면 그건 그저 가면일 뿐이었다. 그 교수는 늑대였던 것이다.
여러 에피소드를 전해 들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왕경태가 박사과정에 들어가기 전 일 년 동안 그 랩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던 결과를 교수가 모두 다른 제자에게 넘긴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제자는 교수와 전처 사이에서 태어났던 딸이었다고 했다. 왕경태의 말로는 교수와 전처 사이의 모종의 거래가 있었는데 이혼 위자료와 더불어 딸의 박사학위를 책임지는 것이 바로 그 거래의 본질인 것 같다고 했다. 그 랩 사람들은 그 대학원생의 정체를 아무도 몰랐다고 했다. 그러나 의외로 집요했던 왕경태는 (아니, 아마 내가 그 상황에 처했더라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자기가 만든 결과를 가로챈 대학원생의 뒷조사를 몰래 실시했고 그리 어렵지 않게 그녀가 교수와 전처 사이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고 했다. 그리고 그 랩을 뛰쳐나온 시기가 바로 그 사실을 알아낸 직후라고 했다. 왕경태는 더 이상 그런 교수 밑에서 일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언젠가 나도 그 교수가 훌륭한 과학자인 동시에 얼마나 가정적이고 다정한 남편이자 아빠인지 소개하는 짤막한 소개글을 본 적이 있었는데, 아내가 굉장히 어려 보여 어색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적어도 열 살 이상은 차이 나는 것 같았다. 교수의 나이는 쉰둘이라 적혀 있었고, 아내는 S 대학병원 레지던트 4년 차라고 소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둘 사이에는 딸 하나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각각 여섯 살과 네 살이었다. 민수가 해준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머릿속에 잡지에서 봤던 그 교수의 가족사진을 떠올렸고 그 사진을 보고 생겼던 뭔지 모를 의아함이 비로소 해소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 아내는 두 번째 결혼 상대였던 것이다. 그리고 어쨌거나 왕경태는 교수의 첫 번째 아내와의 이혼이 남긴 흔적을 없애는 데 이용당한 셈이었던 것이다.
민수의 말을 듣고 나는 나도 몰래 생각을 계속 진행시키고 있었는데 (왕경태가 교수로부터 당한 일을 차치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그날 왕경태가 포항 앞바다로 가서 물속으로 들어간 이유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민수가 다 왔다고 내리자고 하는 바람에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버스에서 내리자 해가 저물기 시작했다. 우린 십여 분 정도 걸어서 바리케이드가 쳐진 포항 앞바다에 다다랐다. 보란 듯이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물론 그날은 2월이라 해수욕이 폐쇄된 상태였기 때문에 몇몇 사람들만이 백사장을 거닐고 있을 뿐이었다. 왠지 숙연해진 민수와 나는 쏴 하며 다가오는 파도 옆을 말없이 한동안 걸었다. 겨울바다는 황량했다.
그날 밤 나는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이상하게도 허해진 마음은 그날 이후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졌다. 19동 110호에서 홀로 잠에서 깬 첫 아침, 일찍 눈이 떠진 나는 실험실에 출근을 했고 민수를 만났는데, 민수 역시 나와 비슷한 밤을 보낸 것 같았다. 우린 서로 무엇인가를 아는 자만이 지을 수 있는 웃음으로 인사를 나눴다. 알 수 없는 연대가 생겨난 기분, 든든한 기분이었다. 이제야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나의 대학원생의 서막이 시작되고 있었다.
본 기사는 네티즌에 의해 작성되었거나 기관에서 작성된 보도자료로, BRIC의 입장이 아님을 밝힙니다. 또한 내용 중 개인에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사실확인을 꼭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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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의사생활’의 패러디라고 볼 수 있겠지만, 그것이 담아내지 못하는, 아니 어쩌면 그것이 담을 수 없었던 이야기가 있다고 생각했다. 많은 부분은 의사라는 직업이, 특히 한국에서, 갖는 독특한 위상 때문이지 않을까 한다. 의사는 베이비붐 세대 이전부터 Z세대에 이르기까지 실질적인 부와 명예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직업이며, 시대를 초월하여 누구에게나 특권층으로 여겨질 만큼 선망의 대상이 되어왔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이 많은 감동과 공감을 불러일으켜 성황리에 막을 내렸지만, 그 성공의 비결 중 하나는 주인공들의 직업이 의사였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의사를 선망하면서도 의사가 되지 못한 우리들은 의사의 삶이 궁금했던 것이다. 우리와 다를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문제로 고민하고, 그들도 가정의 불화로 가슴 졸이며, 그들도 인간관계 때문에 속상해하는 등 결국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드라마를 통해 확인함으로써 잠시나마 그들과 연대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과학자라는 직업은 아이들의 ‘장래 희망란’에서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그도 그럴 것이, 과학자들, 그중에서도 특별히 기초과학자들의 사회적 대우와 인식이 과거에 비해 현저히 낮아지기도 했다.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평균 연봉만 따져도 적게는 두 배, 많게는 열 배 이상의 차이가 난다. 의사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들여 공부와 연구의 끈을 놓지 않고 사회생활을 시작했는데도 말이다. 설상가상으로 과학자의 경우, 연봉을 받을 수 있는 자리에 오르기까지 훈련받는 기간은 의사의 그것보다 일반적으로 훨씬 더 길며, 훈련을 마치는 시기도 정해지지 않아 평생 불안정한 상태에서 직업 생활을 해야 하는 상황도 심심찮게 벌어진다. 우리 중 많은 이들은 다른 이름으로 불릴 뿐 평생 계약직 훈련생의 신분으로 살아가고 있다. 의사의 경우, 의대만 나와도 개업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고, 레지던트 생활을 마치면 전문의로서 더 큰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과학자들의 상황과 극명한 대비를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과학자들은 박사 학위를 힘겹게 취득했다 할지라도 (생물학의 경우 보통 6년 정도 소요된다), 박사 후 연구원이라는 고되고 불안정한 과정을 견뎌내야 비로소 한 실험실을 책임지는 자리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놀라운 사실은 그렇게 힘들고 긴 기간을 거쳐 실험실 보스가 된다 하더라도 연구비 획득과 학생 및 연구원 고용 문제에 부딪혀하고자 했던 연구를 수행하기가 극히 어렵다는 것이다. 박사과정을 시작한 이후 10년에서 20년 정도 후에 겨우 조교수가 되었는데, 그마저도 불안정해서 본인은 물론 어느새 생겨난 가족들에게 죄책감을 느낄 정도로 고생의 길을 걷게 되는 경우가 왕왕 벌어지고 있다는 게 오늘날의 서글픈 현실이다. 이 글은 20세기말에 대학에 들어가 21세기 초에 대학원 생활을 하며 간신히 박사 학위를 취득한, 지금도 여전히 과학계에서 손을 떼지 못한 채 과학자라는 직업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와 동고동락하며 꽃다운 20대 후반을 함께 보낸 동료들의 이야기다. 모두 의사가 될 수 있었으나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기초과학에 몸을 싣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묵묵히 한국 기초과학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생물학자들의 이야기다. 그들은 현재 모두 가정을 가졌으며 모두 한 아이에서 세 아이의 엄마 아빠가 되어 있다. 많은 이야기들은 실제 있었던 사건에 기반한다. 그러나 절반 정도는 개연성 있는 허구를 동원해 각색을 가했다. 등장인물의 이름은 모두 가명이며, 경우에 따라 두세 인물의 캐릭터를 한 인물 속으로 압축시킨 경우도 있고, 몇몇 인물은 현실엔 존재하지 않았던 인물이다. 기본적인 장소는 포항공대이지만, 그곳의 위치와 시설 등의 세부사항은 허구를 동반한다. 자, 우리들의 철없던 대학원생 시절의 이야기, 돌이켜보면 별 것 아닌 것들로 가슴 아파하고 상처받던 시절의 이야기, 그 와중에 밤을 새며 실험에 매진하던 시절의 이야기, 그 열정과 낭만의 이야기를 이제 시작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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