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는 시대입니다. 당장 몇 년 뒤의 삶조차 예측하기 어려운 지금, 이 지면을 빌려 ‘과학’과 ‘연구’, 그리고 이를 관통하는 시간과 변화, ‘몰입’에 대한 제 생각을 조심스럽게 나누고자 합니다. 조금 더 구체적인 예로서 우리 주변의 “과학자”들을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미지에 끌리는 사람들
우리는 흔히 과학자에 대해 많은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치인부터 공무원, 교수와 대학원생들까지 과학자는 이런/저런 것이다, 이래야/저래야 한다 등등 의견이 다양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과학자는 이런 모습이다’고 섣불리 정의 내리는 것을 경계합니다. 연구를 기초과학과 응용과학, 또는 기초의학과 임상의학 등으로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국가 연구개발 과제 중 ‘순수 기초’나 ‘순수 응용’이 각각 5% 미만인 현실에서, 나머지 90%를 상대적으로 비교하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다양한 분야가 협력하고 AI 의학 등 새로운 융합 분야가 대두되는 지금, 이러한 경계는 더욱 무의미해졌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에는 인구 대비 세계 최고 수준인 약 50~60만 명의 연구 인력이 있습니다. (이는 인구 1인당 세계 1위의 수준입니다). 이들의 ‘연구활동’은 아주 기초적인 지적 탐구활동에 국한되지 않고, 과학과 관련된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지원 분야 및 실용화/상업화 시도 등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과학자’는 야심 찬 대학원생일 수도 있고, 뛰어난 기술자, 과학적 접근을 통해 뭔가 더 나은 이해에 도달하려는 아마추어 과학자, 암치료제 의 임상 데이터를 치밀하게 쌓아가는 의사들까지 매우 다양한 기질을 가진 집단입니다. 우리 대학의 교수님들을 떠올려 보면, 탐험가나 세계 최고의 장인을 연상케 하는 분, 또는 예술가처럼 직관이 뛰어난 분, 하나의 질문을 평생 붙들고 계신 분도 있겠습니다. 이처럼 모습은 달라도 이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미지의 영역에 흥미를 느끼고 이를 이해해 나가는 과정에서 즐거움과 보람, 나아가 자부신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깊은 생각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러한 과학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도구는 최첨단 고해상도 현미경도, 데이터를 분석할 슈퍼컴퓨터도 아닌 바로 '생각'입니다. 실험은 생각을 검증하는 과정이고, 실패는 생각을 다듬는 기회입니다. 따라서 과학자에게 가장 필요한 자원은 ‘시간’이고, 그 시간은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는 ‘몰입의 시간’이어야 합니다. 생각은 조급함 속에서는 깊어지지 않고, AI 시대에 본인만의 생각을 만들어가는 것은 더욱 중요한 일이 되었습니다. 의미 있는 현상을 발견하고, 이를 원리로 정리하여 실제로 적용하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반복되는 실패와 끝내 지지되지 않는 가설도 수없이 마주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 철저히 몰입하지 않으면, 연구는 주위를 맴돌 뿐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어느 대학에 부임한 두 명의 신임교수를 상상해봅시다. 한 교수는 행정과 보직, 학회봉사(또는 진료)에 쫓기며, 자리에 앉으면 곧바로 이메일 답신과 또다른 회의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승진과 정년보장 실적을 채우기 위해서 작은 논문들을 여러 편 발표합니다. 반면 다른 교수는 하나의 핵심적인 질문에 집중하며, 세상을 바꿀 논문을 위해 5년 이상의 긴 시간을 대학원생들과 공부하며 인내합니다. 당장은 다작을 하는 첫 번째 교수가 더 인정받을지 모르나, 시간이 흐를수록 두 사람의 연구는 확연히 다른 길을 걷게 됩니다. 한 사람은 ‘더 많은 결과’를 내지만, 다른 한 사람은 ‘더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누가 더 “productive”한 연구자인 것일까요? 확실한 점은 과학의 역사를 바꾼 위대한 발견은 대개 후자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나라는 실행을 잘 하는 나라에서 개념설계를 할 줄 아는 나라로 변하고 있습니다. 이런 대한민국이 배양해야 할 과학자의 모습은 무엇이고, 우리 국민들이 기대하는 연구자는 어떤 모습인지는 자명할 것입니다.
이민재 교수가 이끄는 단백질 다이나믹스 연구실(Protein Dynamics Laboratory)의 모습
끊임없는 의심과 수정, 연구실의 시간저와
단백질 다이나믹스 연구실(Protein Dynamics Laboratory) 식구들은 외부 환경 변화에 따른 단백질의 유비퀴틴화와 프로테아좀 분해 기전, 그리고 이로 인해 야기되는 암, 대사질환, 퇴행성 뇌질환 등의 분자적 병인을 타겟팅하는 연구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기초 기전을 연구하기 때문에, 다양한 인간질환에 적용될 수 있고, 다양한 분야(기초 및 임상)의 국내외 연구진과 협업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 연구실이 만들어진 지도 이제 15년이 넘어가면서, 실험실만의 노하우와 리소스, 집단지성이 점점 축적·확장되어가고 있음을 체득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하늘처럼 높게 보였던 외국 유수 기관들의 연구결과가 우리 실험실과 큰 차이가 나지 않음을 학생들과 함께 논문을 공부하면서 느끼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연구실은 프로테아좀을 단순한 ‘단백질 분해 기계’가 아닌 세포 항상성을 조절하는 역동적인 시스템으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이를 ‘분해용 치료기계’로 활용하여 다양한 질병의 치료제로 연결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삼성미래기술육성센터의 지원이 실용화의 큰 마중물이 되었습니다.
불과 30~40년 전만 해도 전 세계 과학자들의 관심은 단백질의 ‘생성’에만 쏠려 있었습니다. 1982년 출간된 생화학 교과서의 바이블 “Lehninger의 생화학” 초판에는 단백질 분해에 대한 설명이 전무했고, 제 학부 시절 교재였던 1995년판 “Stryer의 생화학” 교과서에 와서야 유비퀴틴-프로테아좀 시스템이 등장했지만 너무 새로운 분야라 수업에서 다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요? 단백질의 생성만큼이나 정확한 ‘분해’가 세포 건강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이 상식이 되었고, 현재 서울의대생들이 배우는 교과서(Harper’s Illustrated Biochemistry, 2015판)에는 프로테아좀의 구조가 표지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교과서 내용의 ‘진화’는, 위대한 발견이 한순간의 번뜩임이 아니라 끊임없이 의심하고 수정하는 ‘긴 몰입의 축적’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몰입은 어떻게 혁신이 되는가
오디세우스가 여정을 하던 고대 그리스인들은 시간을 누구에게나 똑같이 흐르는 물리적 시간인 ‘크로노스(Chronos)’와,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는 결정적 순간인 ‘카이로스(Kairos)’로 구분했습니다. 지난 수십 년간 단백질 분해 연구에 바쳐진 시간은 Chronos였으나, 그 속에서 축적된 실패와 끈질긴 몰입이 결국 Kairos를 만들어냈습니다. 모든 시간이 Kairos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Kairos는 언제나 충분한 Chronos 위에서만 피어납니다. 여기에 일차적으로 필요한 것은 눈앞의 현상을 쉽게 지나치지 않는 태도입니다. 예상과 다른 결과도 단순한 실패가 아니라 기존 지식으로 설명되지 않는 새로운 질문일 수 있습니다. 충분히 준비된 연구자는 작은 현상에서도 의미를 발견하고, 이를 검증 가능한 가설과 다음 연구로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어떠한 실험 결과도 과소평가하지 말라"고 강조합니다. 사소한 결과라도 기존 지식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면 위대한 질문의 씨앗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류의 역사를 바꾼 엄청난 연구는 대부분 대학원생들의 사소한 결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몰입의 시간(Chronos)이 진정한 혁신(Kairos)으로 이어지기 위해 필요한 또 다른 필요조건은 바로 ‘융합’입니다. 다른 분야 연구자의 질문을 통해 당연하게 여겼던 전제가 다시 검토되고, 그 과정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실험 방향과 해결 방법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우리 실험실도 캠퍼스 내의 다양한 연구실을 비롯해 국내외 연구자들과 협력하며, 각자의 전문성과 기술에 단백질 품질 관리와 분해의 시각을 더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사소한 발견이 실제 치료 전략과 의료 기술로 발전하기까지 많은 시간과 검증이 필요한 만큼, 기초연구자와 임상연구자의 협업은 서로 다른 전문성과 자원을 연결하고,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낡은 전제를 허물고 새로운 해결책을 제시하는 힘이 됩니다. 레드 오션(Red Ocean)을 벗어나 블루 오션(Blue Ocean)을 창출하는 과정은 고통스럽지만, 그 문턱을 넘어야지만 우리는 완전히 다른 미래를 꿈꿀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몰입의 시간은 지켜져야 한다
이 에세이의 제목이 던지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서, 저는 지금 우리 연구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몰입의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단순히 연구실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는 일이 아니라, 더 나은 질문을 찾고, 그 질문의 해답을 찾을 때까지 끝까지 놓지 않는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과학자의 몰입은 개인의 의지나 선택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연구자가 한 가지 주제에 깊이 천착할 수 있는 제반 환경, 그리고 실패를 견디고 다시 도전할 수 있는 문화적/제도적 토양이 함께 마련되어야 합니다.
결국 과학자에게 몰입의 시간을 보장하는 것은 한 사람을 위한 배려가 아니라, 미래의 지식을 준비하는 우리 대학의 필수적인 투자일 것입니다. 역사적으로도 유럽에서 미국으로 세계 패권이 이동하는 과정에는 과학기술 인재의 유입과 과감한 R&D 투자를 통한 미래 기술 주도권 확보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오늘날 중국이 미국을 맹추격하며 가장 주력하는 부분 역시 이와 궤를 같이합니다. 우리 대한민국의 경쟁력 또한 결국 우수한 인력과 이들을 장기적 안목으로 연구에 매진할 수 있도록 돕는 시스템 확보에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랜 탐구와 몰입하는 연구자에 대한 존중, 활발한 협업이 우리나라 대학의 연구 문화로 확립되고, 그 결과가 세상을 바꾸는 혁신적 바이오 기술로 결실 맺기를 진심으로 기대합니다.
“실험은 생각을 검증하는 과정이고, 실패는 생각을 다듬는 기회입니다.
따라서 과학자에게 가장 필요한 자원은 ‘시간’이고, 그 시간은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는 ‘몰입의 시간’이어야 합니다.
이민재 교수가 이끄는 단백질 다이나믹스 연구실(Protein Dynamics Laboratory) 구성원들과 함께글: 이민재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연구부학장)
※ 본 글은 서울의대 웹진에 게재된 원고를 저자의 동의하에 수정·보완하여 재수록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