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0년간 정설이던 'ATP로 DNA를 끌어당기는' 방식과 나란히, 연료 없이 '다리 놓기'만으로 염색체를 응집시키는 기작이 진핵생물 전반에 보존되어 있음을 확인… 발달질환·암 이해의 새 단서
연구 필요성
DNA의 접힘은 긴 끈을 그저 감아 넣는 일이 아니다. 유전자를 켜는 스위치와 유전자 본체는 DNA 상에서 수십만 글자만큼 떨어져 있는 경우가 흔한데, DNA가 접혀 이 둘이 물리적으로 맞닿아야 비로소 유전자가 켜진다. 한 줄로 늘어놓으면 남남인 두 지점이, 접는 순간 이웃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접힘이 어긋나면 대가가 크다. 켜지지 말아야 할 유전자가 켜지고, 발생 이상이나 암으로 이어진다. 실제로 접힘을 담당하는 SMC 단백질의 이상은 코넬리아 드 랑에 증후군을 비롯한 선천성 발달 질환과 여러 암에서 반복적으로 발견된다. 염색체가 어떤 원리로 접히는지를 아는 일은, 이런 질병이 왜 생기는지를 분자 수준에서 설명할 수 있는 출발점이다.
연구성과/기대효과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류제경 교수 연구팀은 영국 프랜시스 크릭 연구소, 네덜란드 델프트공대, 일본 교토대, 한국과학기술원(KAIST) 연구진과의 국제 공동연구를 통해, 진핵생물의 SMC 단백질이 ATP를 쓰지 않고도 DNA에 '다리를 놓아' 응축체를 만드는 기작이 생물종과 단백질 종류를 넘어 공통으로 보존되어 있음을 규명하였다. 앞서 남아 있던 빈자리, 즉 '뽑은 고리를 한자리에 모아 묶는 장치'의 정체를 제시한 것이다.
염색체 접기 작업의 주역이 코헤신과 콘덴신으로 대표되는 SMC 단백질 복합체다. 지금까지 작동 방식은 하나로 설명되어 왔다. ATP라는 연료를 태워 DNA를 잡아당겨 고리를 뽑아내는 '루프 압출(loop extrusion)'이다. 실을 손가락에 걸고 계속 끌어당겨 고리를 키우는 모습을 떠올리면 된다. 단일분자 실험으로 직접 눈으로 관찰된, 지난 10년간 이 분야의 중심 가설이었다.
그러나 루프 압출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장면이 남아 있었다. 분열기 염색체가 원통형으로 짧고 단단하게 응집되는 성질, 그리고 한 지점에 여러 개의 루프가 겹겹이 모여 있는 구조다. 줄을 끌어당기는 작용만으로는 이런 응집이 나오지 않는다. 고리를 뽑는 기계는 있는데, 뽑은 고리를 한자리에 모아 묶어 주는 장치가 무엇인지는 설명되지 않았던 것이다.
연구팀은 발아 효모, 분열효모, 인간 코헤신 및 콘덴신 등 네 가지 SMC 복합체를 단일분자 형광 이미징으로 관찰하였다. 결과는 네 가지 모두 같았다. ATP의 유무와 무관하게 DNA 위에서 응축체를 형성한 것이다. 이 응축체는 액체 방울의 성질을 그대로 보였다. 두 방울이 만나면 하나로 합쳐지고, 내부의 단백질이 바깥 용액과 끊임없이 자리를 바꾸며, 소금 농도를 높이면 10초 안에 흩어졌다. 원자힘 현미경(AFM) 관찰에서는 인간 코헤신 한 분자가 두 가닥의 DNA를 동시에 붙잡는 모습이 직접 포착되어, 응집의 동력이 '다리 놓기'임이 확인되었다. 응축이 시작되려면 약 3천 염기 이상의 DNA 길이가 필요하다는 조건도 밝혀졌다.
나아가 사람 세포의 초해상도 현미경 영상과 고해상도 염색체 접촉 지도(Micro-C) 분석을 통해, 이러한 응축체가 살아 있는 세포 안에서도 여러 개의 루프를 한자리에 모아 겹친 구조를 만들어낸다는 근거를 제시하였다. 이번 결과는 SMC 단백질이 ATP를 쓰는 루프 압출과 ATP가 필요 없는 다리 놓기 응집이라는 두 방식을 나란히 사용해 유전체를 조직화한다는 관점을 제시한다. 코헤신과 콘덴신의 이상으로 발생하는 발달 질환과 암을 이해하는 데에도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연구 추진 배견, 성과, 기대효과 등
염색체 구조 유지(Structural Maintenance of Chromosomes, SMC) 단백질 복합체는 코헤신(cohesin)과 콘덴신(condensin)에 의한 ATP 의존적 **DNA 루프 압출(loop extrusion)**을 비롯한 여러 과정을 통해 고차 유전체 구조 형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활성만으로 염색체 구조의 복잡성이 온전히 설명되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본 연구에서는 SMC 복합체가 생체분자 응축(biomolecular condensation)을 통해 ATP 비의존적으로 염색질을 응집시키는 진화적으로 보존된 기작을 규명하였다. 단일분자 형광 이미징을 통해 다양한 SMC 복합체가 DNA에 결합한 동적 응축체를 형성하며, 이들이 액적 융합, 광표백 후 형광 회복(FRAP), 자유 SMC 복합체와의 빠른 교환 등 생체분자 응축체의 주요 특성을 나타냄을 확인하였다. 인간 코헤신–DNA 복합체에 대한 원자힘 현미경(AFM) 분석에서는 DNA 길이에 의존적인 클러스터 형성이 관찰되어, 다리 놓기(bridging) 기반 응집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제공하였다. 또한 생체 내 초해상도 이미징 및 고해상도 염색체 접촉 지도(Hi-C·Micro-C) 데이터 분석 결과, 이러한 응축체가 다중 루프(multi-loop) 구조를 갖는 염색질 결합 클러스터를 형성함을 시사하였다.
종합하면, 본 연구 결과는 SMC 복합체가 ATP 의존적 활성과 나란히 ATP 비의존적 상분리 응집을 함께 활용하여 유전체 구조를 형성함을 입증한다. 이는 진핵생물 전반에 걸쳐 폭넓게 보존된 염색체 조직화 원리를 제시한다.
연구 내용
❒ 네 가지 SMC 복합체가 모두 만들어내는 'DNA 응축체'
연구팀은 진핵생물의 대표적 SMC 복합체 네 가지(출아효모 콘덴신, 분열효모 콘덴신, 분열효모 코헤신, 인간 코헤신)를 각각 정제해 단일분자 형광 이미징으로 관찰하였다. 유리 표면에 길게 펼쳐 고정한 λDNA에 이들 단백질을 흘려 넣자 네 가지 모두에서 DNA가 한곳으로 모여 응집되는 현상이 나타났으며, 이 응집은 ATP가 있을 때와 없을 때 똑같이 일어났다. 인간 코헤신의 경우 응집이 완료되기까지 약 22초가 걸렸는데, 연료를 완전히 제거한 조건에서도 속도가 같았다. ATP를 소모하는 루프 압출과는 원리부터 다른 별개의 기작이라는 뜻이다. 응축체 하나에 모인 단백질은 복합체 종류에 따라 수백에서 천 개가 넘었다. 개별 단백질이 하나씩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여럿이 협동하여 조립되는 집단적 현상임을 보여 준다. 이 응축체는 세포 안과 비슷한 소금 농도와 단백질 농도에서도 안정적으로 형성되었고, 소금 농도를 높이거나 단백질을 제거하면 빠르게 흩어졌다가 단백질을 다시 넣으면 되살아났다. 이처럼 되돌릴 수 있는 성질은 생체분자 응축체의 대표적 특징이자, 이 현상이 생리적 조건에서 실제로 일어날 수 있음을 뒷받침한다.
❒ DNA에 '다리를 놓는' 행동이 응집을 촉발한다: BIPS 기작의 규명
응집의 동력이 단백질끼리의 결합인지, DNA를 매개로 한 다리 놓기인지를 가리기 위해 연구팀은 원자힘 현미경(AFM)으로 인간 코헤신과 DNA의 결합 형태를 직접 관찰하였다. 그 결과 코헤신 한 분자가 두 가닥의 DNA를 동시에 붙잡고 있는 모습이 포착된 반면, 코헤신만 있고 DNA가 없는 조건에서는 단백질끼리 서로 달라붙는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응집을 일으키는 힘이 단백질 간 결합이 아니라 단백질과 DNA 사이의 '다리 놓기'에서 나온다는 뜻이다. 이어 DNA 길이를 100 염기쌍부터 4만8천 염기쌍까지 바꾸어 가며 실험한 결과, 약 3천 염기쌍보다 짧은 DNA에서는 응집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짧고 뻣뻣한 DNA는 스스로 구부러져 고리를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문턱을 넘어서면 응축체의 크기가 DNA 길이에 대해 일정한 지수 법칙(지수 약 0.43)을 따라 커졌으며, 이는 단순한 결합으로는 설명되지 않고 다리 하나가 다음 다리를 불러오는 협동적 성장이 작동함을 보여 준다. 또한 FRAP 실험과 표지 단백질 교환 실험에서 모두 빠른 교환이 관찰되어, 이 구조가 굳어 있는 덩어리가 아니라 액체 방울처럼 유동적인 상태임이 확인되었다. 연구팀은 이 결과들을 '다리 놓기 유도 상분리(BIPS)' 모형으로 정리하였다. 처음 놓인 하나의 다리가 주변 DNA의 밀도를 높이고, 높아진 밀도가 다음 다리를 더 쉽게 놓이게 하는 되먹임 과정을 통해 응축체가 스스로 자라난다는 설명이다.
❒ 시험관을 넘어 살아 있는 세포 안에서도
연구팀은 사람 세포의 코헤신을 초해상도 현미경으로 관찰하여, 코헤신이 세포핵 전체에 고르게 퍼져 있는 것이 아니라 지름 90나노미터 안팎의 뚜렷한 덩어리를 이루며 세포당 500개 이상 존재함을 확인하였다. 또한 고해상도 염색체 접촉 지도(Micro-C) 분석에서는 하나의 염색체 구역 안에 15~25개의 루프가 겹겹이 들어 있는 구조가 관찰되었고, 코헤신을 떼어내는 단백질을 제거해 코헤신이 쌓이도록 만들자 겹친 루프의 수와 구역의 크기가 함께 늘어났다. 응축체가 여러 루프를 한자리에 모아 고차 구조를 만든다는 모형과 정확히 들어맞는 결과이다. 이번 연구는 SMC 단백질이 ATP를 쓰는 루프 압출과 나란히 작동하는 또 하나의 기작
연구 결과
세포 하나에 담긴 2미터 길이의 DNA는 지름 10마이크로미터의 세포핵 안에 정확하게 접혀 들어가야 하며, 어떻게 접히느냐가 곧 어떤 유전자가 켜지고 꺼질지를 결정한다. 이 접힘을 담당하는 SMC 단백질은 지금까지 ATP를 연료로 DNA를 잡아당겨 고리를 뽑아내는 '루프 압출'로만 설명되어 왔으나, 본 연구는 이들 단백질이 멀리 떨어진 두 DNA 지점을 동시에 붙잡아 '다리'를 놓음으로써 연료 없이도 염색체를 응집시키는 기작을 함께 지니며, 이것이 효모부터 인간까지 보존된 원리임을 규명하였다.
용어 설명
[1] 무엇을 다루는가
• 염색체·염색질: 세포 안의 유전 정보를 담은 DNA가 단백질과 함께 접히고 응집되어 만들어진 구조물이다.
• 염기쌍(bp): DNA를 이루는 기본 단위이자 길이를 재는 자. 사람의 DNA는 약 30억 염기쌍, 길이로는 약 2미터에 해당한다. 본문의 '3천 염기쌍'은 약 1마이크로미터 길이다.
• 진핵생물: 세포 안에 핵을 가진 생물. 효모·식물·동물·사람이 모두 여기에 속하며, 서로 10억 년 이상 진화적으로 갈라져 있다.
[2] 주역 분자
• SMC 단백질 복합체(Structural Maintenance of Chromosomes): 염색체의 구조를 유지·조절하는 핵심 단백질 복합체. 세균부터 사람까지 광범위하게 보존되어 있다.
• 코헤신·콘덴신(Cohesin / Condensin): 대표적인 SMC 복합체. 코헤신은 주로 세포 분열 사이 시기에 유전자 조절과 관련된 염색질 구조를 만들고, 콘덴신은 분열기에 염색체를 응축시킨다.
• ATP(아데노신삼인산): 세포가 쓰는 에너지 화폐. 단백질이 능동적으로 일할 때 소모하는 연료다.
[3] 두 가지 기작
• 루프 압출(Loop Extrusion): 단백질이 ATP를 연료로 DNA를 잡아당겨 고리(loop)를 뽑아내며 염색체를 조직화하는 과정. 실을 손가락에 걸고 계속 끌어당겨 고리를 키우는 모습에 비유할 수 있다.
• 상분리(Phase Separation): 섞여 있던 물질이 저절로 갈라져 한쪽에 진하게 모이는 현상. 국물 위에 흩어져 있던 기름방울이 저절로 합쳐져 큰 방울이 되는 것과 같다. 외부 에너지 없이 물리적 성질만으로 일어난다.
• 다리 놓기 유도 상분리(BIPS, Bridging-Induced Phase Separation): 단백질 하나가 서로 떨어진 두 곳의 DNA를 빨래집게처럼 동시에 붙잡아 '다리'를 놓고, 이 다리가 쌓이면서 DNA와 단백질이 한 덩어리로 응축되는 현상. ATP 없이 일어난다는 점에서 루프 압출과 구분된다.
• 생체분자 응축체(Biomolecular condensate): 막으로 둘러싸이지 않은 채 세포 안에서 액체 방울처럼 응집되어 있는 분자 집합체. 서로 만나면 합쳐지고, 내부 분자가 바깥과 자유롭게 드나든다.
[4] 어떻게 관찰했는가
• 단일분자 형광 이미징: 단백질 하나하나에 형광 표지를 달아, 분자 개별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들여다보는 기법. 여럿의 평균이 아니라 낱개의 행동을 볼 수 있다는 점이 핵심이다.
• λ(람다) DNA: 실험에 널리 쓰이는 표준 DNA. 바이러스에서 유래했으며 길이는 약 4만8천 염기쌍이다. 양 끝을 유리에 고정해 팽팽히 펼쳐 놓고 관찰한다.
• FRAP(광표백 후 형광회복): 형광 표지된 분자를 강한 빛으로 잠시 지운 뒤 형광이 되돌아오는 속도를 재는 기법. 구조 안팎으로 분자가 얼마나 활발히 드나드는지를 알려 준다.
• 원자힘 현미경(AFM): 매우 정밀한 탐침으로 시료 표면을 '만지며' 나노미터 수준의 구조와 부피를 재는 현미경. 빛으로는 볼 수 없는 크기를 본다.
• 초해상도 현미경: 일반 광학현미경의 한계(약 200나노미터)를 넘어, 수십 나노미터 크기의 구조까지 구분해 보는 현미경 기술.
• 염색체 접촉 지도(Hi-C·Micro-C): 세포 안에서 유전체의 어느 부위와 어느 부위가 가까이 맞닿아 있는지를 대규모로 읽어 내는 기법. DNA 전체의 '접촉 지도'를 그리는 것에 해당하며, Micro-C는 Hi-C보다 훨씬 정밀하게 볼 수 있다.
본 연구팀은 발아효모, 분열효모 및 인간의 SMC 단백질 군인 콘덴신 및 코헤신 단백질이 염색체 형성을 DNA 다리놓기를 통한 응축으로 형성시킴을 관찰하였다. [그림=서울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