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라와 너무 잘 맞는다며 호들갑을 떨던 지난 3주간의 휴가 같은 달콤한 여름은 개강 첫 주와 함께 와르르 무너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자퇴를 단념할 수 없는 이유는, 이 나라가 나에게 너무 친절하기 때문이다.
공항에 처음 내렸을 때, 나는 이 나라에 대해 별다른 기대가 없었다. 한 번 와본 적은 있지만, 정보를 찾아본 것도 아니었다.
그냥 딱히 가고 싶은 나라는 없는데 깨끗하고 안전하다고 알려져서, 잔잔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이유로 선택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안 알아봐도 너무 안 알아봤던 거다. 공항에서 미리 예약해 둔 에어비앤비까지 어떻게 가야 하는지도 몰랐다. 교통카드를 구매해야 하는지, 아니면 발권기에서 일회용 티켓을 살 수 있는지도 전혀 알아보지 않았다. 그런 나에게 하나의 장점이라면, 무작정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뻔뻔함이 있다는 것이다.
친절해 보이는 여학생에게 “혹시 나 여기로 갈 건데 교통권을 어떻게 사야 하는지 알려줄 수 있을까?” 하고 물었다. 역시나 친절하게, 같이 발권 줄까지 기다려서 종이 티켓으로 편도 티켓을 끊어줬다. 출발이 좋았다. 지하철에 탔는데, 수많은 캐리어가 서로 뒤엉켜 열차 안이 꽉 차 있었다. 나보다 큰 짐과 함께 휘청이는 나를 보던 어떤 아저씨는 엉덩이로 내 캐리어를 하드캐리하고 계셨다. “내가 네 짐을 엑스트라 서포트해 줄게.” 하면서 자신의 짐은 손으로 꽉 쥐고, 내 캐리어는 엉덩이로 꽉 잡아 주셨다. 시작이 너무 유쾌하고 좋았다.
지하철에서 내렸는데 엘리베이터를 찾지 못해 방황했다. 분명 역마다 엘리베이터가 있다고 했는데, 하는 수 없이 계단으로 짐을 올려야 했다. 그런데 나보다 크고 무거운 짐을 내가 들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 순간, 뒤에서 “내가 도와줄게!”를 외치며 키가 2미터쯤 되는 신사가 나타났다. 단숨에 지상층까지 내 짐을 날라주시곤 훌훌 사라지셨다. 운이 너무 좋았다. 그렇게 내 캐리어를 질질 끌고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데, 내가 탈 버스가 눈앞에서 떠났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도움들 때문인지 그렇게 기분 나쁘지만은 않았다. 버스정류장 의자에 앉아 주변을 둘러봤다.
‘와, 10년 만이네 이곳.’
여전히 깨끗했고, 안전했고, 예뻤다.
10년 전 여행으로 왔을 때도 도시 한복판에서 종이 지도를 펼치자 어떤 출근하던 남자분이 다가와 “Do you need help?”를 외쳤던 나라다. 그 당시엔 유럽의 인종차별이 워낙 심하던 때라, 인종차별만 안 해도 감사했는데 먼저 도와주겠다는 사람이 있어서 너무 신기했었다. 그분은 바쁜 출근길에도 내가 궁금해한 건물의 역사까지 설명해 주고 떠났다. 유럽에서 10개국 이상 가봤지만, 유일하게 인종차별을 한 번도 당하지 않은 나라는 이곳뿐이었다. 게다가 친절하기까지 하다니, 너무 놀라웠다. 그런데 이 나라는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좋은 쪽으로.
지금까지 3번 연속으로 도움을 받은 것도 신기했는데, 한국의 무더위 속에 있다가 약간은 싸늘할 정도로 선선한 여름 날씨가 참 쾌적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사실 제일 신났던 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생기고 예뻤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본 사람들 중 외적으로 가히 ‘탑 오브 탑’이라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을, 온 지 1시간 만에 다 만난 것이다. 그렇게 이 나라에 대한 내 첫인상은 “친절하고, 쾌적하고, 잘생겼어요.”로 요약됐다.
기나긴 대학원 지원 시기를 거쳐 드디어 내가 이곳에 와 있다는 사실이, 한국을 뒤로하고 또 새로운 세계에 나를 데려다 놓았다는 사실이 벅차기도, 새롭기도, 두렵기도 했다. 앞으로 어떤 일들이 펼쳐질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집에 가서 잠을 자고 싶었다.
그런데 내 옆자리에 있던 학생이 말을 걸었다.
“너 혹시 ○○학교 학생이니?”
“어...? 어떻게 알았어?”
내 얼굴에 학교 이름이라도 쓰여 있었나 싶었지만, 알고 보니 그 정류장에서 출발하는 버스는 그 학교로 가는 유일한 버스였다.
큰 가방을 들고 있고 어려 보이니, 학기에 맞춰 공항에서 막 도착한 학생 같았다고 했다. 우리는 전공도 비슷한 같은 학교 학생이었다. 그 친구는 남미에서 온 학생이었고, 벌써 학생 잡(job)을 구해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학비는 장학금으로 해결했다고 했다. 오자마자 친구를 만나 반가웠지만, 동시에 뒤처지는 느낌이 들었다. 유럽 학생들은 대부분 학비가 면제되기 때문에, 학비를 내는 사람이 나뿐인 것 같은 외로움과 억울함이 밀려왔다. 나 역시 학비 면제를 기대하며 이 학교를 지원했기에 더 쓰라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를 선택한 건 잘한 일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그 친구는 먼저 버스를 타고 떠났고, 나는 다른 버스를 타고 에어비앤비로 향했다. 버스에 짐을 실을 때도 정류장에 있던 사람들이 함께 도와줬고, 내릴 때도 같이 하차하는 사람이 내 짐을 내려줬다. 에어비앤비 호스트가 “도착하면 꼭 전화해 달라”라고 했는데, 유심카드가 없어 곤란했다. 그때 짐을 내려준 사람에게 부탁했더니 흔쾌히 전화를 걸어주며 호스트를 만나게 해 주었다.
게다가 자신은 건너편 아파트에 산다며 “우린 이웃이니까 또 만나자”라고 했다. 그렇게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다음날 메시지를 보냈지만 답은 받지 못했다...)
호스트가 1층으로 내려와 나를 맞아주었고, 함께 짐을 들고 계단을 올라갔다. 너무 무거운 짐을 여자 둘이 들기엔 무리였는데, 또 어디선가 배달맨이 나타났다. 마치 쿠팡이츠 배달 기사처럼, 배달을 마치고 집에 오던 청년이 우리를 보고 짐을 들어준 것이다. 그렇게 무사히 짐을 3층까지 옮길 수 있었다. 분명 이 나라 사람들은 서로에게 관심이 없고 먼저 말을 걸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온 지 2시간 만에 나는 무려 6명 이상에게 도움을 받았다.
온 우주가 나를 돕는 기분이었다. ‘이 나라, 나랑 잘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심지어 집에 들어오니 천장에 등이 달려 있었다. 한국 사람들에겐 당연한 일이지만, 유럽에서는 보통 천장에 조명이 없다. 늘 어두운 방에서 책상등 하나로 버텼던 내가, 이제는 스위치를 켜면 방 전체가 환해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게 이렇게 신기할 일인가 싶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더니, 유럽도 신문물을 받아들이는구나.” 천장 등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리자, “그건 아직도 유럽에선 흔치 않다. 너네 집이 좋은 거다.”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아무렴, 내 방이 밝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그렇게 기분 좋게 잠을 자고, 다음날 납작 복숭아를 먹을 생각에 들떠 무작정 마트를 찾아 나섰다. 내 사랑 크루아상을 팔던 리들이 집 근처에 있었다. 납작 복숭아는 상태가 좋지 않아 사지는 않았지만, 갓 나온 모닝 크루아상을 입에 물고 건너편 마트에서 신선한 납작 복숭아를 샀다. 여름을 유럽에서 보내는 게 처음이라 항상 납작 복숭아를 못 먹어본 게 한이었는데, 드디어 10년 만에 그 한을 풀었다. 생각보다 딱딱하고 그렇게 달지도 않았지만, 크루아상은 여전히 맛있었다. 이제야 유럽에 다시 온 게 실감이 났다.
요즘 유럽 학교들은 대부분 Goin 앱을 제공한다. 학교에 합격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학교 코드를 입력하면 같은 학교 학생들과 소통할 수 있는 커뮤니티다. 카카오톡처럼 채팅이 가능하고, 동아리 채팅방에도 들어갈 수 있으며, 전 세계 지도를 펼쳐보면 각 학생이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도 볼 수 있다. 프로필을 통해 전공, 나이, 이름, 관심사, 취미 등을 확인해 일촌을 맺기도 한다.
나는 여기서도 특혜를 봤다.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전 세계 친구들이 나에게 먼저 메시지를 보내왔다. “나 한국을 좋아해!” 하면서. 10년 전, 매일같이 인종차별을 받던 유럽에서 이제는 “한국인이라서 좋다”라고 사랑받는 시대가 되다니, 참 격세지감이었다. 다들 한국에 가봤거나, 가보고 싶다며 나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그래서 나는 한국에 있을 때부터 친구가 이미 많았다.
오자마자 친구들과 게이 퍼레이드도 보고, 드랙 퀸 쇼도 보고, 함께 강변에서 맥주를 마시며 좋은 시간을 보냈다. 한국의 친구들은 “벌써 친구를 이렇게 많이 만들었어? 핵인싸네!”라며 놀랐지만, 사실 나는 한 게 없다. 그저 메시지에 답장을 했을 뿐인데, 고맙게도 친구들이 저절로 생겼다. 그런데 아직 10년 전 인종차별의 트라우마가 남아 있어서인지 친구들을 경계하곤 했다. “이 나라는 너무 쉬운데? 이 행복이 너무 빨리 깨지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이 계속 따라왔다.
오자마자 한국 대사관에서 광복절 행사라며 한식을 잔뜩 준비해 주셨다. 고작 5일 못 먹은 한식이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또 학교에서는 유일한 한국인이라 한국인 친구는 만들기 어렵겠다 싶었는데, 이렇게 자연스럽게 한국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대사관이 마련해 줬다니, 신기했다. 해외에 여러 번 살아봤지만, 이렇게 이벤트를 여는 대사관은 처음이었다. 이후에도 김치 만들기, 쿠킹 클래스 등의 행사가 열린다고 했다. 이 완벽한 나라는 도대체 어떤 나라인가... 너무 완벽해서 겁이 났다.
날씨도, 사람들도, 친구들도, 한국인 커뮤니티도 모두 완벽했지만 사실 경제적인 문제만큼은 너무 힘들었다. 공항에서 에어비앤비까지 편도 교통권이 1만 원이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 리무진도 아닌 지하철과 버스 환승인데, 정말 만 원이라니. 그 후에도 시내에 나갈 때마다 꽤 큰 액수의 교통비를 지출했다. 이걸 알고 나니 집 밖을 나가기가 무서워졌다. 이동의 자유가 박탈된 기분이었다.
마트에 가니 멀티탭이 2만 원이 넘었다. 장학금도 없이 자비 유학을 온 내가, 이 나라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두려웠다. 에어비앤비가 끝나면 학생 기숙사로 이사해야 했다. 그런데 여기는 가구가 없는 곳이 많다고 했다. 내가 당첨된 곳도 냉장고도, 인덕션도, 아무것도 없는 노옵션이었다. 막막했지만 새로 지은 건물이고, 집을 구하기 힘든 나라라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때 에어비앤비 호스트가 “페이스북 무료 나눔 그룹에 글을 올려보라”라고 했다.
그래서 이렇게 썼다.
“안녕하세요, 저는 ○○대학교에서 석사를 시작할 럭키걸입니다.
정말 변기 빼고는 아무것도 없는 학생 주택에 당첨이 됐어요.
혹시 가구나 주방 기구를 나눔 해주실 수 있는 분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별 기대 없이 올린 글이 순식간에 핫토픽이 됐다.
사람들이 분노했다. “어떻게 학생에게 저런 주택을 분양할 수 있냐”며, “요리할 권리라도 보장돼야 한다”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물건들을 댓글에 적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댓글은 20개가 넘었고, 인덕션부터 책상, 침대, 옷장까지 기부하겠다는 사람들이 생겼다. 이게 실화인가 싶었다. 온 우주가 또 한 번 나를 돕는 기분이었다.
용기를 얻은 나는 에어비앤비 1층에 이렇게 쪽지를 붙였다. “3층 에어비앤비에 사는 한국 학생인데, 혹시 나눔 가능한 게 있다면 알려주세요! 제가 찾으러 갈게요.” 그렇게 아래층 이웃들에게서 새 에어프라이어, 그릇, 컵 등을 나눔 받았다.
한국에서는 늘 내가 나눔을 하던 사람이었는데, 이번엔 받는 입장이 되니 어색하면서도 감사했다. 마치 내가 그동안 기부했던 것들이 되돌아오는 느낌이었다. 호스트도 내가 이렇게 많이 받아 온 것에 놀랐고 심지어 모든 물건이 새것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줄 건 없지만 차로 물건을 옮겨줄 수 있다”라고 했다. 정말 차로 와서 도와주었다. 냉장고는 무료 나눔이었지만 운반은 어려워서 업체를 불러 옮겼다.
그렇게 내가 이사에 쓴 비용은 운반비 12만 원이 전부였다. 가구를 다 사려면 족히 200만 원은 들 거라 발을 동동 구르던 나에게 이런 행운이 찾아올 줄은 몰랐다. Goin 앱에서 만난 학교 친구들도 가구 나르는 걸 도와주고 조립까지 함께 해줬다. 그 친구들과 짜장라면을 끓여 먹으며 이삿날을 마무리했다.
그렇게 이사를 잘 마치고, 그다음 날 개강을 했다. 그런데 첫날부터 그렇게 멘붕이 왔으니 너무나 충격이었다. 온 우주가 나를 돕는다고 생각했는데, 학교에 가니 나를 나락으로 이끄는 기분이었다. 내가 집을 어떻게 꾸렸는데, 얼마나 좋은 사람들을 만났는데… 학교에서 이런 시련을 맞을 줄이야. 너무 반전이 심했다.
나에게 너무나 친절한 나라와 잔인한 학교. 그 사이에서 이리저리 질질 끌려다니는 나를 발견했다. 나는 앞으로 어느 쪽으로 당겨지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