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이 연재를 시작하게 된 이유]
이 글의 주제를 ‘워라밸(Work-Life Balance)을 지키는 연구자의 하루’라고 시작하였지만, 사실 나는 ‘워라밸’이라는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흔히 떠올리는 워라밸은 오전 9시에 출근해서 오후 6시에 퇴근하고, 저녁에는 온전히 개인 시간을 가지는 삶이다. 일과 개인의 삶을 분리해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말이지만, 연구하는 삶에서는 그 경계가 거의 없다. 연구뿐만 아니라 목표가 있고 성공하고 싶은 사람, 혹은 일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일과 삶을 칼같이 나눈다는 것은 오히려 모순처럼 느껴진다. 실험실에서의 하루는 실험 일정과 그 실험들의 결과에 따라 수시로 변하고, 실험이 끝난 후에도 결과에 따라 데이터 분석과 실험의 방향을 생각하느라 사실 해야할 일이 끝나기보다는 그 날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일을 하고 마무리하는 것이다. 또한 새로운 연구결과를 발표하는 논문들이 매일 쏟아지기 때문에 공부에 대한 끝은 더욱이 없다.
대학원은 의무교육도 아니고, 일반적으로 경제활동으로 택하는 직업도 아니다. 대부분의 대학원생은 호기심과 열정 때문에 이 길을 택했을 것이다. 학위 과정 동안 연구는 나에게 일이자 나 자신이었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하루의 중심은 늘 연구였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니었고, 휴일이나 주말의 구분 없이 살아오며 늘 내 일정의 중심은 ‘내 연구가 지금 어디쯤인가’였다.
처음 인턴으로 실험실에 들어갔던 날과, 입학 후 첫 출근했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기본 실험을 배우고 정신없이 지나간 첫 1-2년 동안 나는 아침 9시에 들어가 밤 10시에 퇴근했고, 집에 돌아오면 바로 쓰러지듯 잠들었다. 그런데도 힘들다는 감정보다 더 크게 남아 있었던 것은 새롭게 알아가는 재미와 몰입감이었다. 이렇게 새로운 것을 공부하고 알아간다는 재미도 있었지만 학위과정 초반에는 논문 한 편을 이해하는 데 며칠씩 걸렸고, 랩미팅이나 저널클럽 발표 준비를 일주일 넘게 해도 늘 떨었다. 실험은 내 뜻대로 되는 날보다 안 되는 날이 더 많았고, 매일 울었던 시기도 있었다. 다음날 결과를 열어보기 무서울 때도 있었고, 위경련으로 쓰러져 일주일 넘게 입원한 적도 있었다. 우울증 약을 처방받아 상담을 받던 시기도 있었다.
연구실 창밖에서 바라본 하늘 당연히 이런 몰입이 항상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계속 같은 강도로 달리다 보면 번아웃이 오기 마련이고, 나 또한 그런 시기를 여러 번 겪었다. 그래서 이러한 번아웃을 극복하고 스트레스에 예민한 나를 극복하기 위해 인턴 시절부터 박사 과정, 그리고 해외에 포닥을 하러 온 지금까지도 나는 스트레스 관리와 나 자신의 회복 방법을 찾아왔다. 새로운 취미를 배우거나, 잠시 혼자서 모든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갖기도 하고 운동에 깊게 빠져도 보았다. 이런 일들이 연구의 속도를 높여주지 않지만, 장기적으로는 나를 버티게 하는 기반이 되었다.
아마 이 글은 ‘보통의 워라밸’을 기대했던 사람에게는 다소 실망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연구를 사랑하는 한 연구자로서, 연구를 잘하고 싶고 성장하고 싶어서 노력했던 기간 동안 내가 직접 부딪히며 느낀 생각들을 솔직하게 기록하고 싶었다. 연구나 실험을 ‘교수님이 시켜서’ 혹은 ‘혼나지 않기 위해서’ 한다고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최소한의 일만 하게 된다. 퇴근 시간을 기다리게 되고, 퇴근 후의 개인 시간이 하루의 유일한 보상처럼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서 내가 남들보다 잘하고 싶고 성장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순이다.
스스로 연구에 대한 궁금증을 품고 배우며 나아간다면,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퇴근 시간’이라는 개념 자체가 점점 의미를 잃게 되는 건 다들 느꼈을 것이다. 실험자체가 끝나더라도 데이터를 정리하고 관련 논문들을 공부하고 앞으로의 실험계획을 정리하다 보면 하루가 금방 사라진다. 물론 그렇다고 무작정 랩에 오래 머물러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단순히 시간을 채우고, 그 안에서 위안을 얻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중요한 건 얼마나 오래 있었느냐가 아니라, 그 시간을 어떻게 사용했느냐다.
사실 랩에 오래 남아 있다는 것만으로 스스로에게 쓸데없이 만족감을 느끼는 순간도 있다. 꼭 밤을 새운다고 해서 생산적인 것도 아니다. 물론 실험 자체가 하루 종일 걸려 밤을 새워야 하는 날도 있다. 하지만 그런 날보다 더 자주 있는 것은, 정작 중요한 실험이나 발표 준비보다는 사람들과 이야기하며 시간을 흘려보내거나, 별로 중요한 일 없이 자리를 지키는 경우다. 이런 날이 반복되면, 어느 순간 자신이 노력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생산적인 실험 결과는 없지만 “나 그래도 열심히 했다”라는 자기만족에 빠지고, 밤을 새운 것 자체가 성취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실제로 결과는 잘 나오지 않고, 다음 날에도 불안감과 자기 연민이 따라온다. “왜 난 밤새도록 일했는데도 결과가 안 나오지? 망했어…”라는 루프에 빠지거나, 아무 결과도 없지만 하루 종일 실험실에 있었던 나 자신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자책하게 된다. 이런 감정은 단순히 피곤함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실험과 공부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는 불안감 또한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이런 패턴에 빠지지 않으려고 항상 의식적으로 점검한다.
아마 이런 나의 생각들이 소위 말하는 '꼰대'처럼 느끼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떠한 분야든 실력을 쌓고 어느 정도의 궤도에 올라가기까지의 구간은 존재한다. 연구와 실험 또한 익숙해지고 자연스럽게 나아가는 시기까지는 조금 더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의 체력과 집중력을 다해서 치열하게 쌓아 올린 기반은 이후에 정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삶을 일에 모두 태우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나 또한 연구 외에 아무것도 안 했다는 것은 아니다. 퇴근하고 술 마시고 운동하고 친구들 만나며 잘 놀았다. 연구라는 건 하루 이틀, 일 이년 해서 끝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오래 지속 가능한 루틴을 만들어야 한다. 일을 줄이기보다는 나의 회복 탄력성을 높이고 이로 인해 나와 일을 유지시킬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이 길을 치열하게 찾아가는 과정에서 나 자신에 대해 잘 알게 되었고, 비로소 나만의 일과 쉼의 밸런스를 찾을 수 있었다. 과로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기에게 맞고 효율적으로 회복하는 방법을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이 연재를 시작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연구와 일상 사이에서 번아웃을 반복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워라밸’이라는 것을 단순히 시간으로 9-6을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일과 나의 성장에 대부분의 시간과 체력을 쓰더라도 나를 진정으로 회복시킬 수 있는 '나만의 루틴'을 만드는 일이라고 믿는다. 물론 나의 이러한 경험들이 모두에게 정답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같은 길을 걷는 연구자로서 내가 직접 부딪혀 찾은 '지속 가능한 연구의 자세'를 솔직하게 기록해 두는 것이, 어쩌면 여러분이 겪는 어려움의 실마리로, 혹은 작은 위로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