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 시절, 용돈이 빠듯해지자 시급이 괜찮은 아르바이트를 둘러보고 있었다. 여러 공고를 살피던 중 유독 눈에 띄는 곳이 있었다. 시급도 높고 일급으로 급여를 지급하며, 근무 시간도 적당한 음식점 아르바이트였다. 열심히 준비해 갔던 이력서도 제대로 보지 않은 채로 사장님께서는 “언제부터 나올 수 있어요?”라고 물었다. 이렇게 조건이 좋은데 너무나 간단하게 채용이 되는 것이 조금 걸렸지만, 돈이 급했던 나는 “당장 내일부터 가능합니다.”라고 답하였다.
쉽게 채용되었던 이유는 일한 지 하루 만에 알 수 있었다. 공고에는 ‘서빙’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실제로는 서빙 외에도 불판 닦기, 숯불 옮기기, 설거지, 청소 등 음식 조리를 제외한 거의 모든 일을 해야 했다. 가게 크기에 비해 일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고, 손님은 끊이지 않고 몰려들었다. 정말 말 그대로 물 한 잔 마실 여유조차 없었다. 사장은 늘 신경이 곤두서 있어서 주문이 밀리거나 사소한 실수를 하면 목소리가 커졌고, 가끔은 욕설까지 튀어나오기도 했다.
대부분의 아르바이트생은 몇 달을 버티지 못하고 나갔지만, 돈이 급했던 나에겐 선택지가 없었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스트레스를 받는 날들이 길어지자 학업에 지장이 갈 만큼 지쳐버렸고, 더는 일을 병행하다가는 큰일이 날 것 같아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때의 일 덕분에 내 인생 최악의 아르바이트 1위는 항상 그곳이었다. 다시는 이 정도로 나를 몰아붙이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기억이 아직까지 떠오른다.
예상치 못하게도 시간이 흘러 대학원에 진학했을 때, 나는 그때 감정을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대학원에 입학함과 동시에 수많은 일이 나를 육체적/정신적으로 괴롭히기 시작했다. 여러 개의 수업을 들으며 과제를 해야 했고, 연구실 자체적으로 진행하는 신입생 교육을 들어야 했으며, 저널 및 랩미팅 준비를 해야 했다. 여기에 더해 여러 실험을 진행하고 실험실 업무를 처리해야 했으며, 일상 대부분을 연구실에서 보내다 보니 가끔 답답함을 느끼기도 하고, 사소한 인간관계 때문에 심적으로도 힘든 나날들을 보냈다. 물론 육체적으로는 예전 아르바이트 일이 더 힘들긴 했지만, 몇 시간이면 끝나는 아르바이트와는 다르게 온종일 바쁜 일상을 소화해야 했다.
예전에 어디선가 좋은 연구자는 종합 예술가가 되어야 한다고 했던 말을 들었었다. 훌륭한 연구자는 연구뿐만 아니라 다양한 일들을 잘 처리할 줄 알아야 한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처음에는 연구자는 연구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저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연구실에서 어느 정도의 시간을 보내고 난 후 연구자, 특히 대학원생들은 정말 다양한 일들을 잘 처리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연구 능력은 기본이고, 자신의 연구를 효율적으로 전달한다거나, 보고서 등의 행정적인 일들도 빠르게 처리해야 하는 등 정말 다양한 능력이 요구되었다. 이러한 생활을 통해 여러 방면에서 성장할 수 있었지만, 그만큼 몸과 마음의 피로는 빠르게 쌓일 수밖에 없었다.
대학원에 입학한 지 정확히 6개월 뒤, 어느 날 갑자기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은 생각이 들면서 첫 슬럼프가 찾아보게 되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아무것도 하기 싫었고, 가까스로 연구실에 출근하여도 도저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도대체 왜 이럴까 생각해 보아도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최근에 딱히 크게 나쁜 일도 없었고, 크게 스트레스받는 일도 없었다. 지금에서야 평소에 쌓여있던 스트레스가 한 번에 터졌단 것을 알지만, 그때는 도무지 왜 이런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Image from Pixabay)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는 속담이 있다. 과도한 업무 또한 우리의 몸과 마음을 천천히 물들이고 있지만 정작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잘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수 있다. 슬럼프는 피로가 서서히 쌓이고 쌓이다가 결국 한계에 다다라 터져 나오는 현상이다.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주기적으로 나의 상태를 확인하고, 쌓인 스트레스를 없애 주어야 한다.
사람마다 스트레스와 피로의 해소 방식은 다르다. 어떤 이는 조용히 누워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하며, 또 어떤 이는 몸을 움직여야만 답답함이 풀린다고 한다. 그중 운동은 몸과 마음의 스트레스를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땀을 흘릴 때마다 머릿속의 잡음이 조금씩 사라지고, 스트레스가 배출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취미생활 역시 훌륭한 해소법이다. 글쓰기, 악기 연주, 독서, 스포츠 등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취미들이 사소해 보이더라도 뜻밖에 큰 위로를 주며, 마음의 휴식처로 작용할 수 있다. 여행 또한 좋은 방법이다. 익숙한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풍경과 공기를 마주하면 마음이 환기되고, 잠깐이라도 자신을 다시 채워 넣을 여유가 생긴다. 명상이나 일기를 통해 감정을 정리하는 것도 좋고, 누군가에게 힘든 일을 솔직히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무게가 한결 가벼워진다. 자신에게 맞는 해소법을 찾아서 그 방법을 지속적으로 실천하며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녹여보자.
이미 극심한 피로와 스트레스로 슬럼프에 빠졌다면, 무엇보다 몸과 마음의 짐을 잠시 내려놓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 시기를 무조건 극복해야 할 장애물로 보지 말고, 잠시 멈춰서 스스로를 재정비할 기회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 충분한 휴식과 수면을 취하고, 가능하다면 잠시 일을 내려놓는 것도 괜찮다. 멈춘다고 해서 뒤처지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자기 비난보다 자기 이해가 중요하다. ‘왜 이렇게 무기력할까?’, ‘왜 나만 힘든 걸까’라는 생각은 오히려 회복을 늦추게 된다. 대신 ‘그동안 많이 지쳤구나’, ‘충분히 잘 버텨왔어’라고 스스로를 다독여 주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혼자서 감당하기 어렵다면 친구, 가족, 혹은 전문가에게 털어놓는 것이 좋다. 때로는 객관적인 시선이나 따뜻한 공감 한마디가 회복의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슬럼프는 결코 실패의 증거가 아니라, 성장의 과정에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일시적인 쉼표다. 스스로를 몰아붙이기보다, 잠시 호흡을 고르고 천천히 다시 걸어 나갈 때 우리는 이전보다 더 단단해진 자신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Image from Pixabay)사실 이 글에서 제시된 방법들은 책이나 인터넷을 조금만 찾아봐도 쉽게 알 수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각자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또한, 계속되는 스트레스를 내버려 두다 보면 슬럼프나 번 아웃이 찾아온단 것도 어느 정도 체감하고 있다. 하지만 ‘별일 있겠어’라는 생각으로 자꾸만 쌓이는 스트레스를 무시하고 살다 보면 언젠가 크게 곪아서 터져버리고 마는 날이 생긴다. 너무 힘든 날을 보낸 하루의 마무리 시간에는 맛있는 것을 먹거나, 재미있는 영화를 보거나, 친구나 가족과 수다를 떨거나, 하늘을 바라보며 산책을 하는 등, 온전히 나만을 위한 시간을 가져보는 것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