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만사 인터뷰 연구자
생명에 대한 호기심이 이끈 의생명과학자의 길
한국뇌연구원 서판길 원장
- 생명과학 분야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와 연구를 지속할 수 있게 한 힘
- 보장된 길 대신 새로운 길에 도전하며 살아온 삶
- 우리나라의 뇌 연구 진행 상황과 뇌사업 육성 방안
- 젊은 생명 과학자를 응원하기 위해 만든 다한상의 의미와 앞으로의 꿈
미국의 시인 에밀리 디킨슨은 뇌는 하늘보다 넓다고 말했다. 1.4kg에 불과한 뇌에는 1천억 개의 신경세포가 존재하고 이 신경세포는 주변의 다른 신경세포와 복잡하게 얽힌 100조 개가량의 시냅스를 형성하고 있다. 이렇게 복잡한 뇌는 아직도 메커니즘이 밝혀지지 않은 미지의 영역에 속해있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은 대규모 프로젝트로 이 비밀에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뇌 연구와 지원은 어디쯤 와 있을까. 생체 신호전달의 세계적인 석학이자 한국뇌연구원장인 서판길 원장을 만나 그의 연구 인생과 함께 우리나라 뇌 연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봤다.
[한국뇌연구원에서 만난 서판길 원장] Ⓒ 생물학연구정보센터
Q. 서판길 원장님을 설명할 때 한국뇌연구원장, 교수, 생명과학 연구자 등 다양한 직함이 등장합니다. 만약 스스로 단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어떻게 불리길 바라십니까?
의생명과학자입니다. 과학자로서는 직업이 교수였으며, 과학자에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연구기관을 운영하는 기관장이니까 이 모든 것을 통합한 단 하나의 이름은 ’의생명과학자‘가 되겠군요.
Q. 의생명과학자가 원장님 스스로 생각하는 정체성인 것 같군요. 처음 생명과학 분야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생명체의 움직임이 신비롭지 않은가요? 생명체는 어떻게 해서 움직일까? 이것에 대한 호기심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습니다.
수의과 대학에서 학부를 마치고 의과 대학원에 진학했는데 저는 ’생체분자가 생명체 기능 조절의 기본단위‘라고 믿었어요. 당시엔 매우 생소했던 개념이었고, 매우 앞선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아직 저는 노벨상을 못 받고 있어요. 노벨상은 생각만으론 안 되는 것 같아요. (웃음)
생체 내 신경전달물질이나 호르몬의 작용기전(지금의 생체 신호전달)에 관심이 많았고, 호르몬 수용체를 분리 정제해 정체를 규명했고 포스포리파아제 씨(Phospholipase C)를 분리·정제하고 세계 최초로 특성을 규명하는데 참여했습니다. 이 외에도 여러 종류의 유전자를 클로닝 하며 지금까지 관련 연구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Q. 생체 신호전달에 대한 연구를 30여 년간 계속해 오면서 세계적인 석학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연구에 확신을 가지고 지속할 수 있게 한 힘,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운이 좋게도 연구에 손을 대는 것마다 대부분 잘 되었습니다. 저의 미국 선생님께서 저를 Magic hand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일에 대한 저의 집착이 이와 같은 결과를 만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연구는 초심을 잃거나 포기하지 말고, 기본에 충실하게 지속적으로 해 나가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Q. 오랫동안 연구를 하면서 지속적으로 해 나갈 수 있게 해준 한 사람을 꼽으라고 한다면요?
POSTECH 류성호 교수입니다. 오랜 시간 함께 연구했고 연구뿐 아니라 학생 지도도 서로 경계가 없었습니다. 그냥 다 우리 학생들이라고 지칭할 만큼 함께 동고동락했습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함께 연구한다는 건 흔한 일은 아니라고 하더군요.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간혹 있을 수 있지만 함께 동등한 관계에서 연구를 30년을 넘게 한다는 건 쉽지 않으니, 우리의 관계가 더 돋보일 수도 있어요. 처음 연구를 시작할 때 매년 빚을 지면서도 연구하는 재미에 연구에 매진 할 수 있었어요. 연말에 연구비 정산을 하면 매년 수천만 원 정도가 마이너스였는데 그게 방사성 동위원소 사용 비용 때문이었어요. 이게 비용이 많이 들어요. 매년 그러다가 우리나라 연구 환경도 좋아지고 우리의 랩도 국가 지정연구소가 되고 하면서 빚에서 헤어날 수 있었어요. 뜻이 같았고 류성호 교수의 선비 같은 인품과 서로 약점을 들추지 않고 존중하며 함께 했던 것이 우리의 공동 연구의 비결이라면 비결입니다.
[서판길 원장은 우리나라 뇌 연구에 대해 경쟁력 있는 분야를 선택하고 집중육성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 생물학연구정보센터
Q. 서 원장님은 미국국립보건원에서 박사후 연구원으로 계시다가, POSTECH이 설립되면서 작은 소도시 포항으로 왔어요. 그리고 안정된 POSTECH을 떠나 신생 대학이었던 UNIST로 가셨고 한국뇌연구원으로도 자리를 옮기기도 하셨습니다. 보장된 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새롭게 도전하시기를 두려워하지 않으시는 것 같은데요. 실제로 두려움이 없었나요?
과학기술자는 포괄적으론 일괄성의 마음가짐이 매우 중요하지만 때로는 상황에 따라 변화에 도전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도전은 용기 있는 사람만 할 수 있고 딱히 재미있을 것 같지도 않습니다. 위기는 기회라고도 하죠. 기관에 초기 구성원이나 주도적 역할을 할 기회는 흔치 않으며, 훗날 큰 보람을 얻을 수 있는 찬스기도 합니다. 당시 POSTECH은 연구 중심 대학을 표방하면서 세계 일류 연구 기반을 만들어 가겠다고 해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생각대로 21년간 그곳에서 연구 역량을 발휘할 수 있었지요. UNIST는 POSTECH에 이룬 업적과 경험을 통해 새로 만든 대학에서 연구기반을 주도적으로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이 큰 보람이 될 것 같아 옮겼습니다. UNIST 연구의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밭과 논을 갈고 씨를 뿌리고 한참 자라고 있는 것을 보고 이곳 한국뇌연구원으로 옮겼습니다. 한국뇌연구원은 5년 전 신생 기관이라 경험이 있는 제게 운영책임을 맡겨 주시고 정부와 대구시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아쉬운 부분이 있기는 하나 많이 발전시켰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도전에 대해 아직 기억에 남을 후회를 해 본적은 없습니다.
Q. 요즘 뇌 연구에 대해 선진국들의 관심이 뜨겁습니다. 일각에선 기술 패권에 대해 ‘우주’ 다음은 ‘뇌’라는 의견이 나올 만큼인데 미국은 Brain Initiative 2.0 프로젝트에 2026년까지 총 72조를, 중국은 중국 뇌 프로젝트(CBP)를 통해 향후 미국에 육박하는 규모의 전폭적 지원으로 뇌의 메커니즘을 밝히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우리나라의 뇌 연구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우리나라도 글로벌 뇌 연구 추세에 발맞추어 전략적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매년 뇌 연구 개발에 투자되는 절대적 액수는 타 선진국에 비해 적지만 GDP 대비 비율은 높습니다. 제한된 투자로 모든 뇌 분야를 육성하기란 불가능하므로 우리 현실에 맞게 경쟁력 있는 분야를 선택하여 집중 육성해야 하겠죠. 예를 들면, 뇌 발달 및 정서 질환 분야, 중독 등이 있습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우리나라 뇌 연구 투자를 살펴보면, 지난 10여년 간 뇌 연구의 기반을 구축하고, 원인과 기전을 밝히는 연구에 투자를 해왔고, 앞으로 10여년 간은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실용화 기술 및 치료제 개발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이에 발맞추어 한국뇌연구원도 실용화센터를 올해 개소해, 뇌 연구가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실용화 기술로 이어지는데 박차를 가하려 하고 있습니다.
Q. 연구 분야 중 요즘 새롭게 관심이 가고 있는 분야가 있다면요?
뇌 연구의 결과를 활용한 미래 산업인 뇌 산업에 관심이 갑니다. 뇌 산업이란 건강한 뇌의 기능을 유지하고, 뇌의 작동원리를 활용한 생산적 기업 활동을 말합니다. 이를 위해 기초연구를 더욱 튼튼하게 갈고 닦아야 합니다. 뇌의 기본 작동 원리를 알아야 하니까요. 그리고 뇌 작동원리를 활용해 실생활에 적용하려면 여러 타 학문과 융합을 통해 때로는 거시적인 안목을 가지고도 바라봐야 합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BMI, BCI, 뉴로마케팅, 게임, 교육 등 다양한 분야로 뇌 연구가 활용되고 뻗어나갈 것입니다.
Q. 뇌 산업은 어떻게 육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다학제간, 다면적 접근 이런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질병을 발견할 때 각종 기기 및 검사, 진단 키트 등을 활용해 찾아요. 과학기술을 접목해서 질병의 현상을 규명하려고 하는 거에요. 이게 바로 다면적 접근입니다. 각각의 기술, 최고도의 기술들을 통합(integration)해서 다양한 각도로 접근하는 연구가 필요합니다. 뇌는 복잡한 메커니즘을 가진 만큼 지금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선 다양한 각도의 접근이 꼭 필요합니다. 각 학제간 열심히 연구하다가 결과적으로 학제를 넘어선 기술이 나오는 것, 마치 스마트폰 안에 각각 최고의 기술들이 모여 최고 성능의 스마트폰을 만들어 내듯 뇌 산업도 그런 방향으로 가야 할 거라 생각합니다.
[서판길 원장이 기부한 기금을 기리기 위해 한국뇌연구원에 마련된 다한홀을 소개하고 있다. ‘다한’은 최선을 다한다는 순우리말이다 ] Ⓒ 생물학연구정보센터
Q. 앞으로의 꿈이 있다면?
제가 2020년에 대한민국 최고과학기술인상을 받으면서 수상 상금 3억 원을 어떻게 쓰는 것이 좋을까 고민하다가 한국뇌연구원에 발전기금으로 기탁했고 다한상을 만들게 되었어요. 젊은 과학자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우리나라에서 한 해 동안 발표된 논문 중에서 가장 좋은 논문을 뽑아서 상을 주기로 했습니다. 보통의 논문상과 다른 점은 제1저자에게 상을 준다는 겁니다. 사실 논문이 발표될 때 모든 스포트라이트는 교신저자에게 돌아가거든요. 그래서 저는 제1저자에게 상을 주는 다한상을 만들었고,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 한국뇌연구원에서 강당 이름을 다한홀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이 정신이 계속 이어져서 상금이 다 소진되기 전에 또 누군가 지원을 해주고, 이 상을 받은 젊은 과학자들도 나중에 시니어가 되어 이 상을 응원하는 등 상금이 끊이지 않고 채워지면 더없이 좋겠습니다.
Q. 생명과학 분야 후배 연구자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
적어도 과학기술인이 되겠다는 꿈을 가지려면 호기심이 많은가 스스로 반문해 보세요.
과학기술인이 되는 길은 험하지만 호기심 때문에 얻은 성취감은 다른 것 비교할 수 없지요. 그래서 과학기술인의 길을 걸어가는 것 같습니다.
저는 지금 생각해 보면 큰 실패를 한 기억이 없는데요. 이건 실패를 한 번도 하지 않은 게 아니라 사실은 너무 많아서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 일 겁니다. 왜 실패가 없겠습니까. 역사학자 Talor는 ‘실패하면서 발전한다’고 했지요. 또 ‘시련은 사람을 한 단계 성숙시킨다’ 하기도 하지요. 특히, 실험에 있어 수없는 시행착오가 있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연구자들에게 ‘실험을 즐겨라, 실패에도 얻을 것이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습니다. 또 우리는 변화를 즐기는 국민성이 있기 때문에 과학기술 분야에도 변화에 의한 혁신을 우리나라가 선도하게 될 거라 믿습니다. 실험을 즐기고 함께 연구하는 것을 즐긴다면 어느 날 여러분에 의해 혁신이 시작될 겁니다.
서판길 한국뇌연구원장
주요 경력사항
2021 제4대 한국뇌연구원장
2014 울산과학기술원 생명과학부 교수
2016 포항공과대학교 명예교수
주요 수상내역
2020 대한민국 최고과학기술인상
2017 생물학연구정보센터 올해의 국내 바이오 성과 뉴스 Top5 의과학부문
2014 제7회 아산의학상
2013 미래창조과학부 국가연구개발 우수성과 100선
2011 근정포장
2007 국무총리 표창
취재 : 생물학연구정보센터 박유미
본 게시물의 무단 복제 및 배포를 금하며, 일부 내용 인용시 출처를 밝혀야 합니다. 관련 문의 : interview@ibric.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