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빛사논문
기초과학연구원
Abstract
논문소개전체 설명
오래 남는 기억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뇌 속 '조연'이었던 별세포의 새로운 역할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일을 경험합니다. 하지만 어떤 기억은 며칠 만에 희미해지는 반면, 어떤 기억은 수십 년이 지나도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시험을 위해 외운 내용은 쉽게 잊어버리지만, 어린 시절의 강렬한 경험이나 소중한 사람과의 추억은 오래도록 기억 속에 남습니다. 그렇다면 뇌는 어떻게 중요한 기억을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을까요?
그동안 기억 연구는 주로 정보를 전달하는 신경세포(뉴런, neuron)에 초점을 맞춰 발전해 왔습니다. 신경세포 사이의 연결이 강화되면서 기억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만, 이미 형성된 기억이 수주에서 수년에 걸쳐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과정은 여전히 많은 부분이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번 연구는 이러한 질문에서 출발했습니다. 연구팀은 오랫동안 신경세포를 보조하는 세포 정도로만 여겨졌던 별세포(아스트로사이트, astrocyte)가 장기 기억을 유지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습니다. 특히 별세포에 풍부하게 존재하는 안키린2(Ankyrin-2, Ank2)의 기능에 주목했습니다. 안키린2가 별세포의 구조와 기능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면, 기억을 저장하는 신경회로에도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연구는 예상대로만 흘러가지는 않았습니다. 별세포에서만 안키린2를 제거한 생쥐를 이용해 기억 실험을 수행했지만, 학습 직후 확인한 최근 기억에서는 별다른 차이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가설이 틀린 것은 아닐까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연구팀은 기억을 '형성하는 과정'과 '오랫동안 유지하는 과정'이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가능성에 주목했고, 2주 뒤 장기 기억을 측정하는 실험을 추가했습니다. 그 결과, 최근 기억은 정상이었지만 장기 기억은 뚜렷하게 감소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기억을 만드는 것과 오래 유지하는 것은 서로 다른 생물학적 메커니즘으로 조절될 수 있다는 중요한 단서를 얻은 순간이었습니다.
이후 연구진은 그 이유를 단계적으로 밝혀냈습니다. 안키린2가 없는 별세포는 가지를 충분히 뻗지 못해 구조가 단순해졌고, 기억을 저장하는 엔그램 (engram) 신경세포와의 접촉도 크게 감소했습니다. 또한 기억 유지에 중요한 칼슘 신호와 뇌유래신경영양인자(Brain-derived neurotrophic factor, BDNF)에 대한 반응 역시 크게 약화됐습니다. 이는 별세포가 단순히 신경세포를 보조하는 존재가 아니라, 기억을 저장하는 신경세포를 지속적으로 지지하고 관리함으로써 장기 기억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연구팀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기존에는 별세포에서만 특정 신호를 정밀하게 조절할 수 있는 기술이 부족했기 때문에, 연구진은 광유전학을 이용해 별세포의 뇌유래신경영양인자 신호만 선택적으로 활성화할 수 있는 새로운 도구를 개발했습니다. 이 기술을 이용한 실험에서, 별세포 신호만 활성화해도 실험동물이 기억을 훨씬 오래 유지한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이는 별세포 기능을 조절하는 것만으로도 장기 기억을 향상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 첫 사례입니다.
이번 연구는 기억 연구의 중심을 신경세포에서 신경세포와 별세포가 함께 만드는 기억 네트워크로 확장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기억 형성과 기억 유지가 서로 다른 원리로 조절된다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으며, 기억력이 저하되는 노화나 알츠하이머병과 같은 퇴행성 뇌질환의 원인을 이해하고 치료 전략을 개발하는 데에도 중요한 기초가 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한편 안키린2는 자폐스펙트럼장애와 지적장애 등 다양한 뇌발달장애와도 관련된 유전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연구팀은 이번 성과를 바탕으로, 발달 과정에서 별세포의 안키린2가 신경회로 형성과 성숙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연구를 확장하고 있습니다. 장기적으로는 기억뿐 아니라 다양한 뇌 기능과 뇌질환에서 별세포가 수행하는 역할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이번 연구는 오랫동안 '조연'으로 여겨졌던 별세포가 사실은 기억의 지속 여부를 결정하는 핵심 조절자였음을 보여주며, 뇌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을 한 단계 넓혀준 연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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