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빛사 인터뷰
1. 논문관련 분야의 소개, 동향, 전망을 설명, 연구과정에서 생긴 에피소드
저희 집 강아지 ‘레고’는 오토바이를 무서워합니다. 예전에 오토바이가 빠르게 다가온 적이 있었는데, 실제로 부딪히지는 않았지만 그 후로는 오토바이 소리만 들어도 겁을 먹곤 하죠. 신체적 고통이 없었음에도, 심리적인 위협만으로 공포 기억이 학습된 것입니다. 사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 사고를 겪지 않았더라도, 사고가 날 뻔한 경험이나 폭력적인 뉴스 영상 등에 노출되는 것만으로도 강렬한 공포 기억이 형성되고, 이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공포기억 연구는 대부분 전기자극과 같은 신체적 고통에 기반한 실험에 의존해 왔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위협은 신체적인 것보다 심리적인 경우가 훨씬 더 많음에도, 이러한 심리적 위협을 처리하는 뇌 회로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었습니다. 저는 이 점에 주목하여, 심리적 위협에 의해 유도되는 공포 학습을 탐구할 수 있는 새로운 생쥐 모델을 구축하고, 이를 조절하는 신경회로를 규명하고자 했습니다.
연구에서는 생쥐가 포식자에게 습격당하는 상황을 모사하기 위해, 천장에 설치된 화면을 통해 빠르게 커지는 그림자를 제시했습니다. 이 시각적 자극은 전기자극 없이도 생쥐에게 강한 방어 행동을 유도했고, 결과적으로 학습된 공포 반응을 형성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구축된 비통각 기반 시각 공포학습 모델을 바탕으로, 저희는 광유전학(Optogenetics), 화학유전학(Chemogenetics) 등의 정밀한 신경조절 기법과 칼슘 이미징(Calcium imaging) 을 통한 실시간 뉴런 활성 관찰을 통해 관련 신경회로를 규명했습니다.
그 결과, 기존에는 통각 정보 전달로만 알려졌던 외측 팔곁핵(PBN) 이 시각적 위협 학습에도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PBN은 전통적으로 척수에서 올라오는 통각 정보를 처리하는 상행 경로의 일부로 알려져 있었지만, 이번 연구를 통해 비통각적 위협 자극에 의한 공포 기억 형성에도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을 처음으로 밝혔습니다.
나아가, 단일 시냅스 회로 추적법(mononsynaptic retrograde tracing) 을 통해, 후측 대뇌섬엽(pIC) 이 PBN과 직접 연결되어 있는 Top-down 회로를 이루고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특히 시각적 위협 자극이 제시될 때, pIC에서 PBN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신경세포들이 활발히 활성화되며, 이 회로가 PBN 뉴런의 활성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이 pIC–PBN 회로를 억제하면 시각적 위협에 따른 공포기억 형성이 현저히 감소했지만, 선천적인 방어 반응이나 전기자극 기반의 공포 학습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이 회로를 인위적으로 활성화하기만 해도 공포기억이 유도될 수 있었습니다. 이는 해당 회로가 신체적 고통이 아닌, 심리적 위협 정보를 처리하는 데 특화되어 있다는 점을 강력히 시사합니다.
이번 연구는 지금까지 개념적으로만 존재했던 ‘심리적 고통’과 ‘신체적 고통’의 차이를 신경회로 수준에서 처음으로 구분한 사례입니다. 흔히 ‘마음의 상처’라고 표현되는 심리적 고통이 뇌 내에서 어떻게 처리되고 학습되는지를 실험적으로 입증한 것이죠. 이러한 발견은 PTSD, 공황장애, 불안장애와 같이 심리적 고통이 핵심 원인인 정신질환의 병태생리를 이해하고, 더욱 정밀한 치료 전략을 개발하는 데 중요한 단초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림1. 정서적 & 신체적 고통 위협 신호 전달 뇌신경회로 모식도. 시각 위협자극은 신체적 고통을 유발하지 않지만 정서적 고통 신호 경로를 통해 불안한 상태를 만들고 공포 기억을 형성함.
그림2. 왼쪽부터 서보인 박사과정 (제 2저자), 한준호 박사 (제 1저자), 한진희 지도교수, 겁 많은 강아지 레고
2. 연구를 진행했던 소속기관 또는 연구소에 대해 소개 부탁드립니다.
제가 연구를 수행한 KAIST 생명과학과 한진희 교수님 연구실은 기억의 형성과 회상에 관여하는 신경학적 메커니즘을 탐구하는 연구실입니다.
기억에 필요한 정보가 어떤 회로를 통해 전달되고, 특정 기억이 어떤 뉴런에 저장되며, 회상 시 어떤 뉴런이 재활성화되는가와 같은 연구주제들을 광유전학, 화학유전학, 칼슘 이미징 등 첨단 신경과학 기법들을 활용해 정밀하게 분석하며 탐구하고 있습니다.
KAIST 생명과학과는 국내에서 신경과학 분야 연구실이 가장 활발하게 운영되는 기관 중 하나로, 실험실 간 협력과 교류가 매우 활발합니다. 덕분에 다양한 관점에서 깊이 있는 논의와 공동 연구가 가능하며, 이는 자연스럽게 연구의 질적 수준을 끌어올리는 토대가 됩니다.
저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신경과학에 대한 관심으로 KAIST 진학을 결심했고, 학부 시절에도 다양한 신경과학 강의를 수강하며 큰 흥미를 느꼈습니다. 대학원 과정에 들어와서는, 세계적 수준의 인프라와 잘 갖추어진 연구 환경 속에서 연구에 몰입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교수님의 지도와 연구실의 체계적인 지원, 그리고 훌륭한 동료들과의 협업, 자유롭고 생산적인 토론 문화 덕분에 의미 있는 연구성과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림3. 연구실 소개 사진
3. 연구 활동 하시면서 평소 느끼신 점 또는 자부심, 보람
‘내가 지금 확인한 이 결과가 인류 최초라고 ...?’
지금 내 손으로 규명한 사실이 인류지식의 경계선을 확장했다는 설렘, 그만한 짜릿함이 있을까요? 궁금했던 질문에 대해 가설을 세우고, 파일럿 실험의 결과를 확인하는 순간은 늘 가슴이 뛰곤 합니다. 실험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새로운 통찰을 얻는 과정 자체가 흥미롭지만, 가설이 정확히 들어맞았을 때는 특히 짜릿합니다. “지금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세상에 나 하나뿐”이라는 생각이 들면, 지루하고 지난한 실험의 반복 속에서도 단비 같은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사실 연구의 대부분은 외롭고 고된 여정입니다. 누가 시켜서 억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헤쳐나가야만 가능한 길입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아무도 가지 않았던 길을 내가 열어젖히고 확장시킨다는 사실은 저에게 큰 자부심을 안겨줍니다. 나의 노력이 결국 인류 지식의 한계를 조금씩 밀어내고, 언젠가 누군가의 삶에 도움이 된다면, 이보다 멋진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제 행복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스스로를 사랑하고, 타인을 사랑할 수 있는 삶을 사는 것.’ 그리고 과학은 저에게 그 행복에 다가갈 수 있게 해주는 가장 좋은 수단입니다. 궁금한 주제를 떠올리고, 직접 그 답을 찾아가는 즐거움.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사람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믿음. 그것이 제가 과학을 하는 이유입니다.
4. 이 분야로 진학하려는 후배들 또는 유학준비생들에게 도움이 되는 말씀을 해 주신다면?
정량적 성과보다는 정성적 성취에 관심을 기울이시길 바랍니다.
학위과정 중 논문이 몇 편이고, 몇 점짜리 논문을 냈으며, 몇 년 차에 figure 몇 개를 만들었는지 등의 정량적 지표는 여러분의 진짜 성장을 온전히 보여주지 못합니다. 진짜 중요한 건, ‘내가 연구자로서 올바르게 성장하고 있는가’를 끊임없이 돌아보는 자세입니다. 대학원의 학위과정은 독립된 한 명의 과학자로 거듭나는 시기입니다. 길게만 느껴지는 여정 속에서 실패는 수없이 반복되고, 처음의 열정은 어느새 루틴한 하루 속에 파묻히곤 합니다. 열정이란 파동과 같아서 오르락내리락 하니까요. 이따금, ‘나는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지’, ‘나는 왜 아직도 이 정도밖에 못했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면, 지나온 시간을 차분히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분명 어제보다, 작년보다 성장한 본인을 마주할 것입니다. 연차에 맞는 실적이란 없습니다. 오직 연차에 맞는 실력만 있을 뿐입니다. 작지만 진실한 하루의 힘을 믿고, 하루하루를 꾸준하고 지루하게 쌓아가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 소중한 관계를 맺으세요. 과학은 혼자서 이뤄낼 수 없는 일입니다. 오늘 내가 익힌 지식과 기술은, 어쩌면 앞서 걸어간 누군가의 친절한 설명과 나눔 덕분일 것입니다. 연구실의 선후배와 동기들은 경쟁자가 아니라, 함께 성장해가는 소중한 동료입니다. 어느 날은 내가 누군가를 이끌고, 또 어느 날은 내가 누군가에게 배우며, 그렇게 서로를 북돋아가며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나무가 모여 숲을 이루듯, 학문의 숲 속에서 단단하고 따뜻한 나무 한 그루가 되시기를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5. 연구 활동과 관련된 앞으로의 계획이 있으시다면?
과학은 사람들의 행복을 저해하는 요소들을 극복할 때 더욱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중에서도 저는 심리적·신체적 고통, 거동의 불편함, 식욕 감소와 같은 증상들이 대표적이라고 봅니다. 제가 박사 학위 기간 동안 공포나 PTSD 같은 심리적 고통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던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앞으로는 조금 더 폭넓은 시야를 갖기 위해 body-brain communication과 관련된 연구를 새롭게 시작하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현재 해외 유수 기관에서 포닥 과정을 밟을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장기적으로는 고통, 신체적 불편, 식욕 저하처럼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문제들을 과학적으로 해결하는 데 기여하는 연구를 꾸준히 이어가고 싶습니다.
6. 다른 하시고 싶은 이야기들.....
이전에, 故 박완서 작가님의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를 읽고 작성한 글이 있습니다. 그 중 일부 내용을 인용하며 글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지성과 과학, 그리고 살구나무
작가는 작품을 통해 비판 의식을 드러내고, 사람들을 감화시켜 세상에 영향을 미친다. 마찬가지로 과학자는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통해 세상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사회 시스템상의 안전망을 구축하는 재료이자, 바퀴 없는 자들의 구휼인 동시에 인류 행복의 증진이라는 의의를 갖는다. 과학과 철학의 발전이야말로 지성을 축조하는 기자재이고, 지성은 올바른 선을 정립하는 상아탑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박완서 작가의 마당에는 살구나무가 있었는데, 살구나무를 가꾸기 위해선 매일 잡초를 뽑아야 했다. 이윽고 탐스레 열매가 열리면, 좋은 살구들을 골라 담아와 으깨고 한여름에 며칠간이나 불로 고아내어 살구잼을 만들었다. 여간 중노동이 아니었겠지만 일련의 과정들이 소모적인 일이 아닌 생산적인 노동이 될 수 있던 이유는 바로 나눔에 있다. 살구잼을 만들어 주변이들에게 나눠주는 일이야말로 고되고 소모적인 노동을 생산적인 노동으로 바꾸어 준다. 우리가 과학을 하는 이유가 오직 지적 호기심에서만 비롯한다면, 그야말로 소모적인 일이 될 것이며 그 얼마나 작은 이유가 되겠는가. 과학의 발전도 살구 열매 따기와 다르지 않다. 나눔의 미덕을 갖춰야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멀리서 지구를 바라보면 동그란 원이다. 더 멀리서 지구를 바라보면 창백한 푸른 점이 되겠다. 그곳에선 그 어디라도 그 누구라도 중심과 같겠고, 그 무엇도 중심이 아닐 테다. 유구한 시간 속에 우리는 스쳐 가는 존재이며 거대한 우주에서 한 없이 작은 존재 아니겠는가. 그러니 이리저리 나부끼고 살아가며 크고 작은 일들에 수없이 상처받고, 또 그렇기에 절실히 사랑과 위로가 필요한 족속이겠다. 그런 우리가 잘나면 얼마나 잘났겠고, 못나면 또 얼마나 못났겠는가. 비합리가 팽배한 세상에서 이기와 질투, 허무와 관성, 만용과 멸시는 내려놓고 서로를 존중하고 위로하며 살아가기를 소망한다. (전문 링크: https://brunch.co.kr/@breezejun/24)
#Visual threat learning
# Affective pain
# PTS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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