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과학연구원이라는 것에 대해 관심이 없다가 갑자기 이슈가 되는 바람에 도대체 뭘 하자는 곳인지 정도는 알아 볼만한 가치가 있는것 같아 한겨레 사이언스온에 있는 오세정 원장의 과거 인터뷰를 읽어 보았습니다. 기초과학이 중요하다고 해서 꼭 기초과학연구원과 같은 기관을 설립해야 할 필요는 없으므로 그런 내용 이외에 기초과학연구원이 꼭 필요한 이유와 당위성에 대한 설명을 보았지만 현재 한국의 현실에서 존재해야 할 이유가 매우 피상적이라는 느낌입니다.
간단한 예를 들면, 인터뷰 내용 중에 “오 원장은 기초과학을 진흥하기 위한 새로운 평가와 운영 방식을 마련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했으며, 국가 과학정책의 의사결정 과정에 과학자들이 능동적으로, 상시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채널이 마련되어야 하며 "정부와 정치권에 대해 독립적으로 운영되며 발언권을 갖는 과학단체”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라는 설명같은 것입니다.
이런 일은 기초과학연구소가 하는 일이 아니라 미국의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같은 조직이 하는 일입니다. 기초과학과 관련된 이슈에 대해 관련 전문가로서 입장발표나 설명을 할수도 있지만 이것이 기초과학연구소의 설립목적이나 앞으로 해야 할 일에 핵심적인 내용으로 등장하는 것은 황당합니다. 정말 기초과학을 연구하는 연구원이라면 언급할 필요도 없는 지엽적인 일에 불과합니다. 이 자체의 설명만으로도 목적없는 건물을 먼저 지어놓고 억지로 건물에 맞는 그럴듯한 목적을 찾아 다니고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거기다가 실제로 독일의 Max Planck를 예로 많이 들고 여러가지를 알아 보고 조사를 해 보았다고 하는데 도대체 뭘 알아보고 조사했는지 모르지만 한가지는 확실한 것 같습니다. 독일의 Max Planck가 존재하기 위한 독일 전체 연구시스템의 foundation은 전혀 알아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독일의 연구시스템에서 중추역할을 하는 것은 여전히 대학입니다. Max Planck가 아닙니다. 특히 독일의 대학은 젊은 과학자들을 양성하고 지원하는데 있어서 한국의 현실과는 너무나 차이가 많습니다. Max Planck를 지탱하고 있는 foundation은 단지 그 시설과 인력의 규모, 연구자금만이 아닙니다. 사회전체 연구시스템이 비교적 고르게 발전하고 상대적으로 균형을 어느 정도 이루고 있는 눈에 잘 보이지 않는 foundation도 있습니다. 만일 기초과학연구원으로 인해서 기존의 허술한 한국 대학들의 연구시스템마저 심각하게 파괴되는 현상이 벌어진다면 Max Planck같은 위상이 아니라 기초과학연구원은 빛좋은 개살구로 전락할 수 밖에 없습니다. 독일에 가서 나무만 살펴 본 후에 한국에 옮겨 심어도 잘 자랄 것이라고 단정할 것이 아니라 그 나무가 자라는 여건인 숲도 함께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연구단은 기초과학연구원처럼 한군데 모여 있어야 한다는 논리는 자신들이 알아 보고 조사한 독일의 경우만 보아도 꼭 그래야만 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독일에는 8개의 독립기관이 기초과학 연구를 위해 협력하는 ”Union of German Academies of Sciences and Humanities” 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이들 역시 장기적인 기초과학 연구를 위해 독립 기관들이 서로 협력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소속된 과학자들만 해도 대략 알아 본 것만으로도 1500명이 넘습니다. 이렇게 독일이 다양한 방법으로 나라 전체의 연구시스템에 어느정도 균형을 유지하는 반면 한국은 기초과학연구원 단 하나로 인해서 국가 전체의 연구시스템 기반이 흔들릴 수 있는 파급효과도 있을만큼 과학 커뮤니티가 작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연구와 교육의 균형입니다. 대학은 기본적으로 연구와 교육을 동시에 수행하는 기관입니다. 그래서 아직도 독일의 연구시스템에서 대학이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고,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의 경우 연구중심대학이라고 해서 연구만 하고 교육을 소홀히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뛰어난 연구결과를 내기 위한 과정과 절차를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 기초과학은 그러한 연구를 하고 연구결과를 내는 많은 교수들로부터 결과뿐만 아니라 연구가 시작되고 나오기까지 과정과 절차까지 가르치고 배우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한국의 기초과학 분야가 전반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저변확대는 대학의 연구와 교육시스템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시스템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는지에 대해 다양한 학자들에게 물어 보고 의견수렴을 해 본 적이 있는지 의문입니다. 기초과학연구원과 같은 곳에 막대한 자금이 몰리는 것과 그러한 자금으로 대학들의 연구환경을 개선하고 지원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앞으로 한국의 기초과학 발전에 더 많은 기여를 할 것인지에 대해서 명쾌한 대답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독일에서 Max Planck가 성공적인 면이 있다고 해서 한국의 여건과 실정에 맞는지를 무시하고 무조건 그 모델의 성공적인 측면으로 기초과학연구원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것은 기초과학을 이야기하면서 기초과학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논리입니다. 과학의 재현성은 같은 조건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조건이 다를 때는 먼저 같은 조건이 될 수 있는지부터 입증해야 합니다. Max Planck와 기초과학연구원이 독일과 한국에서 같은 조건으로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는지에 대한 설득력있는 근거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저 Max Planck의 위대함만을 강조하고 모방하고 싶어하는 것만 보일 뿐입니다. 기초과학에서 주먹구구식의 추측은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일본이 Max Planck 모델로 기초과학을 발전시키고 노벨상을 받았던가요?
마지막으로 생각없는 정치가들이나 언론들의 노벨상 타령입니다. 막대한 국가세금으로 공사판 벌여서 낭비하거나, 부정부패로 세금이 제대로 사용되지 않을 때, 국가가 막대한 세금으로 외국의 물건을 광고해 줄 때 이들이 그 아까운 세금의 일부라도 과학자들에게 투자해서 노벨상을 탈 수 있도록 도와 주자고 해 본적이 한 번이라도 있습니까? 마치 하이에나들이 죽은 동물의 시체를 서로 뜯어 먹을려고 다투듯이 국가세금을 놓고 암투를 벌이고 이권다툼을 벌일 때 만일 한국의 과학을 위해서 그러한 시간과 노력, 돈을 투자한다면... 이라는 생각을 단 한 번이라도 해 본적이 있던가요?
과학자들을 향해 노벨상 타령을 하기 이전에 사회 전반적인 시스템이 노벨상을 배출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지 점검하고 자신들의 역할에 대해서 먼저 반성해 보는 것이 순서입니다. 가난한 과학자가 어느날 꿈속에서 노벨상감 아이디어를 얻어서 어렵게 연구한 결과 노벨상을 받았다는 설화같은 이야기가 나오기를 바라는 것은 환상입니다. 노벨 과학상도 결국은 사회전반적인 시스템이 그것을 지원하도록 갖추어졌을 때 나오는 것이지 과학자들이 연구실에만 앉아 있어서 될 일이 아닙니다.
과학이 정치에 의해 휘둘리고 놀아 난 것이 과학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할 만큼 오래되고 앞으로도 쉽게 없어지지 않을 것임이 사실이지만 그것도 정도의 문제입니다. Science나 conscience나 어원은 다 같이 지식(knowledge)에 기반합니다. 과학을 정치적 수단과 목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그것이 정치적 양심이던, 과학적 양심이던, 개인의 윤리적 양심이던 어쨌던 그렇게 하는 사람들의 지식수준에 기반한 양심 수준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식이 높은 사람이 양심을 속일수록 악성(malicious)인 면이 있습니다. 이런 병패를 최소화시키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의 과학적 증거기반 의학(EBM)은 의사의 독선적인 처방을 방지하고 양심을 속이지 못하도록 과학적인 증거를 바탕으로 환자의 입장과 의견까지도 의사결정에 반영하도록 하는 민주주의적 의사결정과정을 도입한 것입니다. 국가의 장래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기초과학에 대한 정책에서조차 이런 의사결정의 과정과 절차가 없다면 한국의 정부는 “과학적”이라는 용어와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함부로 사용할 자격이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고 봅니다. 기초과학연구원을 지지하고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그것이 옳다는 assurance를 위해서, 그리고 문제가 있다는 입장에서는 재고해 보아야 한다는 설득력있는 근거를 제시한다는 측면에서 “의견수렴”이라는 생략된 의사결정과정을 보충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야만 그것을 근거로 앞으로 이 이슈를 어떻게 풀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논란이 최소화되고 합의된 대책이 나올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