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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산되는 전문직노조 1
전문직노조 (비회원)
한경비즈니스 2005-10-30 23:54] 미국 항공우주국(NASA)에서 광(光)물리학자로 일하고 있는 폴 데이비스 박사는 연구원 이외에도 또 다른 직함이 있다. 데이비스 박사는 전미연구원노조의 지역대표도 함께 맡고 있다. 전미연구원노조의 노조원은 모두 합쳐 200여명. 3년 전과 비교하면 두 배나 늘어난 것으로 회원수는 계속 증가하는 추세다. 데이비스는 “과학자들의 의견과 주장이 관철될 수 있도록 노조를 결성하게 됐다”며 “연구원측과 협력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미국에서 화이트칼라 전문직 종사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사례가 유행처럼 확산되고 있다. 자동차, 화학, 항공 등 제조업 블루칼라 근로자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져 왔던 노조결성이 핵물리학자, 심리학자, 판사 등 전문직 종사자들에게도 번지고 있는 것이다. 최근 뉴욕에서는 약 3,200명의 심리치료사들이 전국교직원협회에 대거 노조 가입신청서를 제출했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최면술전문가들과 족병(足病)치료사들도 전문직 종사자들의 노조연합체라고 할 수 있는 전문직종사자국제연맹에 노조원으로 가입했다. 미 워싱턴 주재 영국대사관 직원들도 최근 전문직종사자국제연맹에 가입했으며, 일부 지방검찰청 검사들과 미 의회 연구원들도 이 단체의 노조원 자격을 최근 취득했다. 이처럼 화이트칼라 노조가 최근 들어 크게 확산되고 있는 것은 미국의 경제상황과 전혀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인력 구조조정이 1년 내내 실시되고 있고, 미 노동시장의 경쟁이 어느 때보다 치열해지면서 전문직 종사자조차 직업의 안정성에 대해 많은 걱정을 하게 되는 시대가 돼 버렸기 때문이다. 특히 상당수 미국기업들이 인건비가 저렴한 해외시장에서 아웃소싱하는 사례가 늘면서 전문직 종사자들은 미국 내 경쟁뿐 아니라 다른 나라의 전문직 종사자들과 서비스 경쟁을 벌여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됐다. 이런 이유로 화이트칼라 전문직들은 종전에 누렸던 각종 혜택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됐고, 따라서 노조결성을 통해 자신들의 권리를 찾자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코넬대학의 케이트 브론펜브레너 노동문제연구소 소장은 “미국의 전문직 종사자들은 자신들의 일자리가 위협받고 있다고 느끼고 있다”며 “특히 정부, 기업, 연구소 등이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해외인력을 활용하거나 프로젝트별로 계약을 맺는 경우가 많아 전문직 종사자들은 과거보다 돈벌이가 많이 줄어들었다”고 설명했다. 전문직 종사자들의 노조결성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여기에도 일정 수준의 한계는 있다. 예를 들어 공무원들은 정부와의 협상시 연방법률의 엄격한 통제를 받도록 규정돼 있으며 공무원들은 이를 흔쾌히 따른다. NASA 과학자들의 경우 전문기술엔지니어국제연맹의 노조원으로 대부분 가입돼 있는데 이들의 연봉과 각종 복리후생제도들은 미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심리치료사들의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다. 대부분 자영업 형태로 개인 상담소를 운영하고 있는 이들은 사실 노조까지 결성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의회 입법과정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정부 보조금 제도 등 각종 현안에 대해 일치된 의견을 내기 위해서는 연합체를 구성할 필요성이 생긴 것이다. 실제로 심리치료사들은 소속 노조인 전국교직원협회의 영향력을 활용, 건강보험에서 일정액의 정부 보조금을 지급받도록 법률을 개정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전문직 종사자들의 노조결성은 전혀 다른 직종이 하나로 묶이는 형태를 띠기도 한다. 이민법 판사와 엔지니어 노조가 대표적이다. 8년 전 200여명에 달하는 미국 내 이민법 판사들이 전미엔지니어노조에 회원으로 가입,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언뜻 보면 판사와 엔지니어 사이에는 별다른 공통점이 없을 것 같지만 내부 사정을 들여다보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판사들의 연봉과 연금혜택은 의회 법률로 정해지며 보다 상세한 내용은 법무부의 행정명령으로 규율된다. 판사의 연봉은 민원인들의 불편신고 접수 현황과 업무처리 능력, 업무 생산성 등 다양한 지표로 정해지게 된다. 마치 엔지니어들이 회사측과 연봉협상을 할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셈이어서 이민법 판사들은 전미엔지니어노조에 가입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이민법판사협회의 대표를 맡고 있는 데니스 슬레이번 판사는 “미국의 이민법 판사들은 폭주하는 업무 때문에 사실 한 번도 마음 놓고 쉰 적이 없다”며 “따라서 복지향상을 위해서라도 노조결성이 절실했다”고 설명했다. 사실 미국 내 전문직 종사자 노조결성 움직임은 민간부문보다 공공부문에서 더욱 활발하다. 검사와 도서관 사서, 지방공무원에 이르기까지 노조에 가입하는 직종도 매우 다양하다. 민간기업체라면 회사측의 반대에 막혀 노조결성이 어렵지만 전문직 종사자들의 노조는 상대방인 ‘경영자측’이 없어 오히려 조직결성이 수월하다. 예를 들어 민간기업체에서는 노조 집행부 결성시 찬반투표를 실시하면 득표율은 50%에 불과하지만 공공부문에서는 찬성률이 90%를 훨씬 넘는다. 정부 입장에서도 전문직 종사자들의 노조결성을 반대할 법적 권한이 없기 때문에 공공부문에서 새로운 노조가 탄생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다고 할 수 있다. 전문직 노조결성을 가장 반기는 단체는 무엇보다 미국산별노조총연맹(AFL-CIO)이다. 제조업에서 미국의 최대 노동조합기구로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해 온 AFL-CIO는 결성 반세기 만에 극심한 분열 상태로 빠져들면서 해체 위기를 맞고 있어서다. 지난 1955년 미국의 양대 노동조합 조직이던 직업별 노동조합(AFL)과 산업별 노동조합(CIO)이 연합, AFL-CIO가 출범할 때 이 조직은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 미 노동자들의 30%가 노조에 가입돼 있었으나 세계화 이후 제조업체의 해외이전이 잇따르면서 가입률은 12%로 떨어졌다. 50년 전에는 미국 민간기업에 근무하는 3명 중 1명이 AFL-CIO 회원이었으나 이제는 사기업 근무자의 8% 정도로 극도로 위축된 상태다. AFL-CIO는 지난 7월 시카고에서 대회를 열고 제조업 근로자 급감에 따른 노조운동의 대책 등 노동계 현안에 대해 협의할 예정이었으나 핵심 산하 노조인 서비스근로자국제연합(SEIU), 유나이티드푸드(UF), 팀스터스, 커머셜워커스 등 서비스ㆍ유통부문 4개 노조가 대회 보이콧을 결정, 대회 자체의 의미가 크게 퇴색됐다. 이들 4개 노조는 1,300만명에 달하는 AFL-CIO의 회원 3분의 1을 보유하고 있을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 특히 180만명의 조직원을 갖고 있는 SEIU는 아예 AFL-CIO 탈퇴를 선언할 계획을 차근차근 추진 중이다. 이들이 AFL-CIO를 탈퇴할 경우 미국의 대표적 노동조직이라는 AFL-CIO의 상징성은 상당부분 퇴색되고 연맹 운영 또한 상당한 재정적 압박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전망하고 있다. AFL-CIO의 위기는 미국 제조업체의 해외이전에 따른 제조업 노동자의 급감이 가장 주요한 원인이지만 노조 자체의 반목과 밥그릇 싸움도 조직분열을 부채질하고 있다. 특히 존 스위니 AFL-CIO 위원장이 연맹에 분명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며 조직운영을 해 온 것이 가장 직접적 원인이라는 게 미 언론들의 지적이다. AFL-CIO 분열에 반대하는 공무원노조 제럴드 메킨티 위원장은 “우리가 분열할 때 기뻐할 사람은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그를 따르는 보수주의자들 뿐”이라며 단합을 호소하고 나섰다. AFL-CIO의 분열에 반대하는 52개 노조 관계자들도 “문제가 있다면 조직 안에서 해결하자”며 단합을 호소하고 있지만 AFL-CIO의 와해는 이제 초읽기에 들어간 느낌이다. 현재 AFL-CIO 회원의 51%는 화이트칼라 직종의 노조원들이다. 지난 85년부터 20년간 약 150만명의 블루칼라 노조원들이 탈퇴한 자리를 이제는 전문직 종사자들이 채워가고 있는 셈이다. 노동문제 전문컨설턴트인 드레그 먼로는 “미국기업들이 비용절감을 위해 고육지책으로 해외 아웃소싱에 의존하고 있는 게 엄연한 현실인데도 AFL-CIO는 일자리 창출을 위한 대안조차 제대로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며 “급변하는 시대상황에 맞춰 노동운동도 새롭게 탈바꿈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유영석ㆍ한국경제 국제부 기자 yooys@hankyung.com ⓒ 한경비즈니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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