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마당 오피니언
의사 과학자?? 6
limasierra76 (비회원)
바이오 헬스케어와 신약 개발 정책의 중심 화두로 떠오른 '의사과학자(Physician-Scientist)'라는 단어, 그리고 이를 '육성'하겠다며 쏟아지는 각종 정책과 대규모 국가 프로그램들을 바라보는 생명과학자들의 마음은 묵직하고 씁쓸하다. 명칭과 정책에 은연중에 스며있는 "의사가 연구까지 겸하면 더 뛰어난 연구자가 된다"는 식의 은근한 우월의식과, 그것이 초래하는 제도적 차별을 마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단순히 명칭에 대한 거부감이 아니다. 기초 과학 현장을 오랜 시간 지켜온 전문성에 대한 경시, 그리고 오랫동안 누적되어 온 불균형한 관행이 새로운 이름으로 반복되고 있다는 깊은 우려에서 비롯된다.
1. 누적된 불균형과 오랫동안 계속되어 온 우월의식 사실 연구 현장에서 이러한 우월의식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과거 많은 의학 전공자들이 PhD 학위를 취득하는 과정에서, 정작 실험실의 전임 생명과학 연구자들이 밤낮으로 공들여 구축한 연구 설계와 데이터에 손쉽게 이름을 올리며 학위를 취득했던 불합리한 관행들을 우리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충분한 전임 훈련과 엄밀한 검증 과정 없이 연구의 결실을 공유하던 과거의 관행이, 이제는 '의사과학자 육성'이라는 제도적 포장지를 타고 다시금 합리화되는 것은 아닌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연구 능력은 의사 면허에 자연스럽게 얹어지는 부록이 결코 아니다.
2. '의사과학자 육성'이라는 논리의 한계 최근 추진되는 여러 육성 프로그램의 바탕에는 "의학적 배경을 가진 이에게 연구 기법을 얹어주면 훨씬 뛰어난 성과를 낼 것"이라는 다소 단편적인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러나 가설을 세우고, 대조군을 엄격히 통제하며, 분자 수준의 기전을 끝까지 파고드는 '연구의 엄밀함'은 수년간의 전심전력(Full-time) 훈련을 거친 전임 연구자들의 고유한 전문 영역이다.
우리는 연구를 수행하는 생명과학 연구자에게 '과학자 의사'라는 지위를 부여하거나 진료 권한을 주자고 주장하지 않는다. 각자의 전문 영역과 훈련의 본질이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오직 의사라는 자격만이 연구 영역에서조차 우월한 위치를 점하고, 특혜성 지원의 명분으로 쓰이는 것은 연구 생태계의 공정성을 해치는 일이다.
3. "그냥 '과학자'면 충분하다" 질문해본다. '의사과학자'라는 구분짓는 언어가 과연 왜 필요한가? 과학 연구의 장에서 필요한 것은 오직 엄밀한 데이터와 논리, 그리고 진실을 탐구하는 '과학자'로서의 태도뿐이다.
물론 의사 역시 뛰어난 연구를 수행할 수 있고, 실제로 훌륭한 연구 업적을 남긴 의사 출신 과학자들도 많다. 하지만 진정으로 존경받는 이들은 자신을 '의사과학자'라는 특별한 계급으로 포장하지 않고, 그저 한 사람의 '과학자'로서 연구 성과와 진정성으로 평가받는다. 오히려 연구실 안에서조차 '의사'라는 타이틀을 내세워 차별화되기를 원하거나 그 수식어 뒤에 숨으려는 것은, 오직 데이터와 논리로만 증명해야 하는 과학의 엄밀함 앞에서 도리어 부끄러운 일이 될 수 있다.
현대 바이오 연구의 본질은 임상 현장의 Unmet Needs(미충족 수요)를 아는 임상의와, 이를 분자 수준에서 해결할 기전과 기술을 가진 생명과학자의 등평등한 협력(Collaboration)에 있다. 특혜성 명칭과 육성 정책으로 연구 현장에 또 다른 계급과 착시를 만들기보다, 각자의 전문성을 온전히 존중하고 대등하게 손을 잡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진정한 바이오 혁신의 출발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