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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호르몬의 공격…암컷의 수컷화, 수컷의 암컷화
오피니언 이탈 (2019-01-11 09:38)

어린 시절 종종 바닷가에서 섬으로 놀러가곤 했다. 호미로 펄을 캐며 조개를 집어 바구니로 던지곤 했다. 그러다가 바위에 붙은 홍합을 뜯거나 근처에 정박 중이던 고깃배로 가 작은 고둥을 뜯고 놀았다. 그날 저녁이면 어김없이 조개국과 고둥 찜이 식탁에 올랐다. 조개와 고둥은 나의 어린 시절만 해도 흔하고 쉽게 구할 수 있는 먹을거리였으며 훌륭한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자연산 어패류를 쉽게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안전히 먹을 수도 없는 실정이다.

지금 지구에서 1년에 4만여 종의 생물이 없어지고 있다. 주범은 환경호르몬이다. 현재 인류는 1억 종이 넘는 화학물질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환경호르몬은 일명 ‘내분비계 교란물질(endocrine disruptor)’이다. 원래 호르몬은 혈관을 타고 흐르면서 몸에서 반응을 일으키는데, 환경호르몬은 그 기능을 막거나 비정상적인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그래서 정말 오랜 기간의 모니터링과 연구가 절실하다.

최근 <사이언스노르딕>에 ‘노르웨이 연안수의 오염물질’에 대한 중간 결과가 공개됐다. 오래 전 노르웨이 환경청이 이 같은 주제의 모니터링을 NIVA(The Norsk Institutt for Vannforskning)에 의뢰한 바 있다. TBT(tributyltin, 트라이뷰틸주석) 오염에 따른 생물학적 영향을 살피는 것이 주요 과제였다. TBT는 어패류가 달라붙지 못하도록 해양구조물이나 선박 밑바닥에 칠하는 페인트의 주요 성분 중 하나로 유기주석화합물(BTs) 중에서는 가장 독성이 강했다. 낮은 농도에서조차 어패류를 죽음에 이르게 하며, 먹이사슬을 통해 인체에까지 유입되는 물질이었다. 국내에서도 TBT에 대한 유해성 때문에 어린이용품 같은 경우 환경유해인자 표시 제도를 의무화 하고 있다.

배에 칠해진 페인트는 물과 접촉할 경우 TBT가 새어나와 바닷물과 섞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TBT는 주로 물속의 생체 시료나 입자에 달라붙는데 바닷물을 먹이로 여과하는 유기체들이 이것을 쉽게 흡수했다. 그리고 TBT를 잔뜩 먹은 유기체들을 다시 좁쌀무늬고둥이 잡아먹음으로서 체내로 TBT가 축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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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쌉무늬고둥은 높이 4cm, 껍질의 두께가 2cm 이상으로 다양하다. TBT로 인해 좁쌉무늬고둥에게서 암컷을 수컷화 하며 불임이 발생했다. 사진 = NIVA.

장기 모니터링과 연구의 중요성

NIVA의 모니터링은 무려 27년간 이어졌다. 연구원들은 암컷 좁쌀무늬고둥에게서 불임이 발생한다는 점을 발견했다. TBT는 호르몬 에스트로겐과 안드로겐의 균형에 영향을 주었고 음경과 수정관을 발달시켰다. 특히 소위 임포섹스(imposex, 암컷에 수컷의 생식기가 생기면서 불임이 나타나는 현상 혹은 암수의 혼합)라 불리는 번식장애를 유발해 암컷을 수컷화 하여 불임을 유발하였다. 심각한 경우 수정관이 질 입구를 완전히 덮었다. 이러한 영향은 잠재적으로 개체군 크기를 줄일 가능성이 컸다.

치명성을 인지한 국제해사기구는 TBT 사용을 전면 금지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했다. 1990년에 들어 길이 25m 이하의 해양 선박에서 TBT 사용이 금지되었고, 2003년에는 25m보다 긴 선박으로 확장되었다. 그럼에도 임포섹스 감소는 분명치 않았다. 그러던 2008년에 완전히 TBT가 금지되자 비로소 임포섹스의 발생이 낮아졌다. 노르웨이에서 2008년에 TBT 전면 금지가 발효된 뒤 조금씩 해안선의 좁쌀무늬고둥들이 임신 가능한 상태로 바뀌었다. 그리고 2017년에 이르러 처음으로 노르웨이 해안의 좁쌀무늬고둥의 성전환 사례가 발견되지 않았다. 오염물질을 제한하는 것은 확실히 도움이 됐던 것이다. NIVA는 좁쌀무늬고둥에 대한 모니터링을 2020년까지 계속 할 예정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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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색은 좁쌀무늬고둥의 임포섹스가 줄어들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파란색은 TBT 농도가 줄어드는 걸 나타낸다. 빨간색은 TBT 금지가 도입된 해를 보여준다. 2003년 25m 이상의 큰 배에서 TBT를 금지하면서 현격한 감소를 보여주고 있다. 주목할 점은 TBT의 완전한 금지 조치로 인해 그래프가 지난 10년 동안 거의 변동이 없다는 사실이다. 사진 = NIVA.

지난 50년 동안 시장에 등장한 인공화학 물질은 8만 7천 종류가 넘는다. 그러나 안전 검사를 받은 화학 물질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인공 화합물들은 인체 내부로 들어와 신호 반응 전달계가 미처 적응할 사이도 없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환경호르몬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한 이래 그에 대한 영향력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화학물질이 일으킬 모든 생태적 문제를 예측할 수 있는 과학자는 없다. 영향력을 확실히 확인하기 위해 지금으로서는 장기 모니터링이 필수인 셈이다.

우리나라만 해도 가습기 살균제 등 아이들을 위협하는 화학물질이 가득하다. 아이들은 집 안팎 모두에서 합성 물질에 노출된 실정이다. 합성 물질 대부분은 지용성이기 때문에 쉽게 몸 밖으로 배출되지 않고 지방 세포에서 오랜 기간 머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방과 난소에 많은 지방 세포를 지닌 여성의 경우 자칫 유방암이나 자궁내막증, 전립선암으로 발병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다음 세대를 향한 임신과 출산에도 큰 문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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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성숙한 좁쌀무늬고둥 암컷에게서 발견된 정관(精管 정자를 정낭으로 보내는 긴 관)과 음경(penis, 陰莖). 사진 = NIVA.  

어린 새끼들에 많이 축적되는 환경호르몬

환경호르몬이 크게 주목받기 시작한 건 생식력 장애가 나타나면서부터였다. 원래 호르몬은 몸의 한 부분에서 분비되어 체내 표적기관으로 이동하는 일종의 자연스런 화학물질이다. 정교한 기계처럼 작동하며 인체의 성장과 발달, 성욕, 행동과 지능, 기억과 노화 등의 모든 생리적인 기능에 영향을 준다. 그런데 이를 흉내 내는 환경호르몬은 체내 기능을 올바로 작동시키지 않고 변형해버렸다. 오늘날 아이들이 다섯 살까지 접하는 양으로 치자면 일흔이 넘은 노인들이 평생 접한 양과 거의 비슷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에스트로겐을 포함한 여러 호르몬을 흉내 내는 인공 화학물질은 우리가 사용하는 세제, 플라스틱, 살충제, 화석 연료 부산물 등에서 나오고 있다. 1979년 한 회의에서 보건 정책 담당자들이 모였다. 모임의 주요 목적은 에스트로겐처럼 작용하는 인공 화학 물질을 알아보려는 것이었다. 에스트로겐이라 한다면 개, 고양이, 새, 악어 뿐 아니라 인간의 성장에 관여하는 강력한 신호 물질로 고대 그리스 사람들 역시 배아의 생식 기관 발생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호르몬으로 에스트로겐을 꼽았을 정도였다.

1990년대 말, 미국 플로리다의 타워 케미컬 사가 아폽카호수로 화학 물질을 흘려보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호수에 사는 악어들에게서 이상 증상이 나타났다. 호수의 어떤 지역에서 악어 개체수의 90%가 감소했는가 하면, 남성호르몬이 파괴돼 상대적으로 여성 호르몬 양이 늘어나 대다수의 악어가 암컷으로 태어난 지역도 있었다. 또 음경과 고환은 정상이지만 여성 호르몬을 만드는 악어도 나타났으며, 고환 같은 생식선은 있었지만 음경이 아예 없는 악어도 나왔다. 물이 깨끗해진 이후에도 화학물질은 악어 체내의 지방 세포에 남아 생식과 성장에 영향을 미쳤다.

캘리포니아대학교의 야생동물 독물학자들은 화학물질에 덮인 먹이를 먹은 암컷 새들을 30년 이상 연구했다. 그 결과 이들 암컷 새들은 수컷처럼 행동했다. 마치 수컷처럼 다른 암컷들을 유혹했던 것이다. 플라스틱 물질인 옥틸 페놀과 비스페놀 A에 노출된 플로리다 퓨마 연구의 경우, 노출된 부모에게서 태어난 수컷 퓨마들의 고환이 몸 밖으로 나와 있지 않았다. 같은 플라스틱 물질에 노출된 부모 쥐에서 태어난 수컷 쥐들도 고환이 작고 정자 양이 줄어있었다. 환경 호르몬의 영향력이 후세까지 이어짐을 증명하는 사례들이었다.

환경호르몬은 상위포식자에까지 축적된다. 화학물질은 토양에서 정말 오래 남는다. 흰개미를 죽이려고 쓴 톡사펜 성분은 10년 후 모래토양에서 나타난 적이 있다. 벤젠헥사클로라이드는 토양에서 11년이나 잔류했다. 문제는 화학물질을 흡수한 식물을 동물이 먹고, 그 동물을 인간이 잡아먹는다는 사실이다. 화학약품을 먹은 곤충은 새들이 잡아먹고, 그 새들은 결국 인간에까지 영향을 끼친다. 그렇다면 인간의 성적 정체성 또한 언제,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참고문헌 및 사이트

1. 『레이첼 카슨과 침묵의 봄』(김재호, 살림지식총서, 2009)

2. 『환경호르몬의 반격』(D. 린드세이 벅슨, 아롬미디어, 2007)

3. http://sciencenordic.com/restriction-pollution-helps-infertile-snails-have-recovered-along-norwegian-co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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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호 (<교수신문> 과학전문기자)
학부에서 수학을, 대학원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학술기자, 탐사보도 연구원 등으로 일했다. 지금은 과학커뮤니케이션 차원에서 자유롭게 글을 쓰고 있다. 환경과 생태의 차원에서 과학철학에 대한 고민이 많고, 영화와 연극, 음악을 좋아한다. 현재 <동아일보>에 과학에세이를 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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