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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협주곡 2-20] 학벌과 진로
오피니언 한빈 (2018-11-26 10:52)

차별적인 문화를 비판하고자 하는 시도는 때때로 하나의 딜레마 – 정확히는 오해라고 하는 편이 맞겠지만 - 에 빠지고 만다. 예를 들어, 여성도 CEO를 할 수 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유능한 여성 CEO의 목록을 나열하면 어떤 이들은 이를 성차별 부재의 증거로 이해하곤 한다. 비슷하게, 물리학계의 성차별을 지적하기 위해 CERN(유럽입자물리연구소)의 성비 불균형을 제시하면 어떤 이들은 이를 여성의 열등함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1].
 
학벌에 대한 얘기도 비슷하게 흘러가는 경향이 있다. 학벌과 무관하게 뛰어난 과학자가 있을 수 있다는 주장을 단순하게 학벌의 부재로 이해하거나 학력에 따른 능력 차이를 학벌에 대한 정당화로 몰고 가는 것이다. 이러한 오해에 잘 대응하기 위해서는 학벌의 기제를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는 기회와 정보접근성의 관점에서 학벌이 가져오는 문제점들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다만, 이 글은 알려진 통계와 사실에 근거한 것이라기보다 주변 학부생과 대학원생들로부터 전해들은 얘기가 주를 이룰 것이다.
 
소위 톱스쿨로 불리는 미국 학교 중 하나에서 입자물리학을 전공하는 형에게 톱스쿨에 다니면 어떤 점이 좋은지 물은 적이 있다. 나는 그로부터 의외의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입자물리학을 전공해도 졸업 후에 꼭 입자물리학을 계속할 필요도 없으며 그렇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배운 것이 톱스쿨의 가장 좋은 점이라고 했다. 공부한 것을 바탕으로 다양한 가능성과 진로를 고려할 수 있는 기회와 정보가 주어지는 것이 가장 좋은 점이었다고 한다.
 
그가 얘기한 그 학교의 모습은 어딘가 서울대와 대조적이었다. 나는 학교에 다니면서 학부 때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원을 가고, 대학원에서 열심히 연구해서 교수가 되는 길 외에는 별로 들어본 적이 없다. 아니면 전문대학원이나 학부 졸업 후 취직을 생각하거나. 전공을 불문하고 내 또래의 학생들은 모두 비슷한 처지였다. 어떠한 길을 시도할 생각조차 못하는 것과 선택하지 않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이런 차이가 서울대와 해외 명문대 사이의 차이를 가져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한국 안에서는 서울대와 비서울대 사이에도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지난 계절학기 수업 중에 한 지방 국립대에서 교환학생을 온 의학 전공자와 같은 수업을 듣게 되었다. 우연의 일치로 우리 둘은 보건학이라는 공통의 관심사 때문에 가까워질 수 있었고 그로부터 여러 이야기를 듣게 됐다. 자신이 다니는 학교에서 기초의학을 전공하겠다고 하면 ‘무슨 기초야, 그런 건 서울대 다니는 애들이나 하는 거지’ 같은 얘기를 듣는다고 했다. 해당 진로를 걷는 사람도 많지 않아 정보와 기회를 얻기도 어렵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내가 직접 겪은 얘기다. 작년 겨울에 내년도 계획을 세우면서 관련 전공으로 회사 인턴쉽을 생각하며 구직정보를 찾고 있었다. 그때 나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되었던 정보는 수도권 소재 과학영재학교를 졸업한 선배가 해당 본인이 졸업한 고등학교의 내부 커뮤니티에 올라온 구직 정보를 나에게 알려준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학교를 한 학기 더 다니기로 하면서 인턴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정보와 기회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던 경험이었다.

이러한 일들을 겪으면서 정보력과 기회가 학벌이라는 차별적 문화를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라는 것을 느꼈다. 특정 학교에 속했거나 졸업한 어떤 개인이나 집단이 타학교 출신을 배제하겠다는 노골적인 악의가 아니더라도 고립된 정보와 기회는 자연스럽게 정보와 기회의 불평등을 낳으며 많은 이들을 배제하고 있었다. 나 역시 이러한 구조의 수혜자인 동시에 피해자였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학생들에게 더 많은 정보와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학고를 졸업하고 서울대에 진학해 2년째 기초의학교실에서 월급을 받으며 일하고 있지만 단 한 번도 학교로부터 체계적인 진로지도를 받은 적이 없다. 친한 선배에게, 연구실 지도교수님께 개인적인 도움을 알음알음 받았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교육은 개인 대 개인으로 이뤄져서는 안 된다. 학교와 학년을 불문하고 모두에게 체계적이고 제도적으로 전달되어야만 한다. 나아가 이렇게 충분한 정보와 기회가 주어졌을 때 학생들도 진정으로 자발적인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고 본인의 출신에 따른 불이익으로부터 조금 더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지금처럼 극히 제한된 정보에 근거한 판단은 결코 진정으로 자유롭고 자발적인 선택이 될 수 없으니까.
 
 
Reference
[1] https://www.nature.com/articles/d41586-018-06913-0


 한빈 – 수학과 생물학에 관심이 많은 학부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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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 3
회원작성글 SnakeDoctor  (2018-11-27 01:36)
joon9657// 개인적인 생각을 덧붙이자면 "지도"라는 것에 하나하나 일일이 가르쳐 준다는 것만이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큰 방향을 제시조차 못한다면 교육기관이 존재해야할 이유가 없죠.
같은 논리로 대학원에서 교수의 "지도"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하나하나 일일이 다 가르쳐준다는 것이 아니라 큰 방향을 제시해준다는데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큰 방향을 제시조차 하지 못하는 교육기관은 존재해야할 이유가 없는 것이고 그런 측면에서 요즈음 대학교육에 대한 회의론까지 나오기도 하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회원작성글 바이오인포메틱스  (2018-11-27 10:31)
SnakeDoctor// 동의합니다.
어른이면 스스로 길을 개척하는건 맞는데 학교에서 대략적인 길을 알려주는 정도의 지도가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뻘짓을 줄여 더 나은 사람이 될수있지 않을까요?...
회원작성글 Gone  (2018-11-27 13:57)
Joon9657// 나이만 먹으면 어른인가요? 심지어는 초중고등하교 때도 글쓴이가 언급한 내용에 관한 이야기들은 전무하다시피 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정말 단 한번도 제대로된 직업교육, 직업선택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렇다면 도대체 말씀하시는 ‘어른’은 나이만 먹으면 자연스레 선택의 능력과 책임질 능력이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는건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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