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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협주곡-3] “국박”의 짧은 역사, 어떻게 직시할 것인가?
오피니언 김태호 (2017-04-18 09:36)
한국이나 미국이나 이공계 인력 구조가 점점 더 위기로 빠져 들어가는 근본적인 원인은, 거기에 입문하는 사람의 수와 그들에게 충분한 보상을 줄 수 있는 일자리의 수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맞지 않을 뿐 아니라 그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 이는 현대 과학기술 연구 활동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기 위해 필요한 예산과 장비와 인력이 점점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학계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연구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더 규모가 큰 연구팀을 꾸려야 하는데, 각각의 연구팀을 피라미드에 비유하자면 피라미드의 밑바탕은 점점 넓어지지만 그 꼭대기의 숫자는 별로 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피라미드 아래쪽을 담당하는 이들이 위로 올라갈 가능성은 점점 낮아지고, 그 문제가 시스템 밖에 있는 이들에게도 숨길 수 없는 지경이 되어, 이 시스템에 새로 들어오고 싶은 사람들이 주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내가 이 문제의 해법 같은 것을 알고 있을 리는 없다. 다만 역사를 공부하면서 알게 된 것은, 개인의 힘으로는 도저히 바꿀 수 없을 것처럼 보이던 공고한 제도들도 시간의 흐름 앞에서 예외 없이 흥망성쇠의 과정을 거쳤다는 사실이다. 과거의 일을 돌아봄으로써 현재 우리 앞에 우뚝 서 있는 강고한 구조가 사실은 생각보다 오래 되지 않았고 생각만큼 필연적이지도 않았다는 것을 되새겨 보는 것도, 문제를 새로운 각도에서 인식하는 데 나름대로 도움은 될 것이다.

오늘날 한국은 과학기술 연구 인력의 양과 질, 그리고 연구개발에 투입하는 비용 등 여러 지표에서 세계적으로 상위권에 올라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대학원에 진학하고 대학원에서 수준 높은 연구를 해서 박사학위라는 것을 따게 된 것은 사실 대단히 최근의 일이다. 대학원의 의미도, 박사학위의 의미도, 반세기 전으로만 거슬러 올라가도 사뭇 달랐다. 의미가 문제가 아니라, 사실상 존재하지도 않았던 시절도 그리 멀지 않다.

딱 50년 전인 1967년, 문교부는 “박사학위의 범람을 막기 위해 68년부터 대학원 박사학위 과정을 거치지 않는 학위 수여는 없애겠다.는 방침을 발표했다(“박사다과론: 그 배경과 정책을 검토해 본다”, 중앙일보 1967. 2. 14). 국내에서 대학원이라는 것이 운영되기 시작한 1952년 이래, 1966년까지 “18개 대학에서 1,017명의 박사를 배출하여 누계 1천 명을 넘어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요즘은 해마다 국내에서만 1만 명이 넘는 박사가 쏟아져 나오고 있는 마당에, 누계 1천 명을 두고 “범람” 운운하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소리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기사에서 언급한 1,017명의 국내 박사 가운데 무려 885명이 의학박사였고, 인문사회와 이공계는 다 합쳐도 130명 남짓 밖에 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 기사의 초점도 부실한 의학박사가 양산되고 있는 현실에 대한 비판에 맞추어져 있었다. 박사학위가 필요한 개업의들이 대학원에서 3년 이상 정식으로 수업을 들어야 하는 이른바 “신제박사”를 기피하고 “4년제 대학 졸업 후 7년 이상의 연구 경력”만 있으면 취득할 수 있는 “구제박사”로 몰리고 있으며, 대학들은 이들에게 연구비 명목으로 받는 돈이 없으면 연구실을 운영할 수 없는 형편이므로 이러한 문제가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1인당 50만 원에서 1백만 원 정도를 학교에 바치고 박사학위를 돈으로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기사에서 인터뷰한 어느 교수도 “이러한 변칙적 방법 이외의 연구비 조달 방도는 없다”고 문제를 시인하고 “신제박사만 양성하다가는 의학연구실의 대부분이 문을 닫아야 할 판”이라고 하소연하고 있다.

이렇게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의학 분야의 구제박사가 나날이 늘어났던 까닭은 박사학위가 필요한 의사들이 그만큼 많았기 때문이다. 뒤집어 말하면, 1966년까지 약 15년 동안 이공계 국내 박사가 1백 명 정도밖에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결국 그에 대한 수요가 그만큼 낮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왜 그렇게 수요가 낮았는가? 이공계 전문가로서 일할 수 있는 곳도 적었고, 그런 직장에서 막상 박사학위가 꼭 필요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에서 국제적으로 의미 있는 이공계 분야의 연구를 할 수 있는 직장은 사실상 없었으므로 이공계 전문가가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직업은 대학 교수였다. 그런데 한국 대학의 이공계 학과들은 교수에게 박사학위를 요구할 형편이 되지 못했다. 이는 한편으로는 교수 임용에 박사학위가 필수 요건이 아니었던 일본 대학 시스템의 영향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1945년 해방 직후 일본인 교수들이 대거 물러나면서 생긴 교수진의 공백을 갓 학부를 졸업하거나 대학원에 재학 중이었던 한국인 학생들이 채울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조건 때문이기도 하다. 이렇게 박사학위 없는 교수들이 교수진의 절대다수를 차지한 상황에서 구제박사 제도는 과도적 조치로서 불가피했던 면도 있다. 실제로 학문적 황무지나 다름없던 1950-60년대의 열악한 한국 대학을 지키며 제자를 길러낸 교수들이 나중에나마 그 노고에 걸맞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구제박사 제도의 덕이 컸다.

하지만 구제박사 제도가 존속했던 동안에는 대학원에서 연구를 통해 박사학위를 딴다는 새로운 모델이 제대로 정착되기 어려웠던 것 또한 현실이었다. 혼란기에 젊은 나이로 교수가 된 이들은 어쩔 수 없었다고 쳐도, 그 뒤 세대로 구제박사를 받은 이들에 대해서는 “불고기 박사”니 “사과 박사”니 하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구제박사 제도는 1972년 교육법 시행령이 개정되면서 폐지되었고, 3년간의 유예기간을 거쳐 1975년 2월 마지막 박사를 배출하였다. 막차를 놓치지 않으려는 인파가 몰려들다 보니 유예기간 동안 박사학위 취득자 수는 대폭 늘어났다. 해방 후 1975년까지 30년 동안 배출된 국내박사가 6천 명에 못 미치는데, 그 가운데 40퍼센트가 넘는 2천 5백여 명이 1972년부터 1975년 2월 사이에 박사가 되었다. 마지막 기회인 1975년 2월에는 무려 584명의 박사가 탄생했다. 이중 절대다수가 구제박사였음은 물론이다. (“개정 교육법에 쫓기는 ‘구제’ 박사학위논문 쇄도”, 중앙일보 1974. 12. 11; “쏟아진 박사: ‘구제’ 마감 따라 대학마다 무더기 배출”, 동아일보 1975. 2. 22)

한편, 박사학위가 꼭 필요한 곳에서는 이야기가 달랐다. 미국에 유학 간 과학기술자들은 전문가로서 연구를 지속하려면 박사학위를 따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대부분 박사학위를 땄다(물론 그러기 위해서 유학을 간 것이기도 하다). 1960년 한 해에만 28명을 비롯하여 60년대 내내 매년 수십 명의 한국인 박사가 배출되었고, 1970년대에는 그 숫자가 매년 세 자리로 늘어났다. 이처럼 해방 후 한국인 과학기술자의 주력부대가 양성되고 있었던 공간은 한국이 아니었다.

이처럼 “한국 과학사의 주무대가 사실상 한국이 아니었던” 현상 또한 공과 과를 모두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 글의 주제인 “국박”의 역사라는 측면에서만 생각해 보면, 이렇게 학문후속세대 양성을 아웃소싱한 대가는 컸다. 분단과 전쟁의 아픔을 뒤로 하고 점점 많은 이들이 유학길에 올랐고 점점 많은 이들이 국제 학계에서도 두각을 나타냈지만, 그럴수록 국내 대학원의 위상은 그만큼 더 모호해지고 있었다. 국내 대학원의 존재감 자체가 미미했던 시절에는 이것이 문제라고 인식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1980년대 중반 이후 국내 대학원에 연구비라는 것이 생기고 본격적인 연구 역량이 쌓이기 시작하면서, “국박의 문제”는 현실의 문제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제대로 된 교육과 연구를 하고 명실상부한 박사를 양성할 준비가 되었는데, 그들을 위한 자리는 찾아보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나마 1990년대 중반까지의 호황이 외환위기로 끝나버리면서 상황은 더욱 어려워졌다. 국내에서 학문후속세대를 양성해야 한다는 대의명분도 학교, 학과, 연구실 단위로 실적을 쌓아 살아남아야 한다는 현실적 절박함 앞에서는 힘을 쓰지 못했다. 아니, 대의명분은 이상한 형태로, 절반만 살아남았다. 학문후속세대의 대학원 생활에 대해서는 많은 지원 사업들이 생겨났지만, 막상 그들이 학위를 따고 난 뒤의 진로에 대해서는 논의가 별로 활발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구제박사 시절을 빼면 사실 “국박”의 역사는 기껏해야 40년 남짓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니 그 미래를 섣불리 단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일단 용기 있게 문제를 직시하지 않으면 해결을 향한 첫걸음조차 뗄 수 없다. 학계의 재생산을 어쩔 수 없이 외국에 의존해야 했던 역사는, 이제 우리에게 곤혹스러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 당신이 교수라면, 당신이 가르치고 길러낸 제자를 당신의 후배 교수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는가? 그것을 실현시킬 자신이 있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당신이 대학원에서 하는 일들의 의미는 무엇인가? 당신의 제자들에게 무엇을 목표로 하라고 이야기해 줄 것인가?


 
김태호 (전북대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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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재, 남궁석, 김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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